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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 받는 자의 행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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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울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눈물 속에 살다가 통곡소리와 함께 세상을 떠납니다. 처음 태어난 요람에서는 혼자 웁니다. 그러나 무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웁니다. 그래서 눈물 없는 인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눈물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물을 흘리는 동물은 인간뿐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에게도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짐승의 눈물과 사람의 눈물은 다릅니다. 짐승의 눈물이 생리학적, 화학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라면, 사람의 눈물은 감정과 의지가 담겨진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으로까지 설명할 수 있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물은 약한 자만의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눈물은 약한 사람이나 흘리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아픈 사람이 눈물 흘리고, 없는 사람이나 우는 것이고, 외로운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이 눈물 흘립니다. 그래서 약한 자가 눈물 흘린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눈물이란 이럴 때만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과 감격이 있어도 눈물이 납니다. 결코 눈물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는 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과학이 힘이 있고, 규율이 힘이 있고, 때로는 법이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하다는 과학이나 기계로도, 힘 있다는 법으로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는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원리와 냉정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학도 기계도 법도 사람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물입니다. 망나니 자식을 돌아오게 하는 것도 눈물이요, 낙심한 사람을 일으키는 것도 눈물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거두게 하는 것도 눈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왕도 울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울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울었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눈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눈물은 결코 약한 것의 상징이 아닙니다. 정말 강한 것이 눈물이요, 그것을 곧 오늘 말씀에는 애통이라고 했습니다.

통곡이 없고 눈물도 없는 것, 눈물이 메말라 버린 사람을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감동이 없고 정열이 없는데 무슨 진실이 있겠습니까?  물론 위로도 없는 것입니다.<비인간적>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눈물과 감격과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의 IQ는 꽤 높습니다. 얼마나 머리들이 잘 회전하는지 혀를 내두릅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 EQ는 제로입니다. 감성지수가 엉망이라는 말입니다. 감지능력이 너무 없습니다. 인간미가 없고 기계적이고 정말 비인간적입니다. 지성을 제어하고 머리를 다스리는 IQ는 뛰어난데 감성을 다스리고 가슴을 다스리는 EQ가 없어서 문제인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성이라고 하는 EQ는 자신의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까지도 공유하는 능력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더불어 웃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IQ보다 EQ즉 감성지수가 훨씬 더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많은 연구 결과 성공요소 가운데 IQ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정도이고 나머지 80%는 EQ가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력보다는 마음의 특성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공부는 잘하는데 인간성이 제로인 사람보다는 감성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IQ는 부모로부터 타고나지만 EQ는 개발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IQ는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반면에 EQ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는 자격증을 따는 두 번째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EQ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EQ라고 하는 말은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박사이자<뉴욕타임즈>기자인[다니엘 골먼]이 가장 먼저 주창한 놀라운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감성에 대해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무조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세속적인 애통은 애통하는 삶을 더욱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애통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신앙적 애통이 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아람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모든 햇빛은 사막을 만든다.”햇빛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장마철에 햇빛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우리는 절감합니다. 그러나 그 좋은 햇빛도 경우에 따라서는 땅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소낙비는 옥토를 만든다.”이런 말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에는 완전히 좋은 것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환경적으로 울 수밖에 없는 어떤 일들을 저주나 불행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인생을 더욱 더 성숙하게 만들고 자기인생의 이면을 돌아보는 눈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애통을 복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애통을 해야 할까요? 위로 받는 애통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애통해도 위로 받지 못한다면 제풀에 지쳐 끝나 버리고 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만 손해예요. 육체도 정신도 피폐해지고 급기야는 삶의 의욕마저도 상실하고 마는 참 소득이 없는 애통은 해봐야 손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는 애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도저히 위로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애통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애통이 어떤 것입니까?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애통입니다.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애통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가슴 아파 할 줄 아는 애통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숨기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담에게서 배운 본능이긴 합니다마는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할 것 없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뚝심 아닌 뚝심하나는 대단합니다. 절대로 자기의 잘못은 인정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얼른 잘못을 인정하면 한 대라도 덜 맞을 일도 끝까지 버팁니다. 무슨 독립투사라도 된 양“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즉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먼지떨이개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을 빗자루까지 가야 해결 되지 않습니까? 어른들 중에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똑같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죄로 인한 애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죄에 대한 자기 애통이 없이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고 진정한 회개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드로와 가룟유다 둘 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고. 가룟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은30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애통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 끌려가 고난 받으시는 것을 보며 괴로웠고 은30을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 주면서“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이“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다가 어떻게 합니까? 은30을 성소에 던지고 돌아와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세상 적인 애통의 끝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지 않았고 예수님께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죄에 대한 애통이란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집에서 끌어안고 고민하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며 심히 애통해합니다. 그 후 고기잡이 나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해변에 게신 것을 알자 물에 뛰어들어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는 위로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갔습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큰 사명을 주심으로 위로해 주신 주님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진정 애통하는 자의 자세요, 그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이 자세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의 애통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언제 임할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절실히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때 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까지 환난을 통해 연단하십니다.“하나님! 나는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나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나를 도와준다고 많은 사람들이 내 옆에서 조언도 하고 달콤한 말들도 합니다마는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뿐입니다.”라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무슨 복입니까? 위로의 복입니다.

야곱은 자기 지혜와 총명을 믿었습니다. 꾀 많은 자기 성품을 좇아서 인간의 꾀로써, 수단으로써만 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이 자기의 연약을 철저히 깨닫게 되기까지는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풍상을 겪으면서 조금씩 자신의 연약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절룩거리면서 비로소 자신이 지렁이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야곱에게 큰 능력으로 위로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사41:14-15)”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애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내가 연약한 것 때문에 애통해 할수록 하나님의 위로는 큰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강한척해도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필요합니다. 아직도 내가 강하고 내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져야 내 연약함을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위에 하나님의 위로가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며칠이 지났을 때 아담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나님! 저기 밖에 돈 많은 부자들이 몰려와서 흥정할게 있다는데요.”“흥정이라고? 무슨 흥정을 한다는 거지?”“그들이 부탁을 들어주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드리겠다고 합니다.”“그래? 그들이 바라는 것이 뭐야?”하나님이 웃으시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답이“낙타를 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아니면 바늘구멍을 아주 크게 만들어 주시든지 해 달라는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연약해지는 것을 이렇게 싫어합니다. 환경이 변해주고 주변이 바뀌어 지길 원하지 내가 연약해지기를 아주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은 다릅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자신의 죄와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아뢰고 달려 나오는 애통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자격증인 하나님의 위로를 여러분에게로 가져오는 삶의 주인공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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