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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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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있어 ‘구원’이란 과연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라고 하지 말고, ‘나’ 한 사람으로 좁혀서 “나는 과연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저는 종종 장시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나와 예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저런 문제를 가지고 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나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분명한 삶의 의미와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목적을 알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면서 방황하는 사람들, 어리석게도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요, 살아갈 가치가 있고, 우리의 남은 생애도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낼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그래도 무엇을 했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잘 먹고 살다가 죽기 싫은데, 연약한 육신 때문에 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할 것입니까?  우리들이 지금까지는 잘못 살았다고 해도, 그래도 우리의 남은 생애는 참으로 아름다워야 할 것입니다.

  저의 남은 생애,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 우리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 가장 보람 있고,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추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놓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의 남은 인생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남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원히 본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언어, 그의 사역 그의 삶의 목적과 방법, 그의 전 생애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고, 목숨 바치신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열심히 따라가면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성공하고도 대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생애에서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야 할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면서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주어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 잘 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여러분, 친구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습니까?    ‘친구’란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귀는 사람, 벗을 말합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친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17:17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4)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몇 명의 친구를 두고 있습니까?  친구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많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정말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참 친구를 자랑해야지, 친구가 많다는 것은 친구가 아니라, 알고 지내는 사람일 뿐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친구, 힘들 때에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것입니다.

  로빈 S. 샤르마의 “나를 찾아가는 여행” 이란 책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친구는 우리의 인생에 유머와 매력, 그리고 아름다움을 더해주지.  친구와 함께 배꼽을 잡고 웃는 웃음만큼 젊음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별로 없네. 친구는 자네가 독선에 빠져 있을 때 겸손하게 만들어주며,  지나치게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미소를 짓게 만들지.  삶이 자네를 속이고 상황이 악화될 때, 좋은 친구는 자네를 도와주는 존재라네.”  여기서 “친구는 자네가 독선에 빠져 있을 때 겸손하게 만들어주며, 지나치게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미소를 짓게 만들지. 삶이 자네를 속이고 상황이 악화될 때, 좋은 친구는 자네를 도와주는 존재라네.” 이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요즈음에 진정 친구라고 할 사람이 없다고 말 합니다.  갈수록 비정해지는 세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요즈음에 진짜 친구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하면 저는 속으로 반문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라도 했는가?  친구를 갖고 못 갖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친구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잃어버리지 않으면 친구는 영원히 친구입니다.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람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 다를 것입니다.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공모한 적이 있었답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에는 이런 말이 선발되었습니다.  “기쁨은 곱해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켜주고 멈추지 않는 시계”, “많은 동정을 베풀어서 그 동정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  하지만 1등은 이런 말이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그 사람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찾아가보고 싶은 친구가 없습니까?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새롭게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이 중풍병자에게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던 38년 된 병자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없었지만, 오늘 중풍병자에게는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고, 외롭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찾아갔을 때에 병이 아주 깊은 것을 보시면서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병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옆에 친구라도 있었다면 그가 부축해주어 못에 뛰어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무려 38년 동안 그에게는 부축해줄 수 있는 친구가 없었기에 고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를 두지 못하면 38년은 고생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이란 사람이 빛나는 것은 그에게는 좋은 세 명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친구들이었습니다.  다니엘만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친구들 모두 다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 때문에 다니엘은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욥에게는 아주 좋은 친구 4명이 있었습니다.  욥이란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친구들이 약속이란 한 듯이 욥의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 그리고 늦게 온 람 족속 부스 사람 엘리후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친구들이 와서 밤낮 7일 동안 욥과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고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한 주일 동안 말없이 친구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은 정말 귀한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욥의 친구들이 욥이 죄를 지었기에 그런 큰 어려움을 당한다고 몰아세우는데, 그런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어떤 여인과의 사랑보다 더 숭고한 것이었습니다.

  “친구 없이 사는 것 만큼 무서운 사막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으므로 사막과 같은 세상인데도 아름다운 낙원으로, 기쁨의 동산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가장 큰 필요를 채워주는 친구이며, 사람에게 가장 큰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탐 스테빈스 목사님은 “성경적 관계전도”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국제전도폭발의 수석 부총재를 지내고 계신데, 전도폭발과 함께 관계전도를 가르치는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관계전도라는 말은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의미 있게 사귀고, 친하게 지내는 가운데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전도를 말하는 조셉 앨드리치는 “관계전도란 사람들이 왜냐고 물을 때까지 그들을 사랑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나에게 그런 사랑을 주느냐?”고 물을 때까지 그들을 사랑해주는 것이란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어떤 분은 관계전도란 “교회를 예배당에서 꺼내 세상 속으로 넣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전도폭발의 저자인 유명한 제임스 케네디는 “관계전도란 삶의 방식으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적 관계전도”라는 책을 쓰는 탐 스테빈스 목사님은 예수님과 초대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전도했을까?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하였던 그런 전도 원리들을 오늘 어떻게 나의 전도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놓고 책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말씀드리고,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의  성향과 신앙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가버나움이란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보낸 본 동리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는 마태는 가버나움이라고 하지 않고 본 동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말이 온 동리에 퍼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마침내 문 앞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집안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에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침상에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  중풍병자가 너무나 위중하여 엎고 올 수도 없고, 부축하여 올 수도 없고, 4명의 친구들의 침상에 뉘인 채로 메고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안에 꽉 들어차고, 침상을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 싶어도 방안으로 들어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4명의 친구들은 스라브 지붕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올라가 지붕을 걷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습니다. 

  이 4명의 친구들의 열심과 간절한 심정은 이대로 물러갈 수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으며, 지붕을 걷어내고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몇 명이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나님 한 분 밖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라고 하시면서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자는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탐 스테빈스 목사님은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관계전도를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1장의 제목을 “참된 친구 되어주기”라고 했습니다.  참된 친구가 되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은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사람도 전도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면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탐 스테빈스는 이들 4명의 친구들을 5가지로 설명합니다.

1) 공감적이다.

  이들 네 친구들은 남의 문제를 공감할 줄 아는 친구들이었습니다.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친구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갈 수 없는 위기에 빠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공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단지 예배 장소 안에서만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배장소 밖의 어려움에 처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거룩한 장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을 개방하여 한 영혼이라고 더 구원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 있다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할 수 없다면 전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친구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기회만 오면 도둑질 했던 18살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드온 성경을 발견하여 열심히 읽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은행 출납계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출근하는 둘째 날 청년의 전과기록을 알게 된 매니저가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왜 감옥에 갔었습니까?  그리고 이 은행의 돈을 만지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설명해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이제 마음을 새롭게 하였으며 자신을 시험하고 싶어서 여기에 취직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매니저가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 시험에 떨어진다면 나는 어쩌란 말이요?  정말 당신이 계속하여 여기서 일하고 싶으면 5천 달러를 낼 수 있는 보증인 다섯 명만 구해오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낙심하여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교회 성도들 중 사업가 몇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몇 시간 안에 열 명을 구해주었답니다.  여러분, 공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를 원하십니까?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 실제적인 도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  창의적이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그의 친구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기 위해 매우 창의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유대인의 집은 대개 정방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중심에 서까래와 잔가지로 얽어매고 진흙을 덮어 만든 것으로 평평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붕을 걷어내고 침상을 달아 내리려고 하면 상당한 부분을 헐어야 했습니다.
공감할 줄 알았던 네 사람은 친구를 데리고 예수에게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붕의 기왓장을 옮겨놓고 흙덩이를 걷어내고 잔가지와 서까래를 치우고, 침상을 달아 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병든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가지고 전도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의적인 방법을 주십니다. 

3) 비용이 든다.

  아직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재정적인 희생도 있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사귀고 친교를 나누면서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고 하면 시간도 내어야 하고, 조금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고, 한 사람을 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들 네 사람은 가버나움에 있던 그 집 지붕을 수리해주느라고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전도팀에서 전도를 하고 보니 그 집에 난로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보고회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그 난로를 자기 트럭으로 운반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전도비 사용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4) 협동적이다.

  중풍병자를 데려오는데, 팀사역을 이루었습니다.  네 사람이 침상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인들은 없고, 다 사역자들만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구경꾼은 하나도 없고, 다 경기자요, 다 사역자요, 다 참여자들이라고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은사를 활용하고 응용하면서 전도 사역에 참여하여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새로운 영혼들이 들어오고, 구원받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5)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친구들의 오늘 사건의 초점은 교회가 아닙니다.  종교도 아닙니다.  분위기도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어떤 경건성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예배당의 거룩한 분위기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질병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시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친척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기만 하면 그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 앞에서 칭찬받을 일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들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우리의 가치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값지다고 하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나만의 구원으로 그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거룩한 부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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