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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멜산에서 (왕상 18: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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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한국 문학을 살펴보면 유독 자연에 대한 작품이 눈에 많이 들어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시조나 가사 등을 통해 자연 친화적 성향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현대에도 잘 이어진 것입니다. 시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자연을 노래합니다. 특히 이양하의 ‘신록예찬’은 자연물에 대한 예찬을 아름답게 드러낸 수필로 평가를 받습니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작품도 많이 띕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문명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 파괴에 대한 비판과 자연 훼손의 부작용을 나타낸 작품이 대거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태시’라는 하나의 문학 장르를 성립시켰습니다. 생태시는 생태계 파괴의 현실을 고발하고 그 원인을 밝히는 시로서 최승호의 ‘공장지대’가 대표적인 예로 나타납니다.

  한국 문학에서 자연을 예찬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사람들은 청록파 불리우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을 꼽습니다. 이들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시가 많고 또한 자연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습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자연을 가장 토속적으로 표현한 시인은 박목월이라고 여겨집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산이 날 에워싸고...’ 라는 시가 있습니다. “산이 날 에워싸고/씨나 뿌리고 살아라 한다./밭이나 갈고 살아라 한다./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아들 낳고 딸을 낳고/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구름처럼 살아라 한다./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문학인은 자연을 통해 문학을 표현합니다. 예술인도 자연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와 인간 됨의 참된 길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결국 자연을 통해 참된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교과서요, 지침서인 자연을 보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계속해서 성경의 자연, 특히 산을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리아산, 시내산, 감람산에 이어 오늘은 갈멜산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갈멜산’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올라야 할까요?

  첫째, 싸움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구약 역사에서 왕정시대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다윗과 같은 성군이 있고 솔로몬처럼 업적을 남긴 왕이 있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맞은 시기입니다. 결국 500년의 왕정은 이방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의 역사로 막을 내립니다. 성경에서 왕정시대를 보여주는 성경이 ‘열왕기서’입니다. 왕들의 기록이라고 불리는 ‘열왕기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는 왕보다 선지자의 활동이 많았습니다. 엘리야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왕들의 기록에서 선지자의 활동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타락했다는 증거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코앞에 임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아합왕은 당시 악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이스라엘을 우상과 부패로 빠지게 했던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합과 이세벨을 보면서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라는 탁월한 선지자를 세워 그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뜻을 전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들과 정면 충돌한 사건이 바로 여기 갈멜산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갈멜산 꼭대기에 제물을 올려놓고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참된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날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늘을 향하여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면서 간구할 때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물을 태웠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승리합니다. 850대 1이라는 수적으로 열세의 상황에서 승리합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갈멜산의 우선적인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곧 갈멜산은 싸움의 현장, 전쟁터와 같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쟁은 칼과 활과 방패로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영적전쟁, 영적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갈멜산은 바로 영적전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곧 바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힘들고 어렵지만, 기왕 하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전쟁의 패배는 곧 죽음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영적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이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싸우는 영적 전투에는 적어도 4가지 싸움의 대상이 있음을 성경은 전합니다. 우선, '나 자신'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그는 예수 믿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몸부림치며 저항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있고, 아픔이 있고, 몸부림도 있고, 갈등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싸움의 대상은 ‘죄’입니다. 히브리서 1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싸운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를 다 쏟기까지 죄와 싸웠습니다. 그래서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죄와의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곧 바로 천국으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 삶의 현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주님처럼 승리해야 합니다.
넷째 대상은 ‘사단’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악의 영들 곧, 사단과의 씨름과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사단도 존재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그래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 싸우고, 죄와 세상과 사단과 싸우는 것입니다. 싸움은 힘들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갈멜산은 우리로 하여금 엘리야의 탁월한 기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에서도 엘리야의 기도가 돋보이고,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더욱 그의 기도가 돋보입니다. 본문은 엘리야가 민족의 고민을 놓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면입니다. 그의 기도로 3년 6개월 동안 하늘 문이 닫혔고, 또한 그의 기도로 다시 하늘 문이 열려 비가 내리게 했습니다. 엘리야의 생애에 있어서 기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기도가 빠지면 핵심과 알멩이가 빠진 것입니다. 기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갈멜산을 생각하면 엘리야의 기도가 떠올라야 합니다.

  그의 기도는 한마디로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절박한 기도, 열정의 기도, 믿음의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성경은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산이 진동하도록, 모든 사람이 듣도록, 하늘이 움직이도록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잔잔한 기도가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간절한 기도의 모습을 성경은 무릎을 꿇은 기도였고, 그 무릎사이로 머리를 집어넣는 기도였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42절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는 크게 지를 수 있어도 얼굴을 무릎사이로 넣는 것은 아무나 되지 않습니다. 또한 끈질긴 기도였음을 알려줍니다. 한번 기도하고 하늘의 아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일곱 번이나 반복했고,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면서 더욱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기도는 간절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힘이 있던 이유는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런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기도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한국의 기도를 배우기 위해 몰려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국사람만이 기도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서양사람들이 우리의 기도를 흉내내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통성기도입니다. 그들은 혼자 기도해도, 함께 하는 기도를 잘 못합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다른 사람이 함께 기도하면 방해가 되어서 전혀 기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에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통성기도를 잘 못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더 못합니다. 또 한가지는 무릎을 꿇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보다 다리가 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그들은 소파문화입니다. 그래서 바닥에 앉거나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좋은 전통과 문화와 여건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런 우리의 기도는 한국에게서 비롯된 독특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시대에 여기 엘리야에게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절실하고 진지하고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무릎꿇고 엎드린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이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간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꼭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간절한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이런 기도가 이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능력입니다. 성경에서의 갈멜산은 싸움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기도가 돋보이는 곳으로 나타나지만 무엇보다도 능력이 생각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보여졌고, 권능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46절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이것이 갈멜산이요, 이것이 평생 기억할 갈멜산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엘리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알던 성경저자는 야고보서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와 다른 게 있었다면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차이가 아니라, 결국 능력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능력을 받고 안 받고 차이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보통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어쩌면 우리보다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와 세계 역사를 뒤바꿔놓은 결정적인 일을 감당했습니다. 다른 게 차이가 아니라 바로 능력의 차이입니다.

  능력을 받으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생활은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고,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께 돌릴 영광이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일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요, 하나님나라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사역이요, 방향이어야 합니다. 큰산이 평지가 되는 역사는 오직 능력을 받는 것에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셔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됩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능력과 은혜없이 예배를 드리면 가장 지루한 것입니다. 능력이 없이 기도하면 형식에 치우치게 됩니다. 능력이 없이 말씀을 보면 하품만 나오고 졸릴 뿐입니다. 능력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미워하는 것보다 더 무섭게 됩니다. 능력이 없이 일을 하면 사람 냄새와 땀 냄새만 납니다. 그러나 능력으로 예배드리면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주님만 보입니다. 능력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능력으로 사랑하면 세상에 미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능력으로 봉사하고 사역하고 일하면 얼마나 즐거운 지 모릅니다. 결국 사람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능력이 임하도록, 은혜가 임하도록, 권능이 지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달라집니다.

  지금 이 땅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한국기상관측사상 올해가 가장 많은 비를 뿌린 해로 기록되었습니다. 처음에 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시원하게 하더니만 점점 많은 비를 뿌려 대지가 촉촉하다 못해 축축하고 이젠 질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심령은 어떻습니까? 혹 여름 가뭄에 논이 흉측하게 갈라지듯이, 그렇게 메마르고 갈라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내 심령에 축복의 장마비가 쏟아져야 합니다. 은혜의 소낙비가 퍼부어야 합니다. 그래서 건조하고 메마른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야 합니다.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나의 신앙, 나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인 것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능력과 은혜의 문제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능력을 받고, 은혜를 받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내가 잘되고, 공동체가 잘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갈멜산은 싸움의 장소로, 기도가 돋보이는 곳으로, 그리고 능력이 임한 현장으로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도 엘리야처럼 먼저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 능력으로 한 주간도,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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