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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 안에서 거하는 기쁨 (잠 3:1~4, 요삼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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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잉글랜드 중부의 코벤트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레오프릭 영주는 농노들을 대상으로 지나친 징세를 하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사람은 농노의 대표도 민중 봉기의 우두머리도 아닌 레오프릭 영주의 부인인 레이디 고다이버였습니다. 남편의 과중한 세금정책을 비판하며 세금을 낮출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는 거만한 영주는 “너의 그 농노사랑이 진심이냐? 만약 그 사랑이 진심이라면 몸으로 실천해 보아라. 만약 당신이 완전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바퀴 돌면 세금감면을 고려하겠다”라고 하면서 빈정대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알몸으로 말을 타고 숨지도 못한 채 영지를 한바퀴 돌 것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고다이버는 알몸으로 말등에 올라 영지를 돌기 시작했습니다. 영주의 부인이 자신들을 위하여 세금을 낮추기 위하여 영지를 돈다는 소문이 들리자 농노들은 감동하였습니다. 그들은 고다이버의 알몸을 보지 않기로 하고 집집마다 문과 창을 닫고 커튼을 쳐서 그녀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 때 레이디 고다이버의 나이는 겨우 16세였습니다.

  내려오는 관습이나 상식을 깨는 정치 행동을 ‘고다이버이즘’(godivaism)이라고 합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 역설논리로 시위를 한 고다이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한 희생은 값어치가 있습니다. 진리 안에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진리는 참된 도리입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타당한 지식입니다. 요한에게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니까? 요한복음 18장에는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18:37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합니다. 18:3에는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진리를 모릅니다. 진리 앞에서 진리를 묻고, 진리를 보고 있으면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때문에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진리는 어떤 개념이 아니라 한 분 인격체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도리를 주는 핵심인물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기뻐하고, 다른 것에 의존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거하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삼서 2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한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입니다.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의 번성과 형통은 누구나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삶이 영혼만큼 잘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안되고 육체가 잘 되면 오히려 저주입니다. 신앙 없는 건강, 신앙 없는 지식, 신앙 없는 재물, 신앙 없는 지위 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범사에 잘 되고”라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물질로 해석합니다. 물질적 부요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물질은 인생에서 중요한 도구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물질이 필수적이며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일 부분입니다.

  돈과 생활 방식의 문제는 성경에서 지엽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가운데 15%가 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에 대한 가르침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가르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부자 될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9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성경의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이 부자였습니다. 당시에 재물도 많았고 집에서 양육하는 개인의 병사도 있었습니다. 욥도 당대에 제일 부자였습니다. 다윗왕과 솔로몬왕도 엄청난 부를 자랑하던 부요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원칙적으로 부자를 배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자가 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부자에 대한 경고가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6:24에는 “화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2:15에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2:21에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외면한 것을 성경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에게 인색하면 하나님께 인색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자기에게 부요한 자가 배격의 대상인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18:25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까지 합니다. 성경이 배격하는 부자는 자기에게 부요한 자입니다. 하나님께 부요하고, 이웃에게 부요한 자는 칭찬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영국의 어느 경제지의 보도에 보면 전 세계의 백만장자가 720만명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재산이 1억달러는 넘어야 거부라는 소리를 듣는답니다. 지난 2-3년 사이에 신흥 부자가 크게 늘었습니다. 아마 이젠 더 많을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지간한 아파트는 10억원은 되는 것 같은데 10억원이면 백만장자아닙니까? 이제는 500만달러를 가진 사람이 보통부자랍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50억원입니다. 그리고 재력가란 말을 들으려면 1억달러, 약 1천억원은 가져야 한답니다.

  이런 부자가 넘치는 세상에 좋은 부자도 많습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면 자식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 세계 두번째 부자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입니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재산 85%를 자선재단에 기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기부하기로 한 재산이 370억달러라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약 36조원입니다. 이 돈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빌 게이츠가 세운 자선재단은 자산이 약 600억달러라고 하네요. 부자다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자 될 자격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홍콩의 배우 성룡도 자신의 재산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기부 문화가 빨리 정착했으면 좋겠습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는 어느 부부가 직장에서 조기 은퇴하고 미국 플로리다 해변에 예쁜 집을 샀습니다. 그들은 매일 요트놀이를 하고, 조개껍데기를 줍고, 소프트볼 게임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최후의 업적은 소프트볼과 조개껍질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보세요, 주님, 제 조개껍데기 좀 보세요. 예쁘죠?”라는 말 외에 할 말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삶이 부럽습니까? 이런 삶은 정말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세요. 사람을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병을 고치십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먹이십니다. 죽음의 아픔을 달래기 위하여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로또 복권이 당첨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흥부의 박을 가져다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하여 오히려 단호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지칭하실 때에 ‘사륵스’(sarx)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 말은 경멸하고 부정적인 의미의 육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의 육체는 ‘소마’(soma)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선하거나 중립적인 육체를 뜻합니다. ‘사륵스’는 쇠하고, 병들고, 죽습니다. ‘사륵스’는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소마’가 잘 되고, 강건하고, 평안해야 삶이 평안합니다.

  최근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부자 되세요”를 제치고 “건강하세요”라고 합니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사십시오. 그러나 여기에 우리 인생의 목숨을 걸면 안됩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만일 내 나이가 70세인데 모든 새로운 비법과 화장술을 동원해서 젊음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면 나는 내 방식대로 내 몸을 미이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이 든 만큼 보이고, 나이만큼 보이게 사는 것이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괜히 자꾸 젊게 보이려는데 그렇게 보아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많아집니다. 그냥 나이만큼 보이고 건강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부자 되십시오. 영혼만큼 부자 되십시오. 모두가 강건하십시오. 영혼만큼 강건하십시오. 영혼 없는 부는 저주입니다. 영혼 없는 강건은 파멸입니다.

둘째,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가장 기쁜 일입니다.

  3절에는 “형제들이 와서 내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4절에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고 합니다.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진리에 대한 첫 번째 단계는 진리를 아는 일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진리이십니다. 시편 31:5에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고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요한복음 14:6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합니다. 셋째는 성령이 진리이십니다. 요한일서 5:6에는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합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계명이 진리입니다. 시편 119:151에는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다섯째는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7:17에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진리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존 맥스웰의 ‘자기 경영의 법칙’에는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지붕 고쳤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을 섬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종류의 사람은 예수님을 그 분 때문에 섬기는 사람입니다. 둘째 종류의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때문에 섬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아닌 첫 번째 사람이 지붕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기적보다 말씀을, 빵보다 삶을, 단순한 감동보다 진리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고, 예수님 자신을 보고 진리를 찾는 사람이 지붕을 고치고, 진리를 행하는 기쁨을 가집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를 찾으려면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면 진리가 보입니다.
  진리에 대한 두 번째 단계는 진리를 행하는 삶입니다.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에서 행동까지 거리는 한없이 가깝기도 하고, 한 없이 멀기도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 거리는 무한대입니다. 알지만 도무지 행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펄벅여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30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에서 손까지의 거리는 불과 50센티미터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리가 무한히 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야고보서 2:17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고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듯이 행함이 없는 진리는 거짓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1:22에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진리는 결국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전시생활방식’(Wartime lifestyle) 혹은 ‘전시사고방식’(Wartime mind-se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항상 전쟁하는 마음자세와 생활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서,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신과 불신 사이에서 전쟁이 세상에서 진행 중이라는 것 알려 줍니다. 항상 사단과 전투적인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근교 롱비치 항구에 가면 ‘퀸메리’라는 호화 여객선이 있습니다. 이제는 여객선이 아니라 정박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관광지입니다. 이 배가 평시에는 호화 여객선이었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 수송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배는 축구장 세배 길이의 큰 배입니다. 평시와 전시에 각각 적합하게 기능과 임무를 바꾸어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시에는 승선 인원이 3천명이었는데 전시에는 1만5천명이었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그 명령의 성취에 달려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시에는 평화롭게 삽니다. 그러나 사단과의 전쟁에서는 언제든지 전투태세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있을 때에 평화와 전쟁 이 둘을 다 적절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과제입니다.

  하루에 뜨는 인터넷 정보는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300쪽짜리 책 275,000권 분량이나 됩니다. 이렇게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진리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 이것이야 말로 진리라고, 이것이야 말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이것이야 말로 삶에 풍성한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얼마나 될까요? 거짓과 음란과 모함과 비난과 각종 추함과 아픔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서도 진리를 선포하고 알려야 합니다.

  나라의 교육정책을 책임져야 할 학자가 남의 논문을 베끼고도 아무 가책이 없고, 국가의 연구비를 받고도 연구하지 않고 논문 재탕이나 하고, 그러고도 변명을 늘어놓고, 그 윗선에서는 이런 것은 사임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고 하는 거짓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해야 사임할 사안입니까? 진리가 실종된 국가입니다. 진리가 바로 서고 진리가 승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31-32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는 삶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이런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자유함을 얻는다면 이 것이야 말로 참 기쁨일 것입니다.

결론

  같은 대학교에 다니던 젊은 학생 셋이 사고로 같은 날에 죽었습니다. 함께 옥황상제 앞에 갔더니 옥황상제는는 “앗차, 실수! 내가 착각해서 미리 데려왔구나. 미안하다. 다시 너희들을 세상에 보낼텐데 뭘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학생은 “세상에 살아보니 권력이 제일입디다. 다시 세상에서 장관으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옥황상제는 그에게 장관이 되게 허락하였습니다. 둘째 학생은 “세상에서는 돈이 제일입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다시 가서 부자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옥황상제는 그에게 부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셋째 학생은 “저는 권력도 재물도 다 싫습니다. 마음씨 착한 마누라 얻어, 자식 셋쯤 낳고, 농사지으며 걱정 근심 없이 80세까지 건강하게 살다 죽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옥황상제가 “옛기! 이놈아! 그런 자리 있으면 내가 가지 너를 주냐?”라고 했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가치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건강이나, 장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흔히 말하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어 진리 안에 사는 기쁨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된 만큼 범사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된 만큼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삶을 살아 진리가 이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사는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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