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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고후 4:16- 고후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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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였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훈련 그 자체도 힘든 것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저녁에 막사로 돌아와서 취침 전까지 진행되는 내무생활이 더 괴로웠습니다.
  우리 중대에는 4개 내부반들이 있었고, 각 내무반마다 하사 계급의 조교 한 명이 내무반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내무반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내무생활의 고달픈 정도가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소속되었던 제1내무반장이 제일 사람 좋은 편이었습니다.
  무서운 조교답지 않게 얼굴에 싱글싱글 웃음도 자주 띄우고, 점호시간에 단체기합을 줄 때에도 다른 내부반장들보다는 그래도 좀 더 인간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사관 조교들 본인들도 중대장으로부터 매일 들볶이고 기합도 자주 받는 등 군생활의 스트레스와 괴로움에 싸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유독 우리 내무반장만은 뭔가 마음이 가벼워 보이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점호시간에 그 내무반장이 "인제 나는 찐 라면 12개만 더 먹으면 제대한다."라고 득의만만하게 미소를 띠면서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매 주일 점심식사로 '찐 라면'을 배식했습니다.
  그러니 '찐 라면' 한 개당 1주일 남은 셈이니까, 12개라면 12주, 즉 석 달만 지나면 제대하게 될 소위 '말년 하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그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도 또 앞으로 남아 있는 3년 군생활을 생각하면 더욱 막막하고 문자 그대로 '죽을 맛'이었던 훈련병들과는 달리, 그 내무반장은 코앞에 다가온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희망 때문에 그처럼 매사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4장 16절부터 18절에서 그는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생활이란 전도여행에서 오는 육체적 피곤과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핍박으로 점철된 데다가, 일부 못된 교인들로부터 당하는 괴로움까지 겹친, 그야말로 '죽을 맛' 나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실로 그의 "겉사람은 후패하는," 즉 그의 외면적인 인생은 매일 더 닳고 긁히고 소모되고 약해져 갈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나는 낙심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내 속사람은 점점 더 새로워지고 있다."라고 오히려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이란 잠시 받는 가벼운 것에 불과하다."라고, '이까짓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아주 여유 만만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남들처럼 꼭 같이 늙어가는 육신을 가지고, 아니 보통 사람들보다 스트레스와 고통이 갑절 이상 되는 삶을 살던 그가 도대체 무슨 연유로 해서 그처럼 오히려 싱글벙글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뭔가 '바라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과거를 뒤돌아보다'나 '현재를 돌보다'는 뜻의 말이 아니라 '바라보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처럼 장차 다가올 그 어떤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영원한 것"을 소망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까닭에, 자기의 육신생활에서 매일 겪게 되는 괴로움들은 그저 "잠깐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가볍게 일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바울이 바라보았던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고 있는 천당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했으니 그 곳에서의 영생임에 틀림없습니다.
  실로 사도 바울을 위시하여 모든 기독신자들에게 그처럼 줄기찬 기쁨과 활력을 삶에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천당영생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믿는 천당영생은 어떤 것이며 그 믿음은 이 현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입니까?

  1. 천당에 나를 위하여 예비된 집이 있다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금세의 어떤 환난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게 해줍니다.

  5장 1절 말씀에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우리의 집을 "장막 집," 즉 텐트와 다름없는 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생들이 몸 담고 사는 집이란 막대기 한두 개, 혹은 말뚝 몇 개만 빼내면 풀썩 "무너지는" 텐트와도 같이 지극히 취약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은 그런 '땅의 집'을 마치 백년 천년 살 집인 것처럼 의지하면서 살고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집이 태풍에 날아가거나 지진에 무너지게 되면 그야말로 인생 끝장이 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그는 그런 일이 갑자기 닥친다 해도, 또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일이 닥쳐오겠지만 그런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땅의 집'과는 도무지 상대도 되지 않을 진짜 부동산,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잘 지어진 집이겠습니까?
  여기 "하늘에 있는 집"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맨션'(mansion) 혹은 '거주지'(dwelling place)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즉 임시 거처인 장막과는 달리 제대로 지어진 정식 집, 바람 좀 세게 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릴 텐트와는 상대도 안 되는 최고급 주택이며 영원한 거주지가 될 집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알아야"합니다.
  천당은 하나님만 사시고 천사들만 왕래하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살게 될 집인 것을 믿어야합니다.
  천당을 '내 집'으로, '내 방이 예약되어 있는 집,' 아니 아예 '내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는 집'이라고, 우리는 천당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2절부터 5절에 그것을 기록하기를 "2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의 집에서 사는 것을 두고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탄식하다'는 말은 '괴로워서 끙끙거리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나 인생의 괴로움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가리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다 인생고의 중압감에 짓눌려 살기 마련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그런 꼭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반응을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덧입기'라는 말은 직역하면 '옷을 입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세상의 집을 잃게 될 때 천당의 집을 마치 새 옷을 갈아입듯이 덧입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에게 있어서 천당은 혹시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는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2차로 준비해 둔 대비책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장막은 그저 빌려 쓰는 셋집, 여행자가 잠시 쉬었다가 지나가는 여관 같은 임시 거처에 불과한 것이며, 그 하늘에 있는 집이야말로 정말 좋은 집, 자기의 진짜 본가라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 새 집에 입주하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음" 즉 이렇게 신자가 천국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만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참 기가 막히게 멋진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 장막 집이 벗겨지게 될 때, 즉 자기 집을 위시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을 덮어주고 보호해주던 모든 것들을 벗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아무 입을 것도, 아무 거할 곳도 없는 벌거숭이로 남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당 소망이 없이 죽는 사람은, 죽는 바로 그 순간부터 완전히 벌거벗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무리 세상에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자랑하던 것이라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못하고 자기 머리를 덮어 줄 아무 지붕도 없는 '벗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좋은 집 가지고 좋은 옷 걸치고 좋은 차 굴리면서 살고 있다고 해서 꽤 많이 입고 있는 것처럼, 또 그것들을 영원히 입고 살 것처럼 착각하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처럼 세상 집 한 채만 무너져도 완전히 벌거벗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천당의 영생을 믿지 않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입니다.
  천당 소망도 없이 기독교인 노릇한다는 것은 실상은 몸에 아무 걸칠 것도 없는, 수치스러운 교인이요 지극히 비참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입은 자' 즉 천당의 영생 소망으로 이미 든든히 차려입은 신자는 뭐 육신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이 때로는 좀 후패하고 좀 벗겨지고 좀 무너지게 되더라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신자에게는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삼킨 바 되다'는 말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슨 어려운 고난이나 핍박 정도가 아니라 '죽을 맛 나는 일'을 당해도 그것들이 오히려 '생명의 소망'에게 삼켜버리는 대역전승이 바로 천당 영생을 믿는 신자에게는 항상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천당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보증되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크레디트가 좋은 사람, 정말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증되어 있어야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해주시고 예수님께서 성취해주신 것을 이제 성령께서 보증해주시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호텔에는 분명히 예약을 해놓고 찾아왔는데도 차질이 생겨서 빈방이 없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천당 갈 때에는 "당신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지옥으로 내려가십시오."라는 말을 듣게 될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자들 각자를 위하여 예약된 천당의 방들은 바로 성령께서 친히 보증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을 꾸려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됩니다.
  집이 있어야 가정을 꾸밀 수 있고, 집이 있어야 밖에 나가서 일도 할 수 있고, 일단 자기 집부터 있어야 휴가 때에 다른 곳으로 여행 가는 것도 즐거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집을 요즘처럼 태풍이나 수해로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면, 그야말로 자기 인생의 기반 전체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누구나 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무너지지 아니할 집'을 이미 소유한 사람은 전혀 다릅니다.
  그 집은 그 어떤 천재지변도, 그 어떤 철거령도, 그 어떤 차압처분도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우리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위해 예약되어 있는 하늘의 영원한 집, 이 확실한 본가를 자신의 든든한 기반으로 확보함으로써, 아직 남아 있는 이 땅의 장막의 생활에서 오는 모든 환난 중에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넉넉히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천당에 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현세의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끝까지 충성하게 만들어줍니다.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 "6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라고 번역된 말은 '우리는 확신합니다.'는 뜻과 '우리는 용기를 가집니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천당 소망을 확실히 믿고 있는 까닭에 매사에 자신만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독신자는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살이는 예수님과 잠시 동안만 이별하고 사는 순간인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조금만 계산을 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살 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사는 시간은 길어야 '칠팔 십년'이지만 같이 동거하게 될 시간은 '영원'이니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지금까지는 한 번도 예수님을 친히 만나 뵌 적이 없지만, 신자는 조금도 걱정하지 아니하고 "원하는 바" 즉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신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행하는 것이지 보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진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는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천당에서 예수님과 동거하게 될 날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행하게" 됩니다.
  금세의 인생이 내 생명의 전부가 아니라 잠시 주님과 헤어져 있는 순간일 뿐이며, 죽음은 내 생명의 끝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서곡이며 영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철석 같이 믿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주님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사는 신자가 이 세상의 남은 생명을 통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두고 이어지는 9절과 10절에서 "9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라는 말대로, 신자가 아무리 당장 천당 가고 싶어도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더 거하게 하시든지 곧 떠나게 하시든지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언제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는 자세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더 자세히 말해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될" 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사람이 그 행한 공로를 따라 구원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천당영생의 신앙을 지키고 산 신자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무슨 결격사유가 발견되어서 천당입성이 취소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확실한 천당 신앙을 가진 신자라면 장차 예수님 만나 뵙게 될 자리에서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오늘 하루의 삶을 똑바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을 자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결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현재의 생활을 더욱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동기부여가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당을 진짜로 믿는 신자는 절대로 제멋대로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천당을 그저 장소로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만나게 될 예수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구 심방을 할 때, 해당 교구 성도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대접하게 되는 성도들마다 얼마나 정성껏 준비를 하시는지 정말 송구스러울 지경입니다.
  집안 청소 같은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고 음식 준비하느라고 전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몇 주일 전부터 집안 벽지 도배까지 새로 해놓고 기다리시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귀한 손님이나 반가운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은 절대로 태평스럽게 앉아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다른 일들이 바빠도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쪼개어내고 돈을 마련해서 정성껏 준비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만나 뵙게 될 기쁨에 설레면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대충 신앙생활하자.'하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있겠습니까?
  천당에 가서 그 그립던 주님과 드디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 뵙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신자가 "무엇이 바쁘고 무엇이 힘들어서 교회에 충성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그분 앞에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차피 천당 갈 사람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천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천당 믿는 사람들을 놀리고 비난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허튼 가설일 뿐이지, 진심으로 천당을 믿고 기다리는 신자의 머릿속에는 그런 따위의 사고 작용이 결코 일어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당 믿는 신자라고 해서 현실 감각을 잊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천당을 진짜로 믿는 신자야말로 정말 현실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천당 입장 순서에는 먼저 그 천당의 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선행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이라도 천당 가게 될 것을 믿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오늘 하루까지도 어찌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신행일치의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천당에 들어가게 될 성도라면 이 점에 있어서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정도의 수준으로는 전혀 상대도 될 수 없는, 진짜 고차원적이며 현실적인 삶이 바로 항상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하고 사는 기독신자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천당에 무슨 호의호식하는 즐거움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몸으로 행한 것" 중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보여드릴 즐거움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성전 헌당을 위하여 '생애 최고의 것'을 바치고 이웃전도와 세계선교를 위해 '생애 전부의 것'을 바친 그 삶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고 보여드릴 때, 그 기쁨과 감격이란 것이 세상에서 목사를 모시면서 여러분들께서 준비한 음식과 깨끗이 청소한 집을 보여드릴 때의 것과 어디 비교나 될 수 있겠습니까?
  아직은 잠시 동안 더 남아 있는 우리의 인생은 이처럼 천당에서 우리 주님을 반갑게, 그리고 떳떳하게 만나 뵙기 위하여 아직은 준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인 줄로 깨닫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하더라도 끝까지 신실하게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하며 예비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집에는 아무나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낯선 사람은 물론이고 설혹 친척이나 친구라 하더라도 같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오직 자기 가족만 살 수 있는 곳이 집입니다.
  마찬가지로 천당은 결코 착한 사람이 죽으면 다 가게 되는 곳이 아니며, 아무 종교나 믿어도 결국에는 같이 도달하게 되는 장소도 절대로 아닙니다.
  천당은 진짜 예수쟁이들만 가는 곳입니다.
  이 '하늘의 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천당의 집'이 마련되어 있고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가 된 신자라면 이 세상의 남은 인생을 통하여서도 전혀 거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집사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집 한 채를 사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 사회에서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일단 결혼하고 분가하면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자립해서 사는 것이 상식이고, 또 그 집사님 역시 그런 면에 있어서는 철저히 미국식으로 사시는 분인데도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혹시 제가 의아해 할까봐 그러셨는지, 그 집사님 편에서 스스로 해명하시기를 "사람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 집 한 채는 일단 마련되어 있어야 가정도 안정되고 다른 일들을 제대로 성취해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 제가 도와주었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옳은 말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경제적으로 안정될 수는 없을 것이고 가정이 불안한 사람이 사회생활을 건전하고 활발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둘 다 갖추어져 있지 않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집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 그리고 이 둘만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인생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준다면, 나머지 인생에서 좀 흔들리고 좀 괴로운 것들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하늘에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집이 이미 마련되어 있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영원한 천국 가족에 이미 결속되어 있는 신자가 이 세상의 남은 인생에서 막힐 일이 무엇이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라보는 것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분명한 신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자살 따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천당 믿는 사람의 기분을 못 깨뜨리고 아무도 예수님 만날 준비하는 사람의 일을 말릴 수 없는 것입니다.
  힘든 일과 중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기합을 받아도 웃을 수 있는 제대 말년 군인처럼, 천당의 영생을 믿고 기다리는 기독신자는 오늘 무슨 일을 당해도 그저 기쁨과 소망에만 가득 넘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과연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하여 과연 무엇에 애착을 두고 어디에 목적을 두고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목적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행복이나 성공에만 있으면, 그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불안의 죽을 맛 때문에 그 얼굴은 하루라도 펴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애착이 '이 땅의 장막'에서 어떻게 하든지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데에만 머물러 있으면, 머지않아 완전히 '벌거벗게 될' 지극히 수치스러운 극빈의 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기독신자는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도 일단 천당 영생에 대한 애착이 있어야 세상에서도 사는 맛도 제대로 나게 되고, 주님 만날 목적이 분명해야 인생의 환난과 핍박 중에도 넉넉히 승리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고달파도, 이제 곧 '인생 제대'하고 진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살게 될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며, 어찌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틀림없이 영원한' 이 천당 영생을 믿고 '바라보는' 가운데 어떤 환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어떤 어려움 중에도 끝까지 충성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이미 예비되어 있는 저 '기쁘고 즐거운 집'에 함께 가서 '우리를 구하신 주님과 영원히 영광 중에 사는' 성도들 꼭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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