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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있는 것으로 주라 (마 15: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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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깊이 빠져들 때가 있다. 그것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그것이 내게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의 눈에, 나의 마음에 그것이 머문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은 나의 일부가 된다.

  나에게 가장 익숙한 이름은 목사이다. 그러나 이 이름도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한 것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한 참이 지났지만 누가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를 때보다 “전도사님”이라고 부를 때 저의 고개가 먼저 돌아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목사라는 이름이 자연스러워졌다. 이제는 내게 목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어느 날 내게 다가온 이름이 있었다. “제자”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렇게 성경을 이 잡듯이 읽어도, 심지어는 제자훈련을 시켰어도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생각을 깊이 하지 못했는데 (나는 여전히 목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제자라는 말에 나의 눈길과 발걸음이 멈추었다.

  목사와 제자라는 말이 그렇게 다른 것도, 그렇게 똑같은 것도 아니지만 만약 둘 가운데서 한 가지로 불리어지기를 원한다면 저는 제자로 불리어지고 싶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불리어지기를 원하는가? 나를 부르는 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 교사..... 그러나 우리는 이 말보다 더욱 잘 어울리는 말이 있는데 바로 “제자”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는 것은 제자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에 불과하다. 제자는 목사나 선교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바로 이것이 제가 제자에 대한 설교를 시작하게 된 동기이다.

  지난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주셨던 위탁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오늘은 그렇게 선택하셨던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고, 이 훈련을 통해서 제자인 우리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살펴보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킨 방법은 참 많이 있었다. 말씀,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면서 훈련시켰다. 폭풍우가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에 내어 놓으심으로 훈련시키셨다.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훈련시키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으로 훈련시키셨다. (기적과 치유의 장소에 함께 있음으로 훈련시키셨다.) 변화산에 함께 있음으로 훈련시키셨다. (영광과 소망을 생각하게 함으로 훈련시켰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함께 기도함으로 훈련시키셨다. (그들이 실패에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시켰지만 가장 좋고 유일한 방법은 마이클 카드가 말한 대로 "The Walk" (동행)이었다. 제자들 곁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훈련시켰다.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든지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그들에게 요구하셨다. 성경을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는 곳에 집중해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런 표현을 유의해 보라. 바로 그 곳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음으로 그들을 진정으로 가르치기 원하시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오늘 똑같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을 주님이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성경은 칠병이어(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칠병이어에 대해서 오해한다. 칠병이어를 오병이어의 "copy"(모조, 복사)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마태와 마가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구분하지 못했을까? 똑같은 사건을 두 개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다른 사건이다.

  눈에 보이는 차이들을 보자. 우선 기적에 사용된 떡과 물고기의 양이 다르다.(5개 2개/ 7개 2개)  군중의 수가 다르다.(5천명/ 4천명) 남은 양도 다르다.(12바구니/ 7광주리) 그러나 두 기적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첫째, 시간이 다르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에 군중들은 “잔디”에 앉아서 먹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기적 때에는 “땅”에 앉아서 먹었다. 우리 눈에는 잔디나 땅이나 똑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봄철에만 풀이 푸르다.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고 덥기 때문에 풀이 다 말라버린다. 그래서 칠병이어의 기적 때에는 사람들이 잔디가 아닌 맨땅에 앉았다. 오병이어는 봄에 일어났고, 칠병이어는 여름에 일어났다. 시간적으로 둘은 다르다.

  둘째, 대상이 다르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이 곳에 가셨다가 데가볼리를 거쳐 다시 갈릴리 호수로 오셨다. 데가볼리는 헬라-로마의 자치도시로서 갈릴리 호수 동쪽과 남쪽에 있던 10개의 이방 도시 지역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리 호수 서편과 북편으로서, 유대인 지역이다. 그러나 갈릴리 동편은 이방인 지역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갈릴리 호수 동편에 와 계신 것이다. 이방 지역에서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병이어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베푼 기적이요, 칠병이어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베푼 기적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롬10:12)에서 말한 것처럼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새번역)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편 그 이방의 땅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너무나 많은 병자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은 꼬박 3일을 그들과 함께 하며 지냈다. 먹을 것도 점점 다 떨어져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신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32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 능력을 행하는 자, 많은 장애인을 고칠 수 있을 만큼 능력에 붙잡힌 그 분과 함께 있어도 배가 고프다니.... 놀랍지 않은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배고픈지 아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는가? 능력 많으신 그 분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날마다 그 분을 통해서 공급받지 못하면 나는 주릴 밖에 없다. 성령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내 편이시지만 내가 그 분으로 충만케 되지 않으면 나는 영적 빈사상태에 빠진다는 것을 아는가?

  ※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준비하는 교사들이여!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영혼들이 내 곁에 있다고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들은 내 앞에 있어도 굶주릴 수 있다. 그들은 나와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주님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주님으로부터 내게 밀려드는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면, 주님으로부터 늘 생생한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그들의 영혼에는 기갈과 기근이 찾아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목사인 나에게 이 마음이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교사인 나에게 이 마음이 있는가? 나는 영의 양식을 공급받기 위해 나온 성도들을, 어린 영혼들을 굶기지는 않는가? 나는 충분하게 배부르다고 생각한 양식이 그들에게는 너무 딱딱하고 볼품없는 영양가 없는 양식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면 주님과 함께 있어도 우리는 주릴 수 있다.

  우리 주님의 눈에는 배고픈 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님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긍휼의 심장이 바쁘게 뛰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오병이어 때도, 칠병이어 때도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기적은 언제나 그 분의 불쌍히 여김에서 시작되었다.

  나도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이 아이들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맛보고 싶다면 모든 핑계를 다 내려놓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 우리 가정 가운데 있는 아픔이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인간관계에서 쓰라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나의 모든 고집을 다 내려놓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의 구원을 진정으로 갈망하고 있다면 그들 앞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마음 대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것은 우리 안에 작은 불씨가 되어서 내 안에 파동을 일으킨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마음으로 건너간다. 그 때 우리는 내 자신을 내려놓는다. 내가 내 자신을 내려놓을 때 그들도 그들의 마음을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서방의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니다. 나를 원하고 사랑하고 돌봐주는 이가 없는 것,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이다. 몸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고독과 자포자기와 절망의 치유책은 오직 사랑뿐이다. 세상에는 빵 한 조각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이들은 더 많다. 서방의 빈곤은 다른 종류의 빈곤이다. 그것은 고독의 빈곤일 뿐 아니라 영성의 빈곤이다. 그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듯 하나님께도 굶주려 있다.”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가 있었다. 그는 9차례의 범행에서 무려 17명을 살해했다. 그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 1976년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이렇게 했다.
“전과자들에게도 꿈은 있습니다. 어두운 그들에 있었던 그들이기에 그 꿈은 더욱 간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은 세상의 냉대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납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가 출소자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갱생의 길을 열어주시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교도소에서 초범자와 재범자를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저 같은 불행한 젊은이가 다시없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저를 돌봐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포승줄에 꽁꽁 묶여 뒤로 끌려가는 동안 그의 입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그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노래였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김대두는 잘살고 싶었지만 잘살기는커녕 울분만 쌓여가는 가난한 농촌의 젊은이였다. 돈을 움켜쥐는 것만이 잘사는 것으로 알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해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는 그 꿈에서 깨어났다. 제정신이 든 그때는 이미 사형수가 되어 있었다. 오랏줄에 목을 맡기면서 불렀다는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처럼 그의 방황이 너무나 슬프게 느껴진다. 그는 첫 범행 후에 너무너무 외로워서 철길을 5킬로미터나 걸었다고 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면 그런 끔찍한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가 이런 광야에 있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너희에게 몇 개나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었던 보리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큰 기적을 베푸신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주님은 결코 우리의 것을 무시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결코 우리가 가지지 않는 것을 가지고 기적을 일으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가진 것을 사용하겠다고 그것을 달라고 하신다. 그것을 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네가 그것을 써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도 주님의 본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어떻게 일하셨을까? 가장 정확한 답은 주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을 통해 막강한 세계 강대국 내에서 천대받던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  오셨다. 그로 인해서 정해진 자신의 한계를 잘 아셨다. 5천명을 먹인다고 해서 세계의 기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님을 그 분은 아셨다. 병자와 불구자를 몇 명 고친다고 해서 질병이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셨다. 그 분은 설교하실 수 있었고, 가르칠 수 있었다. 그래서 설교하셨고 가르치셨다. 그 분은 치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육체의 질병과 귀신들린 많은 영혼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처럼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오늘 빈들에 서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것,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광야에서 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빈 들, 배고픈 빈 들, 나의 것이 점점 떨어지고 마침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내가 깨어져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광야에서 깨닫는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그 분의 아들과 딸로 삼기 위해 광야와 같은 곳으로 부르신다. 광야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 분이 필요한지를 배운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 분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을 배운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 분의 가련한 잃은 양인 우리를 마침내 찾아내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 너에게 무엇이 있느냐? 저들을 불쌍히 여겨 너의 가진 것을 그들에게 주라. 간음한 여인도 용서했던 나의 용서처럼, 다섯 명의 남자에게 버림받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갔던 나의 용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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