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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강해(2) : "우리"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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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는 하나님과의 일대일 만남입니다. 우리 영혼의 지성소에서 나누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일대일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나’라는 경계를 허물고 이웃을 발견하게 합니다. 나의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되고, 나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 나라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우리가 서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시편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시편은 ‘나’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나’는 개인성 속에 함몰된 ‘나’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가르키고,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로서의 ‘나’입니다. 시편은 한 개인의 노래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노래입니다. 시편이 불려졌던 현장이 바로 성전에서의 예배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고백과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은 가끔 ‘나’로부터 시작한 노래가 예고도 없이 ‘우리’로 주어가 바뀌기고 하고, ‘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내 문제’가 ‘이스라엘의 문제’로 바뀝니다. 시편에는 원수를 조롱하거나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는 단지 개인의 원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적 원수인 이방 나라와 그 세력들을 의미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에서 ‘우리’로

주기도문은 기도의 이런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라는 단어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 여섯 번의 ‘우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여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가 주기도문대로 기도하고 주기도문대로 실천했다면 자기 속에는 ‘나’라는 존재 대신 ‘우리’라는 존재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주기도문의 정신에서 벗어난 기도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면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의 가족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면 내 식사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동체 내에 한 사람은 굶주리고 한 사람은 배불러서 버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지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할 때는 그 죄에는 내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까지 포함됩니다. 타인의 죄 때문에 내가 아파하고, 내 죄가 사함 받는 것 때문에 옆에 있는 형제가 기뻐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 기도하면서 우리는 앞에 닥친 시련 앞에서 우리가 한 배를 타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러니 주기도문을 제대로 하면 ‘나’는 사라지고 ‘우리’라는 단어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를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정리하면 두 가지로 압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구약이 39권이나 되고 예수님 당시에 율법 조항이 613가지나 되었지만 이것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는 십자가 모양이 잘 상징하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 십자 형상을 이룹니다. 수직선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수평선은 나와 이웃과의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관계입니다. 이 두 관계가 결합될 때 온전한 십자가를 이룹니다. 

실제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그랬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금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금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건과 관련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 금식을 받지 않으신다 말씀합니다.

폴 투르니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찾는 것이 사랑입니다. 교회가 공동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온갖 물질로 풍요로운 나라만은 아닙니다. 천국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물질보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가 가장 행복한 곳이 천국입니다. 저는 사랑이 상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급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 누구는 면류관을 쓰고 누구는 개털 모자를 쓰고, 누구는 호화 맨션에 살고 누구는 판자집에 산다는 식으로 천국을 물질화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물질의 허망함을 잘 알지 않습니까? 천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자가 행복한 나라이며 사랑이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서로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천국에 가서도 천국의 기쁨을 제대로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너희 안’ 은 우리 마음속이 아닙니다. 'among you' 입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을 나누는 이 ‘우리’의 현장이 바로 천국입니다.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의 교리나 예수님 말씀은 좋은데 기독교인들이 싫어서 교회를 멀리 합니다. 그래서 혼자 기도하고 말씀 읽으며 나홀로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공언과는 달리 신앙을 조만간에 버리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원찮아 보이고,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인다 할지라도 석탄은 함께 있을 때 불을 내고 뜨거워집니다. 최소한 쉬 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인간은 서로 얼굴을 맞대어 보고, 또 한 솥 밥을 먹을 때 정이 듭니다. 신앙은 세상의 가치관과 악한 영들과의 투쟁입니다. 서로 모여서 기도하며 찬양하며 격려할 때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 때는 옆 사람이 기도로 도와줍니다. 내가 풍족하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서로 격려할 때 신앙이 불이 붙습니다.

어떨 때는 주일에 편히 쉽고 싶고, 좋은 데 놀러가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억지로 예배에 참여하였지만 모든 순서가 지루하고 또 설교가 감동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루할 것 같은 이럼 만남이 우리의 신앙을 붙잡아 줍니다. 이것마저 놓는다면 우리 신앙은 금새 고갈되고 맙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이제 우리 주님이 우리라는 공동체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에서 주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더 테레사는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을 도울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성체 안의 예수님을 만지듯 부드럽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만지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십시오.” 수녀들은 작은 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은 봉사 자체가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손가락 다섯 개를 사용하여 이렇게 하나씩 구부리면서 사인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You did it to me”이 다섯 개의 단어는 마태복음 25장 40절의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 주변에 형제 자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우리가 ‘우리’라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놓친다면 그것은 주님을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데 다른 형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형제의 모습 속에 나타난 기적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이루는 법

우리가 이런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육신의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 판단기준으로 어떤 이상적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는 깨끗하고 정직하며, 최소한도의 사랑과 봉사가 있거나 지적으로나 문화양식으로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모임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맞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판단을 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성도간의 사귐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곧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사람과 교회를 비난하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을 비난하고, 급기야는 절망 상태에서 자신마저도 비난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하고 교회는 이미 이상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다른 성도들을 대할 때 무언가를 요구하는 자로 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사이사이에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직접 부딪치면 소리가 납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는 의미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판단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께서 의롭다 하신 이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상대방에 대한 원망에 대한 마음이 들 때 또한 우리는 또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사 그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을 실족케 할 수 있겠는가!

교회의 위대함과 영광은 그것이 도덕적 뛰어나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노예건 주인이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추한 사람이건 정결한 사람이건, 죄인이건 의인이건 모두가 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게 기적입니다. 마음이나 문화양식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같이 모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일입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예배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가 지나치게 동질화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수준이나, 재력이나 능력을 따라 끼리끼리 모이는 모임은 곧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가진 무엇과 자기 기대 수준을 따라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동체는 다른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다른 형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눈앞에 가난한 자가 서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 모임이 인간의 이상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인이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

그래서 저는 교회란 마치 가족과 같다 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다른 식구를 제명시킬 수 없습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갈라설 수는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능력이 없다고 가족에서 쫓아 낼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한한 것은 오히려 이렇게 약하고 능력 없는 사람들이 가족의 관심과 사랑의 주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고 길렀던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이 자녀들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식들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요? 아픈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그 자식을,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또 그 자식을 나는 더 사랑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를 때 우리 모두는 한 가족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칭도 ‘형제’ ‘자매’라 부릅니다. 주기도문을 실천했던 초대교회 공동체는 마치 한 가족처럼 매일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며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서로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가족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은 완벽한 공산사회입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합니다. 아버지는 일하고 자녀들은 마구 씁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은 많이 내어놓고, 가난한 사람은 그것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리’가 확장되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 ‘우리’라는 것은 단지 우리 교회 공동체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우리’는 한국 교회를 넘어 전 세계까지 확장됩니다. 믿는 자의 무리는 흑인이건 백인이건 황색인이건 가리지 않고 우리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피가 바뀌었습니다. 예수의 피가 이제 우리의 피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세계를 한 가족으로 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주기도문의 정신대로 살아 날마다 ‘나’라는 경계를 깨고 ‘우리’가 확장되어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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