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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고전 13:4a, 히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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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무리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라도 거기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모두 헛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최고로 중요한 것일까요? 바울은 우리의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매우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묘사해줍니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하나의 실체이지만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 측면들을 고루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게 됩니다.

바울은 진정한 사랑의 시금석을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에 대한 일가견을 갖고 있습니다. 또 시대마다 특별히 매력을 끄는 사랑의 모양들이 있습니다. 일례로 한 때 CF에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글귀가 등장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끈 적이 있었지요. 사랑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 적이 많습니다. 바울의 사랑예찬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총정리를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잘못된 생각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 깨달아야할 부분은 깨닫고 더 심화시켜야 할 부분은 더 심화시켜나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그 첫 목록으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좀 기운이 빠지는 우울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먼저 낭만적이 생각이 떠오릅니다.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시라노』라는 작품이 있지요. 젊은 장교 그리스티앙이 미녀 록산느를 사랑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말과 글에 전혀 재주가 없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음악가요 당대의 뛰어난 검객인 선배 기사 시라노에게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시라노도 먼 친척인 록산느를 마음으로부터 깊이 사랑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코가 기형적으로 너무 컸기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습니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부탁을 받아들입니다. 록산느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담아 아름다운 편지를 써줍니다. 록산느는 그 글이 크리스티앙의 것인 줄 알고 그에게 폭 빠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둘이 직접 만나는 시간이 왔습니다. 록산느는 사랑의 눈길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며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고백을 듣고 싶다고 말합니다.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입니다. 크리스티앙은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 입을 열어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록산느는 '아, 그건 내용이고 표현을 해주세요'라고 말하죠. 더욱 당황한 크리스티앙은 어쩔 줄 모르다가 거의 화가 난 듯이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내 뱉듯이 말합니다. 여전히 실망한 록산느는 '그건 좀 낫네요'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티앙과 록산느에게 사랑은 매력적인 사람을 향한 달콤하고 열렬한 감정입니다. 그런 사랑을 보통 에로스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은 에로스적 낭만입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바울은 사랑이란 다짜고짜로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오래 참아야 할 사람이란 것이죠. 꿈결같은 낭만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격입니다. 물론 에로스적 사랑과 낭만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에로스는 에로스대로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에로스를 뛰어넘는 비범성이 있어야함을 강조합니다. 그런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당시 잘 쓰여지지 않았던 아가페라는 단어를 차용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요즘 말로 말하면 비호감의 대상까지 사랑합니다.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란 점을 분명히 하는 대목입니다. 현실 속에 있는 사람 치고 내 맘에 항상 쏙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호감이 가는 사람일지라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느 구석엔가 실망스럽고 호감이 안가는 약점, 심지어는 혐오감이 드는 부분마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를 보십시오. 모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인물들 아닙니까? 올해 4월 중순 어느 신문 칼럼에서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그 유명한 연설을 한 그날 밤 그는 워싱톤의 윌라드 호텔에서 부인이 아닌 여자와 난잡한 밤을 지새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사실로 믿어져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FBI의 도청장치에 걸린 것이라니 공작정치의 비열함을 개탄하면서도 그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은 참되 오래 참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뀌는데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운영체제와 프로그램만 깔고 나면 키보드와 커서로 마음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컴퓨터 같은 기계적 존재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의지적으로 선택해야하는 존재입니다. 종종 같은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를 기계적으로 딛고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반복되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 은혜가운데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법도 익히게 됩니다. 이는 모두 많은 시간을 요합니다.

본회퍼는 이 점과 관련해서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귐 속에 들어오는 인간의 모든 희망적인 꿈이야말로 참다운 사귐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부서져야 합니다'. '모든 꿈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때에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동터 오게 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지향하여 함께 모인 언덕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우리도 서로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꿈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누구나 사랑스럽게 변화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언덕에서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낭만적인 꿈에서부터 깨어나야만 합니다.

2. 사랑은 고통을 오래 견뎌내는 능력입니다

내가 사랑해왔던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하면 마음에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진정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에로스 사랑은 그런 고통을 오래 견뎌내지 못합니다.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워주는 동안만큼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자기를 만족시켜주었던 것들이 자신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에로스는 견디지 못합니다. 권태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에로스를 받아주지 않을 때 깊은 상처를 받고 어둠 속에 빠집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미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상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무관심으로 도피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에로스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고통을 오래 견뎌냅니다. 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통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거나 방어하려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자기 가슴을 파고 들어와 송곳으로 찌르듯 괴롭힐 수 있도록 자기를 기꺼이 내어줍니다.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상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탕자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는 오래 참음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할 때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가 유산을 싸들고 아버지와 집을 등지고 먼 나라로 휙 가버렸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빈둥지 증상이란 것을 아시죠? 자녀가 장성하여 결혼하여 분가해갈 때 부모가 느끼는 허전함과 외로움의 고통을 말합니다. 하물며 이렇게 집을 나가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아들이 재산을 홀라당 까먹고 빈 털털이가 되어 망가진 몸으로 투벅 투벅 집으로 기어들어 옵니다. 그 초라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나이도 잊은 듯 달려갑니다. 그를 뜨겁게 포옹하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어주고 새 신발을 신기고 대대적인 환영잔치를 벌입니다. 기쁨을 감추질 못합니다. 이것은 뭘 말합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마음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주고 간 고통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뼈아픈 고통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견뎌낸 것입니다. 그 고통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깨뜨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실했던 자신을 위해선 아주 작은 파티도 열어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하여 화가 잔뜩 나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항의는 논리적으로 합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종종 형식적인 논리에 있지 않고 가슴에 담겨 있습니다. 형은 동생이 남기고 간 고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고통은 형의 마음속에 있던 동생을 향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을 열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면서 '아, 나도 제법 사랑이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흐뭇해할 수 있습니다. 착각입니다. 물론 그런 사랑도 나름대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가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에로스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가페 사랑의 진정성은 탕자처럼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낼 수 있는가, 로만 알 수 있습니다.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면 이를 가능케 하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합시다. 오래 참는 사랑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말고 사랑 없음을 뼈아프게 회개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오래 참는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3.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오래 참는 사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 힘만으로 바울이 묘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성격과 의지력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요. 저 같이 선천적으로 성격이 급하고 의분심이 강한 사람에겐 화가 치밀어 오르는 한 순간을 견뎌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은 물을 쏟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화를 내는 그 순간에 벌써 후회하지만 화를 고스란히 다시 거둬 담아 원상태로 복귀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 참는 성격을 가진 사람도 가만히 보면 겉으로 감정만 들어내지 않을 뿐, 속으로는 상대방을 마음에서 접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정답을 알려 줍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히 12:2).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시작하신 분일 뿐 아니라 우리 믿음을 완성시켜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을 시작할 때만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에선 자기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바라봄에 따라 신앙과 사랑의 완성도는 결정적으로 좌우됩니다. 저 역시 매일 기도할 때마다 부르짖습니다: '주님! 바로 이 시간 주님의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당신의 자비로운 눈을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면 이상하게 늘 눈물이 흐릅니다. 주님께서 그런 기도를 정말 기뻐하시는 모양입니다.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늘 주님만을 바라보노라면 신앙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의 삶이 가까워지기 마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오래 참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3)'. 잘 아시듯이 십자가란 예수님 당시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처형틀이었습니다. 못에 박혀서 잘 안 죽기 때문에 예수님도 당한 것처럼 십자가에 달기 전에 심한 매를 때립니다. 그래도 보통은 몇 일 지나야 피를 다 쏟으면서 죽습니다. 참으로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동안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심지어는 종교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갈취하는 지도자들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뜨거운 눈물을 떨구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 돌아온 것이 바로 십자가처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해내십니다. 물론 예수님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십자가의 길을 비켜갈 수 있도록 애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시자 예수님은 그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하나님의 진노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예수님 위로 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 예수님은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죄인들이 용서받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깊은 고통 속에서 죄인을 온 몸과 가슴으로 품어내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격려합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물론 예수님은 한 때 무리들의 폭발적 인기를 경험하시기도 했지요. 그러나 결국 죄인들의 반항으로 인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항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참아내셨습니다. 그 반항과 고통 때문에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을 깊이 마음에 묵상하다보면 내가 당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낙심하다가고 지쳤다가도 다시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래 참다가 낙심하거나 지쳐 있는 분들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베드로 신드롬을 과감히 버립시다(요 21:18-23).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묻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말씀하십니다.

순교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스데반이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십시오(행 7:54-60). 그는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간절한 열망을 아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그가 다른 제자들을 생각했다면 그 두려움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왜 사도도 아닌 내가 순교를 당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그를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 주님만을 바라보았기에 주님의 마음으로 죄인들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사랑이 힘들 때면 오직 주님만 바라봅시다. 오래 참는 사랑을 스데반처럼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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