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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교리와 그 실제적 적용 (신 1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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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신명기 10장에서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주로 설교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제목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정해집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사(動詞)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12-13절에는 5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첫째 동사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fear the Lord)’입니다. 둘째 동사는 그 모든 도를 ‘행하라(walk in his ways)’입니다. 인생길을 걷되 함부로 걷거나, 좌로나 우로 치우쳐서 걷지 말고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동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love him)’입니다. 네 번째 동사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serve him)’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동사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keep his commandments)’입니다.

사실 설교자들은 이 내용을 지속적으로 증거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잔소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잔소리를 반복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네 행복을 위함’(13절)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자꾸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지 자식이 망하라고 잔소리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저도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들에게 “제 때에 밥 먹어라. 건강관리 잘 해라.

또 공부할 때는 허리를 펴라”는 등의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섯 가지 동사를 사용하시며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지, 하나님께서 그런 권리를 가지고 계신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선택의 교리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셔서 멸망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받을 자격이 없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잔소리 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선택의 교리(doctrine of election)는 광범위한 관점으로 살펴봤을 때, 예정의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예정하시지만, 특별히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에 대한 예정을 국한해서 ‘선택의 교리’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선택, 혹은 예정이라는 단어들을 기피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단어들이 운명론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그 본문이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간에, 혹은 회중들이 그 내용을 좋아하거나 말거나 간에 성경이 선포하는 교리라면 가감 없이 증거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설교자의 사명은 말씀을 가감 없이 증거하는 것이고 그 일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신명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1. 신명기에 선포된 선택의 교리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은 어떠한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 자유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자유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진리입니다. 본문 14절과 15절은 내용상 연결이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14절은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연결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말씀들은 다음과 같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어느 누구를 택하더라도 강요를 받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 되신 하나님께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주제넘은 피조물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7절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의 외모나 학식, 명예와 재물 등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따라 움직이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며, 만유의 소유자로서 절대 자유를 가지신 분이므로 피조물의 조건에 따라서 영향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편 115:3)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행하실
수 있는 절대 자유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미리 내다보시고 피조물의 행동에 따라 미리 아심으로써 예정하신다는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의 예지예정론은 피조물의 주제넘은 이론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은 예정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지예정을 믿지 않습니다. 예지예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따라 할 수 없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끌려가는 형국을 보여주는 이론입니다. 제가 믿는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절대자유와 절대주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절대예정입니다. 위대한 칼빈 선생이 주장한대로, 어거스틴 목사님이 가르치신 대로, 사도 바울이 주장한대로 절대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절대예정하신다는 교리가 옳은 것입니다. 저는 모세가 절대예정론의 편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을 따라 강요당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거나 구원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들이 선택받을 이유나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을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 7:7)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운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6)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고 완악한 백성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신명기 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광야생활 중, 다섯 군데에서 범죄한 현장을 설명하는 것이 신명기 9장입니다. 첫 번째 현장은 호렙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절했습니다. 모세가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십계명 돌비를 던져버린 곳입니다. 두 번째 현장은 다베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악한 말로 원망을 하다가 진중에 불이 일어나는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현장은 맛사입니다. 맛사에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하였습니다. 네 번째 현장은 기브롯 핫다아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만나에 대해 불평하며 고기가 먹고 싶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두 달 동안 메추라기 떼를 내려 먹게 하시고 그들의 원망에 따라 심판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현장은 가데스바네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불신앙하는 열 명의 정탐꾼을 따라 여호와의 명
령을 거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명기 9장만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요, 완악한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이유가 전혀 없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9장의 핵심내용은 신명기 9장 2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스펄전 목사님은 본문을 설교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피조물 안에 하나님을 움직일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차라리 인간보다도 마귀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히려 마귀보다 더 아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조건을 따라 마음을 움직여서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보다는 마귀를 택하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왕들은 버리셨지만 소경이자 거지였던 바디매오는 택하셨습니다. 학식 많은 바리새인들은 버리셨어도 남의 세금을 떼어먹던, 죄가 많아서 통곡하던 세리는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문벌과 지혜가 좋은 자는 다 버리셨어도 미련하고 천하고 약한 사람들은 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똑똑해서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실만한 아무런 이유나 조건, 공로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는 이론입니까? 내 속에 어떤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면 만약 그 조건을 잃어버리게 되면 택함과 구원과 믿음도 잃어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만한 아무런 근거와 이유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15절)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민족들을 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다른 민족들을 택하실 자유와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부족하고 숫자도 작고 죄악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강요나 조건에 따라서 움직이실 수도 없는 분이거니와 하나님을 강요해서 어떤 행동을 하시도록 종용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행동은 기쁨이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누가 강요해서 한다면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하는 행동은 기쁨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스스로 선택해서 한다는 것이므로 기쁨은 배가 됩니다. 또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 강요당하는 일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성취감이 높기 마련입니다. 최고책임자가 한마디만 하면 맨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북한 김정일 공산체제가 더 잘 됩니까? 아니면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되 자발적으로 하라는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 더 잘됩니까? 강요가 잘 됩니까? 파쇼가 잘 됩니까? 하나님은 파쇼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자발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작년에 모 집사님께서 본당의 조명 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5,000만원을 헌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5,000만원을 헌금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한 일이 이렇게 확장되어서 리모델링이 시작되고 완성되었습니다. 그 분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시작된 일에 다른 집사님들과 장로님들, 권사님들, 또한 모든 성도님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셔서 이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행할 때에 기뻐하시고 복을 부어주십니다.

2. 선택교리의 실제적 적용

이와 같은 세 가지 원리를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택한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야 할까요? 모세는 교리가 교리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인 적용에까지 이르도록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16절)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목을 곧게 한다는 것은 마음이 완고하고 완악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택한 백성들은 목을 곧게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에 할례를 행하며 목을 곧게 하지 않는 방법일까요? 모세는 몇 가지 교훈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17절) 첫째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모를 따라 택하지 아니하셨으니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따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5절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야고보서 2장 9절에도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를 따라 택하지 아니하셨으니 우리 성도들도 사람을 외모에 따라 구별하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고 해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만 교제하고 낮은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행동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는 부자니까 부자들하고만 놀겠다. 나는 옷을 깨끗이 입었으니 옷을 잘 입은 사람들하고만 놀겠다. 우리 구역은 수준이 높은 구역이니 이런 수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우리 구역에 받지 않겠다”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여기는 행동입니다. 성도들은 외모에 따라 모이고, 외모에 따라 사람을 업신여기는 짓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외모에 따라 우리를 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아이큐 200인 사람이나 100이하인 사람이나 모두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사람을 대할 때마다 공평무사하게 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주고받는 것은 선물이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것은 예물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헌물입니다. 그러나 뇌물은 사람을 조정하고자 하는 악한 의도로 돈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과 예물은 주고받으시고, 헌물은 더 많이 드리시되 뇌물은 주지도 마시고 받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뇌물이 오가는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후진국으로 갈수록 뇌물이 통합니다. 뇌물이 통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뇌물을 받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도들도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악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약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무지한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18-1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되었을 때, 그리고 나그네 되었을 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여 택하셨으니 그들도 나그네 된 사람, 고아와 과부처럼 약한 사람들을 변호해주고 사랑하며 조건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한다고 가난한 사람에게 밥 한 끼 사주면서 “이 밥을 먹었으니 교회에 나오라”는 식으로 전도하는 것은 치사한 일입니다. 밥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에게는 그냥 밥을 주세요. 교회에 나오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저 나도 아무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나도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섬겨야지 그거 얻어먹고도 교회 안 나오냐는 식으로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동병상련을 아는 존재입니다. 나그네 된 사람은 나그네를 사랑하고, 허물이 많았던 사람은 허물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왕년에 술에 찌들어 살다가 하나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술을 끊은 성도들은 술 먹고 비척거리는 사람들에게도 정을 줄 수 있습니다. 죄 많이 짓고 용서받은 사람은 죄 많이 지은 사람을 보면 정이 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동병상련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한 초보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칼 맞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칼을 놓더니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집 주인과 오십견에 대해 치료 정보를 나누고 그냥 가버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또 어떤 혀 짧은 사람이 군대에서 보초를 서는데 누군가 지나가자 혀 짧은 소리로 “꼼닥마”라고 외쳤습
니다. 그러자 갑자기 혀 짧은 소리로 “아! 깜닥이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혀가 짧은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나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동병상련입니다. 우리가 나그네 되었을 때, 노예 되었을 때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베풀어야 합니다.

결 론

어떤 분들은 구약의 선택을 왜 신약시대와 연관해서 설명하느냐고 질문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민족적으로 선택하신 것은 신약의 교회에 대한 선택의 예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선택의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신 원리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아무런 이유와 근거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혼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속으로 의문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 안에 죄가 많은데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실까? 지금 내가 이렇게 환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는 것일까?’ 그러나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보다 죄가 더 많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지금보다 허물이 더 많았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처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조건에 따라 변화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무리 세상이 요동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형편 처지가 어렵고 환난과 고통이 몰려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기뻐하셨다는 진리는 결코 요동치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에게 한 가지만을 요구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20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친근히 하여 가까이 가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말씀하십니다. “내게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고, 치유가 있고, 부요가 있다. 너희가 병들었느냐? 나를 가까이해라. 너희가 마음이 슬프냐? 나에게 가까이 해라. 내가 기쁨을 주겠다. 너희가 축복을 원하느냐? 물질이 없어서 고통스러우냐? 내게 가까이 와라. 금도 내 것이고, 은도 내 것이고, 모든 축복이 내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아! 내가 너를 택하였으니, 내가 너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였으니 너의 조건에 관계없이, 환경 처지에 관계없이 내게 가까이 와라. 나를 친근히 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가까이 하고 복을 주겠노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성전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이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이 성전에 올 때마다 하나님을 멀리 하던 분들이 다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앞에 허물과 죄가 있으면 토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가까이 하시리라 하셨으니 주여 내게 축복으로 가까이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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