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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속에서도 충성해야 할 이유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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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일, 우리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의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묵상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왜 제일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까? 사도요한이 유배된 밧모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에베소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가까운 도시가 서머나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러니 그 첫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본질은 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충성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해서 우리는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충성이란 글자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자의 충(忠)자는 가운데 중자와 마음 심자가 합쳐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옆으로 빗나간 것이 아니라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하나는 나라나와 임금에 대해 곧고 지극한 마음을 충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중에 일곱 번째 열매가 이 충성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린 충성해야 합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헀습니다. 충성스러운 성도들이 없었다면 어찌 기독교 역사상 2천년 만에 지구 상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충성된 증인들, 성도들이 있었기에 오늘 세계 기독교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도의 충성은 무엇일까요?

  첫째, 저는 작은 일부터 신실한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충성하면 거대하고 큰 일만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가장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신실한 것,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래서 우린 다윗의 충성을 이야기 할 때, 다윗이 목동으로써 양을 돌보는 그 작은 일에 충성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다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을 작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그 일부터 최선을 다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에 헌금위원들이 앉아 계십니다. 남들보다 이렇게 먼저 나와 가운 입고 나와 준비하시는 것, 충성입니다. 성가대원이라고 먼저 나와 연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다 충성입니다. 교사이든, 주방봉사든, 안내위원이든...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더 나아가 예배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이 충성입니다.
  오늘 늦으신 분은 다 이유가 있겠지만, 예배 시간에 일찍 나오는 것이 충성입니다. 더불어 주일 오후예배도 나오고, 수요일도 나오고, 새벽기도에도 나오고, 구역예배도 나오는 것이 그것이 진짜 충성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주님은  큰 일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은 내게 특별한 사명,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거대한 일이 맡겨질 때 충성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사소한 일들,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남겨주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최선을 다해서 꼭 곱절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튼 받은 종은 그 까짓거 시시하게 여기고 땅 속에 파묻어 버렸습니다. 주인이 왔을 때 그는 내어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책망을 받고 결국 내어쫒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이 아주 작다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주님에 대한 충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충성이 무엇입니까? 변함없는 마음이 충성입니다.

  일편단심이어야지 마음이 왔다갔다, 변질되어선 안 됩니다. 한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가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어선 안 됩니다. 마음이 변치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 제직으로 임명받을 때는 열심히 합니다. 처음 집사 임명받고, 권사 임직 받으면 열심히 하는데 몇 년 지나면 흐지부지 됩니다.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여러분, 가롯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3년 동안 같이 있었는데 처음 2년 동안은 아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회개라는 중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3년째 다른 생각을 품습니다. 가끔 지갑에 손도 대고, 다른 일에 쓰기도 하고, 결국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리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의 충성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데마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사도바울의 훌륭한 협조자요, 동역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데마도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이 힘들고 지지부진하니까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받아야하냐고 팽개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바울 주위에는 충성된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 또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와 같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의 신분으로 바울이 있는 곳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왜입니까? 바울은 간질이 있다고도 하고, 안질이 있다고도 하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의사인 누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로마로 꽁꽁 묶여 호송되는데 누가가 죄수의 몸이 되어 같이 동행했겠습니까? 자기도 같은 감옥에 들어가 바울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이 정도쯤 되어야 충성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순교당할 때까지 누가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충성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어제나 오늘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진정한 충성은 환경에 영향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의 시대를 보면 소나무와 대나무를 노래하는 시들, 송죽의 절개를 노래하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소나무는 늘 봐도 푸릅니다. 대나무를 보십시오. 사시사철 변함이 없습니다. 그 곧은 자태가 그대로 있습니다. 봄에도, 눈이 오는 겨울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송죽은 늘 시의 소재가 되곤 합니다. 모든 조건이 좋고 원만할 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입니다.

  나라가 어려움 당할 때 우린 진정한 충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같은 충신이 추앙받는 이유가 나라가 어려울 때 충성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육신을 잘 압니다.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그 때 그를 복위 시키는 운동에 동참했다가 그들이 다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까?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충성스러운 아내는 가세가 기울 때 알 수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원만할 때 충성 안할 부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세가 기울고 사업이 부도나고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끝까지 남편을 믿어주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할 아내가 어진 아내요, 충성스러운 아내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 오죽했으면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아이들하고 부인은 외국에 유학 보내놓고 아빠 혼자 한국에 있는데, 문제는 돈 벌어서 다 보내줘도 기러기 아빠가 병들면 아무도 안 온답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여러분, 남편이 힘들어하고 고통당할 때 더 곁에 서 돌봐주어야 하는 것이 아내의 몫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힘들다고 집 나가는 아내들이 너무 많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국 런던에 유명한 워커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거기엔 ‘충성’이란 유명한 그림이 있답니다. 로마 폼페이의 화산이 폭발해서 화산재가 온 하늘을 덮을 때, 사람들은 아비규환으로 도망치기에 바쁜데 폼페이 성을 지키는 한 병사가 부동자세로 서서 그 성을 지키고 있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다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든 나쁘든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나 힘들 때나 교우들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서머나 교회가 자랑하는 이 폴리캅 주교도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감독이요 주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면서 86세 노령의 폴리캅 감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평소에 존경하고 잘 아는 관리가 말합니다. “선생님의 인격과 그 유명한 이름을 제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노년에 이 고생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제게 이제부터 예수 안 믿겠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내보내드리겠습니다. 다른 곳에 가셔서 예수를 맘껏 믿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여보게, 나는 그럴 수 없네.  86년 동안 주님은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럴 수 없네, 얼른 화형을 집해하게.”
  그는 결국 장작더미에 던져졌고 불에 타서 순교 당하고 말았습니다. 환경의 영향 없이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 끝까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 바로 이것이 충성입니다.

  또한 진정한 충성은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교우들 중에 보면 누구도 안하는데 왜 내가 하냐, 누구도 전도 안하는데 왜 나만 해야 합니까? 누구는 헌금 안하는데 왜 나만 합니까?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남과 보조를 맞추는 것이 충성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충성입니다.

  오죽했으면 서울에 있는 교회 주보 앞에 쓰는 일년 표어로 “너나 잘해라”가 있겠습니까?  우리 옆 사람하고 인사할까요? “당신이나 잘하세요~!” 남한테 신경 쓰지 맙시다. 남 때문에 시험드는 게 50%입니다. 누가 어떻든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이 판단할 일입니다. 재판관이 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충성이지 다른 사람 눈치 보는 것 아닙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베드로가 “주님, 앞으로 제가 이런 운명이 될 것을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옆에 있는 이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주님은 남의 일에 뭐 하러 신경 쓰냐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가 처한 상황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들은 환란과 궁핍 속에 있습니다. 9절 말씀 읽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아멘.

  환란과 궁핍이 있습니다. 환란이란 것은 로마로부터 받는 박해,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데,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하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을 미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서머나 지역에 와서 상업을 하고, 무역을 하고 경제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이 조직적으로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면 장사할 수 없고 직장에 나갈 수 없습니다.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궁핍이란 말은 지극한 가난이란 말입니다. 지금도 회교권에 가면 기독교인이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공무원이 될 수 없습니다.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서머나 지역의 사람들도 환란과 고통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 고난은 앞으로 또 찾아온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 고난 받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위대한 점은 고난 가운데 진리를 수호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개의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만은 유독 책망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제일 큰 영광인데 그 교회에 책망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칭찬만 있을 뿐입니다. 너희들은 믿음의 부자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할지 모르지만 너희들은 가장 큰 부자다라는 칭찬입니다.

  여러분, 돈도 많이 벌어야 하지만 물질적인 부자가 되기 전에 믿음의 부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서머나 교인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믿음의 부요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 고난가운데 있지만 계속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사업에 장애가 있고, 건강에 어려움이 있고, 가정에 고통이 있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함없이 계속해서 충성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충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9절에 보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답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남편이 나를 몰라준다고,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우리 시어머니가 몰라준다고, 목사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교인들이 몰라준다고, 장로님들이 몰라준다고 섭섭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분 입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 목사님은 반이나 아실까, 장로님들은 아실까 섭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하면서 시험 드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알고 계십니다. 때로는 오해와 억울함도 알고 계십니다. 또 여러분의 고통도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 보면 직장 어렵고, 사업이 힘들어도 십일조 드리려고 애쓰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부요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건축헌금 작정했기 때문에 다른 것 아껴도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니 지켜야지 하고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 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게 많아서 헌금하는 것 아닙니다. 주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의 고통을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비록 그들이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억울한 모함을 당하고 손해를 볼지라도 주님이 아신다면 문제없습니다.
  오늘 성경 8절에 보니,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시작이 되고 마지막이 되시는 역사의 주인공, 바로 그 분이 나를 안다고 하십니다. 그런 주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겠다고 하니 끝난 것 아닙니까?
  옆에 계신 분이랑 인사하겠습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고통과 아픔, 여러분의 눈물 모두를 주님이 다 아십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어느 회사에 유능한 간부가 한 분 있었습니다. 이 분은 크리스찬인데 그 회사를 20년 동안 잘 섬겨왔고 사장의 신임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 어려움이 닥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가 이 간부로부터 왔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억울한 모함을 받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사원들 뿐 아니라 사장님도 그를 의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토로하고 기도합니다. 집에 와 한숨을 쉬면 부인이 말합니다. “여보, 당신은 정직한데 잘못한게 없는데 뭘 걱정해요? 다 말해버리세요.”하고 조언을 합니다. 그러나, “아니야, 내가 지금 말하면 여러 사람이 다쳐. 내 절친한 부장, 과장 친구들 지금 사표 내고 나가면 그 친구들 아이가 대학생인데 어떻게 대학 보내겠어? 내가 억울한 일 당해도 내가 참아야지.”하고 인내했습니다.
  그는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한 장 써서 사장님 출근 전에 책상에 갖다 놓았습니다.

  “사장님, 20년 동안 저를 믿어주셨고 저는 최선을 다해서 이 회사를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이 번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저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장님도 저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를 20년 동안 믿어주셨다면 한 번 더 저를 믿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저를 후원해 주실 수 있다면 제가 이 일을 계속하지만, 저를 의심하신다면 저의 사표를 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장님도 기도하는 분이었기에 그는 기도 하면서 이 일을 신중하게 결정했습니다. 그 간부를 밀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회사에 위기가 다 사라졌습니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서 더 많은 성장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이 간부를 끝까지 믿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나를 의심해도 사장님이 나를 인정해준다면 그는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사장은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결국 자기가 은퇴한 후에 그 회사를 그 간부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사장이 나를 인정해 주어도 우리는 충성하는데, 오늘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나를 안다고 말씀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소는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장수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주군에게 충성한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 속에서 충성해야할 이유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충성해야할 이유는 고난에는 정한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고난은 정한 기한이 있다!” 고난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10절에 보니, 너희가 10일동안 환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10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10, 100, 1000, 10000, 100000 십진법으로 나가잖아요. 너희에게 10일 동안 환란이 찾아온다는 얘기는 엄청난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니라 완벽하고 철저한 고난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10이란 숫자는 길든 짧든 정해진 기한을 말합니다. 너희의고난은 정해진 고난이다,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힘든데 기한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 못 참겠습니까? 요것만 지나면 되는데... 기한이 정해져 있는 고난입니다. 너무 시집살이가 힘드십니까? 그것도 정해진 고난입니다. 직장생활이 힘드십니까? 그것도 정해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 보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고난은 잠깐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이 땅에서의 70-80년은 잠깐입니다. 우리가 그 잠깐을 못 참아서 힘들어 합니다. 서머나 교인이 당하는 고난도 정해진 고난이요 잠깐 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한 크리스찬 어머니와 딸이 있었습니다. 사자가 몇일 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먹이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그 사자를 보고 어린 딸이 무서워서 웁니다. 그 때 어머니는 이렇게 딸을 위로합니다. “얘야, 조금만 참아라. 이제 곧 평안이 올 거야.” 그렇습니다. 사자가 무섭지만 당하는 고통은 잠깐입니다. 이제 곧 영원한 평화가 올 거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이 고난의 시간을 다 견뎌냈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에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고난의 시간이 지나니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들어서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시지 않았습니까?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노예로 끌려간 요셉의 생애의 고난도 정해진 고난이었습니다. 때가 되니 요셉의 고난을 다 멈추게 하시고 그를 들어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것도 정해진 고난이었습니다.  70년의 시간이 지나니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기한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지라도 이 고난에는 기한이 있음을 알고 참고 인내하고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고난 속에서 충성해야 할까요? 생명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10절, 11절 말씀 읽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아멘.

  11절에 보니,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않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망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사망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다 죽는 것입니다. 누구나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 사망은 죽음 후에 오는 심판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영원한 천국에 이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영원한 불 못에,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고난 속에서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영원한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복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책에서 보니, 매미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답니다. 매미가 약 3천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매미는 알로 태어나서 그 알이 자라서 굼벵이가 되는데, 매미가 되기까지 굼벵이의 생활을 무려 7년이나 한답니다. 한번 “맴”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더라구요. 7년 동안 준비해서 한번 우는 것입니다. 7년 동안 있다가 드디어 매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울다가 죽을까요? 불과 2주랍니다. 7년을 기다렸는데 15일 동안 맴맴 하다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매미의 인생입니다. 너무 허무합니다. 참 불쌍합니다. 7년을 기다렸는데 1년은 울 수 있어야지요.

  여러분,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70-80년의 생애, 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믿음으로 잘 이기면 영원한 생명이, 영원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면류관이란 말은 운동경기에 승리한 사람에게 주는 왕관 같은 것이 면류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천국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기복주의적이고 타계주의적이라고 말합니다. 타계적이란 말은 현실도피적, 역사를 회피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잘못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타계주의는 천국을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더 영원한 기업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아파트 한 채 분양받았다고 세상의 것 다 얻은 것처럼 좋아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천국에는 더 멋진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는다면 오늘의 섭섭함이나 손해도 우리는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영원한 천국에 하늘의 보화가 쌓여있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천국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삶이 진정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단에서 드리는 기사가 나옵니다. 워낙 유명한 얘기라 소설, 연극, 영화에도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한 연극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청년이 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100세가 넘었습니다. 아들은 한참 혈기왕성 합니다. 어떻게 아들을 꽁꽁 묶어 제단에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가 묻습니다.

“아들아,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네. 아버지, 압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줄 내가 압니다.”
“그럼 너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믿느냐? 그러면 이제 이 제단에 너 스스로 올라가라.”

  그래서 이삭은 스스로 팔을 내밀어 묶임을 당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감정이 격앙된 모습으로 칼을 들어 아들을 찌르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시고 준비한 숫양을 통해서 제물로 대신 드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신다면, 나를 위해 주님이 독생자를 내어 주신다는 사실을 내가 믿는다면, 그리고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는다면,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가 충성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더 좋은 미래를 확신한다면 어려움 당하고 힘들어도 우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도록 충성하십시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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