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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2)-열정을 넘어선 의지와 희생의 길(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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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렇게 장마 중에도 맑게 갠 날씨를 주셔서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귀하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오늘도 교회의 계단이 매우 가파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계단을 걸어 올라와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또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렇게 옆에 여러 성도들이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분들 얼굴을 볼 때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최소한 반갑지는 않아도 혐오스럽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렇게 앉으려고 하는데 우리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른 곳으로 휙 하니 달아나 버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들은 성도들이 가져야할 믿음의 덕목들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또 많은 실수 속에서 스스로 자신감과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이런 때에 특별히 믿음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당연한 발걸음으로 용기를 내어 달려 가야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어려움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질곡의 그릇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가지고 넘어지지 않을 용기가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날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번 주에는 두 번째 시간으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열정을 넘어선 의지와 희생의 길이라는 제목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7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 오늘은 특별히 열정의 모습 뿐 아니라 의지와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완성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즘처럼 인간 사이에 신뢰가 무너지고 약속이 의미가 없으며 상황 따라 바뀌는 삶의 흐름 속에서 그래도 마지막까지 고집하고 싶고 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그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사는데 이웃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장 멀리 있는 저 먼 곳에 이웃까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이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을 보게 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첫째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하는 방법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 8절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면 우리가 사랑을 알고 사랑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당연한 것이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쉽지 않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영적인 전투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주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내 삶의 배경에 판단과 비판과 가혹한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용납과 사랑과 베풂을 나누어주고 베풂을 같이 하는 것이 우리 삶에 배열되어야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믿는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사랑이 이루어진 과정과 본질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의 시작은 무엇으로 시작됩니까?
오늘 첫 번째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열정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물론 열정입니다. 열정이라는 것은 정서적인 내용입니다. 내 마음에 감정적인 내용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너희 중에 모두가 내 곁을 떠나리라 말씀하셨을 때 담대히 선언합니다. “예수님 다른 모든 사람은 다 어찌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자기가 버리지 않는다면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어찌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이 지나서 베드로는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욕했습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욕하는 과정 그러면 도대체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백했던 그 사랑의 진실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거짓말을 한 것일까요? 베드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자기의 목숨을 버려서라고 예수님을 지키고 사랑하겠다고 말씀했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는 예수님 몰라” 하고 예수님을 욕하고 예수님께 오히려 침을 뱉는 이와 같은 형국이었는데 도대체 그런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은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한 것도 진실입니다. 다만 순간의 진실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한 것은 베드로의 열정의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올 때 칼을 들어서 휘두름으로 말미암아 잘못해서 말고라는 종의 귀를 떨어뜨린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베드로의 마음에 뜨거운 열정 속에 주님이 고난을 당한다고 하니 주님의 고난을 그가 막아보겠다는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그 사실은 진실이었고 또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뜨거운 열정의 사랑을 대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에게 순간적으로 떠나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왔으니 예수님이 사람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이와 같이 고초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도 그 자리에 멀리 따라가서 보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이 발각되자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하는 이와 같은 장면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의지적인 사랑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정서적으로는 열정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열정의 잠재 끝에 나오는 의지적인 사랑은 그것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정서는 3년을 못 간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져도 그것이 3년 이상 시종여일하게 유지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늘 굴곡이 있고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물학적 욕구도 3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지요. 열정조차 없다면 사랑은 시작조차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정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순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순수한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나는 솔직해 나는 깨끗하고 순수해 그것이 나에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순수한 것이 어디에 기준해서 솔직하고 순수한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솔직해. 나는 하고 싶은 말하고 나는 좋은 것 좋다 싫은 것은 싫다 아주 깨끗하게 말해.” 이렇게 말하는 어리석은 유치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솔직한 것이 그렇게 자랑입니까? 무엇에 솔직하다는 것입니까.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에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부패된 생각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솔직해.” 내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그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장 2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해서 우리 마음에 있는 내재적인 자아는 비틀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마음에 솔직하다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비틀어진 것에 솔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솔직한 심정에 따라서 하면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 덕을 세우기 전에 우리는 더 많은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하다는 것은 내가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유치하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우리는 솔직한 수준을 넘어서는 성숙된 믿음의 백성으로 거룩과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꾸밈없는 우리 마음에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연결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 쉽게 변합니다. 열정이 식어지는 것은 시간이 흐름으로 인한 관심의 식어짐과 그 관심에 식어짐을 능가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 상대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특별히 실망은 상대가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배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수없이 약속하고 그 약속을 뒤집고 배반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고 합니다. 도대체 우리들은 그러면 어떻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의 삶을 살아갈까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이고 이해가 있을 때 진실을 인정할 수 있고 진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믿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지요?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에게는 두 개의 진실이 있습니다. 말한 순간의 진실도 있다고 했지요. 베드로의 진실 베드로는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만 가야바의 뜰에서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약해져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거기서 베드로를 보고 분격해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위해서 죽겠다고 너는 절대 안 그렇겠다고 했는데 너는 안 그러겠다고 했는데 너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이냐.” 그 자리에서 일격을 했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에게 잡혀가서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가 초대교회에서 한번 외칠 때 3000명이 변하고 5000명이 변화되고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불꽃같이 비춰지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와 같은 놀라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간의 진실을 보셨고 지금의 연약한 마음에 진실을 보셨고 앞으로 이룰 베드로의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베드로의 진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베드로에 대해서 분하지 않으십니까? ‘아니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랑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수제자로 키우셨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목숨 버리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죽게 되었으니까 자기가 그렇게 부인해?’ 우리 같았으면 그렇게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화해의 감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진실을 보았고 지금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고 앞으로 베드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마음처럼 그저 한순간에 버렸다면 베드로라는 사도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러저러한 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은 분명히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나중에 다시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 사람의 이야기는 당신은 지난번에 이렇게 얘기하고 지금 다른 얘기 하느냐?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나는 그런 얘기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두 사람이 그것가지고 다투고 실망해서 헤어져요? 아니면 그것 때문에 서로 모든 일들이 깨어지고 그것 때문에 모든 마음에 상심을 받아요. 어떻게 된 것이지요? 이 사람은 죽어도 안했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이해할 때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고 하지만 자기가 얘기를 하고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왜 잊어버렸냐하면 자기는 그것을 진실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별거 아닌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기억 속에 살아남아있지 않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말을 해도 말했다는 기억이나 의식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본인이 스스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무리 들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절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상대편에 대해서 당신은 거짓말쟁이야라고 이야기하면 그 관계는 깨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사람은 분명히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지요? 왜 얘기를 안했는데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기 때문에 듣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이 두 사람이 다툴 때 또 어떻게 될까요? 상대에 대해서 서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그 관계는 역시 깨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지요? 상대의 진실을 인정해 줘야합니다. ‘내가 이야기를 안 해도 상대가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저 사람은 내가 하지 않은 말을 들었다고 억지로 우기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정말 자기가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그 진실을 인정해 줘야합니다. 우리는 삶의 두 가지 진실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인간관계가 끝까지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 두 가지 진실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인간관계를 끝까지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실수들을 하며 얼마나 많은 실패들을 하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까? 우리가 어려움과 실수와 실패를 겪을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여 축적되어 놓으면 결국은 시간이 되면 그 무게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 진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이와 같은 면모 때문이므로 우리는 인정해야합니다. 또 내가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안 듣고도 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저 사람이 말을 실제적으로 안했는데 내가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뿐만 아니라 나는 들었는데 저 사람은 안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는 저 사람은 안했다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우리의 상황 가운데 중요한 것은 상대의 진실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이 정말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본인이 착각을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구나 절대 거짓말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야. 상대의 진실을 인정하면 우리는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감정으로 기분 나쁘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일들을 좌우하게 되면 그것은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해석해서 어떤 말을 듣고 자신의 상태에서 해석해서 어떤 말을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판단과 주장의 근거로 삼는 기주이 모호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 가운데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마음에 작정해야 합니다. 감정으로 살면 일시적으로는 가능하나 시간이 지나면 감정을 넘어서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경우를 봅니다. 여러분 전에는 사과가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과가 먹기 싫고 배가 좋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의 기호와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이것은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안 되고 그냥 있는 현상일 뿐입니다. ‘나는 전에 사과가 제일 좋은 과일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사과가 싫고 배가 제일 좋은 과일이야’라는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정해 준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용납하고 수용하고 삶 가운데 서로의 진실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뜨거운 열정에서부터 시작되지요. 왜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만났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가장 세상에서 먼 사람들이 되어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일까요? 뜨겁게 만나서 같이 무엇인가 도모하고 어떤 일을 같이하려고 했던 사람이 왜 그 일 때문에 서로가 등을 지고 헤어지고 세상에서 가장 원수처럼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감정의 문제로만 끝내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두 번째 내용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비록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의지로 진행되고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열정에 의해서 사랑은 끝나지 않고 열정의 단계를 지나 모든 것은 의지의 단계로 접어듦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입니다. 열정만으로 오랜 기간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제가 늘 말씀드렸지요? 옆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사람 어디 있는 사람이고 막론하고 기분 나쁠 때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봐야한다고요? 자 우리 오늘도 한번 연습해 봅시다. ‘환자군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 해봅시다. ‘환자시군요.’ 그렇게 이야기 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말로는 하지 말고 속으로 말입니다. 환자구나 이렇게 이야기 하면 큰일 납니다. 여러분 환자는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몸도 아프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괴로워지잖아요. 음식도 맛이 없고, 보는 것도 다 시들하고 모든 것이 다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더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데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면 사람들은 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짜증을 내고 여러 가지로 더 불편하잖아요.
우리가 상대방을 환자라고 봐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에 측은함이 있어서 입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닙니다. 기분 나쁜 것은 기분 나쁜 것이고, 그는 환자이니 이해해주어야겠다는 의지가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서슴없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지의 작용에서는 밀려나서 그는 순간적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는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고 나아가 초대교회를 위하여 주의 복음을 전했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었고 마지막으로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때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로막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깨달은 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의 심정으로 다가가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오해의 심정으로 다가가면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판단하면 관계개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의 심정, 즉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발전과 진보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어떤 일에 대한 수고의 결실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고하고 애써 결실을 맺어 눈앞에 보였다고 생각해봅시다. 논리 중에 가장 확실한 논리가 무엇입니까? 각종 구조를 거쳐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고 결실을 내놓았으면 가장 확실한 논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기분 나빠서,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상해서, 거기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이 개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만 통용되는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비논리적인 접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비논리 자체를 품을 수 있어야 진정한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지는 모든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해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3장 중에서도 이 구절이 가장 와 닿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본질입니다. 결국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것은 의지적인 작용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정서적인 작용으로 가능합니다. “좋다” 마음속에 얼마든지 그러한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정서적인 작용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삶에는 여러 다른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열정에 비해 보다 높은 것이 의지의 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의지의 작용입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라는 것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삶에는 참으며 시간을 보내야 해결되는 일이 많습니다. 손을 베었다고 합시다.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새 살이 나는 법입니다. 딱지 앉으면 또 떼어보고, 딱지 앉으면 또 떼어보고… 아무리 소독을 잘해도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 때까지 1주가 걸리든 2주가 걸리든 일단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전기밥솥에 쌀 씻어두고 뚜껑 닫고 스위치 꽂고 버튼을 누르고 1분마다 안수하고 열어봐도 밥은 안됩니다. “믿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그저 무능하게 시간을 기다려야 됩니다. 아무리 속이 답답해도 10분이고 20분이고 밥이 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다려야 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무능하게 시간을 기다리고 참고 인내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가슴 아파도 할 수 없습니다. 아픈 상태로 꾹 참고 밤을 지새워야 해결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픈 상태로 시간을 지새우지 못하면 우린 결국 모든 것이 다 파행으로 끝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애굽의 왕자로서 40년간 교육을 받았습니다. 혈기있는 가장 힘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광야의 무능한 양치기로 삼았습니다. 40년 전의 능력이 지금 능력이겠습니까?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단순한 양치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애굽의 왕자라는 것은 싹 씻어지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와 같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광야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자기의 무능과 좌절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애굽의 혈기방자한 사람 같았으면 그는 또 그의 혈기로 말미암아 수많은 일들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결국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무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물 위를 걷다 빠져가는 베드로처럼 빠져가는 삶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물 위를 저벅저벅 걸어서 배에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심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님, 만일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고 하소서” 예수님께서는 “오라”하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바다에 풍덩 뛰어듭니다. 풍랑이 마구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풍랑을 보며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랬더니 푹 빠져들어갔던 것입니다. “예수님, 살려주세요”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는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단선-복선-구조요청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단선으로 갈 때는 가는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복선적 요소가 생기니 빠지는 것입니다. 빠지는 가운데 주님께 구조요청을 하니 주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믿으면 물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가고 행복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가 깨어지면 그것은 물에서 빠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어주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작용으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 물에 빠져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비극은 믿음의 신뢰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아니라 내가 가장 비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가운데는 이와같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라며, 소망과 기대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바랄 수 있을 때, 바라지 않으면 안될 때 우리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떤 그럴듯한 일이 있어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못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 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늘 실망시키시고 안되고 못하고 또 여러가지 의지박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녀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래도 기도하다 보면 끝이 있을 거야.’ 기도가 쌓이고 쌓이면 하나님께서 언젠간 들어주시겠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의료선교단이 다녀왔습니다. 선교 다녀올 때마다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총기든 무장 강도단들이 와서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데 총을 겨누고 다 빼앗아가니 사람들이 굉장히 놀랐던 것 같습니다. 다녀와서 한 달간은 꿈에도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놀랐을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생전 그런 상황을 겪지 않아서 굉장히 위축되었는데 더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충만해서 결국 마지막까지 마쳤습니다. 성령충만하다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겠지요. 참으로 감사한 것은 작년에 그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 중에서 100% 모든 사람들이 다 갔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더 가게 되었습니다. 어려웠기 때문에 더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올해도 영적인 전투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틀간 하루에 한 명씩 다리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미끄러져 금이 가서 깁스를 하고 어떤 날은 무거운 것을 들다가 그것이 떨어져서 금이 가서 깁스를 하고 매일 한 명씩 깁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전투구나.’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여기에 보내셨을까? 다치고 안 다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치면 시간 지나면 나을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 있으면서 준비해간 사역들을 다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눈물나게 안타까운 것은, 많이 준비한 것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내가 많이 준비했는데 다리가 아파서 진료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 정말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다가 깁스라도 하고 사람들을 진료할 때 ‘정말 감사하다 다리를 절면서라도 이렇게 진료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것이 감사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리가 불편한 가운데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하며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은혜를 주시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 뒤에 또한 위로를 주신다고 하셨으니 분명히 어려움만큼 더 큰 위로를 주실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큰 위로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어려움을 능히 능가하는 것입니다.

지난 2월에 청년들이 선교가는 것을 보니 두명이 목발을 짚고 왔습니다. 한 명은 연습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갔습니다. 사실 가면 짐이 될 수도 있는데 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그 옆에라도 있겠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싶어서 갔을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다른 이유로 다쳐서 갔습니다. 식사 때가 되면 팀별로 담임목사와 함께 식사를 합니다. 다친 아이가 제 옆에서 식사를 해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너는 이렇게 다쳤는데 왜 왔니?” 물어봤더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앞으로 올 기회가 있을 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으니 저는 지금이 좀 나은 상태라고 생각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더 어려울 때는 못 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 수 있어서 지금 왔습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너는 하산하여라. 내가 더 가르칠 것이 없다.” 제가 더 가르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더 가르칠 것이 없다. 네가 나의 선생이지 내가 너의 선생이 아니구나. 내가 더 배워야겠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나에게 더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 때는 정말 내가 이곳에 올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내가 이렇게라도 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생각할 때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소망 속에서 끝까지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딘다고 했습니다. 견뎌내야 합니다. 견디지 못하면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결국 열정으로 시작되지만 의지로 유지되고 마지막으로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되어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이란 것은 처음에는 열정으로 시작됩니다. 좋아하는 감정, 마음의 뜨거운 열정, 이런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사람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랑이 식어질 수 있습니다. 식어진 사랑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습니까? 의지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에서 유지될 때 결국 마지막으로 헌신과 희생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사랑의 꽃입니다. 왜 사랑에 헌신과 희생이 필요할까요? 이해하기로 작정하고 믿기로 작정하고 바라보기로 작정하고 견디기로 작정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논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에 대해서 그냥 자연스러운 의지의 작용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는 결심한다, 결단한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결심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잘 안될 때 “내가 여기서 결심하고 나의 의지의 작용을 넘어서는 그 수준을 결단하겠다.” 이것이 바로 희생과 헌신입니다. 희생과 헌신은 인간의 보통 정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국 값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도 인간을 사랑함도 희생과 헌신의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환자구나, 정말 몸이 아프구나. 마음이 아프구나. 삶이 아프구나.’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인간들을 이해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예수님은 그 순간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백성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백성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희생했다 헌신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인줄 압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했는데,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헌신하지 않고 하나도 희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은 내가 희생하고 헌신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날마다 눈물흘리며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인으로 살아 죄송합니다.” 의인은 날마다 회개합니다. 그런데 죄인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의롭게 산 것만 생각하니 회개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희생과 헌신한 사람은 희생과 헌신했다고 생각도 안합니다. 그런데 희생과 헌신을 전혀 안한 사람은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데…”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늘 해준 것이 없어서 아쉬울 때 우리는 사랑하는 때이고 늘 해준 것만 생각나고 받은 것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사랑이 깨진 때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랑이 깨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이 유지되고 완성되어져 가고 있습니까? 우리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내가 당신에게 해준 게 너무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괜찮은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주었는데 그것도 기억 못합니까?” 이렇게 하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으면 행복합니다. 이 말은 희생과 헌신을 하면 행복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사랑과 희생이 기쁨이 될 때 그것은 사랑의 아름다운 때입니다. 사랑은 열정에서 시작해서 의지로 지속되고 결국은 희생과 헌신으로 완성됩니다. 대부분의 어려운 것은 열정의 끝을 사랑의 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정서작용만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정서작용이 아니라 우리들에게서 의지적인 작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식과 정서와 의지, 모든 것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 의지가 재미없는 의지가 될 때 사랑은 의무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기쁘고 감사한 의지가 될 때 이것은 진정한 아름다운 완성의 사랑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선교단이 가서 의료선교를 하고 왔습니다. 의료선교단, 축구선교단 사역을 하고 왔습니다. 선교지를 가면 어디냐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의료진 10명이 나누어서 진료를 보고 협력해서 하시는 분들이 여러 팀을 나누어 사역을 합니다. 몇 년 동안 아팠던 것 잠깐 보고 약 몇 봉지 받아 그 사람이 낫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아팠던 그 사람이 며칠 약 몇 봉지 준다고 낫겠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며칠 약 먹는다고 그 사람이 낫는 것도 아닌데 가서 우리가 도와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괜히 변죽만 울리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일 먹을 쌀도 없고 오늘 먹을 쌀밖에 없습니다. 오늘 먹으면 끝입니다. 내일은 내가 돈도 없고 쌀 사올 여력도 안됩니다. 그러면 오늘 먹고 죽으나 내일 먹고 죽으나 어차피 죽을 것이니 지금 있는 밥도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일단 오늘 밥이 있으면 오늘 먹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선을 베풀 때, 사랑을 베풀 때, 내 눈 앞에서 할 수 있을 때 그 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합시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 사랑이 끝이 될지언정 아니면 그 사랑이 완성이 될지언정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내게 기회가 있을 때,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한 번을 통해서 더 원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한 마음의 계획으로 자리잡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이 되고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열 번, 열 번이 영원히 반복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분들도 있고 자녀들에게까지 내려가 그들이 평생 그 자녀들에게 대해도 똑같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기를 원하여 자녀들까지도 교육시키는 것을 봅니다.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후손 삼대, 사대손까지 우리나라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이만큼 모든 것이 되었으니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 모든 사대 후손이 본국으로 철수를 했습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그저 한 번 나누어주는 것을 한 번 적선하는 것이다라는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라는 것은 행할 수 있을 때 행하는 것이 선입니다. 기회있을 때, 기회를 만들어 행하는 것이 선입니다. 한 번의 기회 때문에 우리 마음의 눈이 열리고 한 번의 기회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이 보이고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길들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교지에 있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모든 단원들 또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음의 기회를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또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기도해주셨기 때문에 그 가운데 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또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도 멀리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열정에서 시작되지만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과 헌신으로 결국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잃으시면 안됩니다. 사랑을 이루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이루어 소유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의 꽃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열정에서 시작되고 의지에 의해서 유지되고 희생과 헌신에 의해서 완성됩니다.”
뒤로 갈수록 더욱 더 쉽지 않으나 더욱 더 아름다운 완성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은혜가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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