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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온의 소수자 (삿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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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사사(판관)시대에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의 인도아래 300명의 적은 군사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미디안의 대군을 이기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의 한 토막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한번 더 반복해 봅시다: 1)첫째로, 사사기 7:1-8절을 보면, 본래 이스라엘 청년들이 미디안 군대와 싸우기 위해서 32,000명이 기드온에게 자원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숫자가 너무 많다고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싸워서 이기게 되면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를 했다고 자부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룹바알'이라고 하는 기드온에게 이제라도 '무서워서 떠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기드온은 무서워 떠는 군인 22,000명을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군인이 아직도 많다', '수를 줄이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군인들을 물가로 데리고 내려가서 물을 마시게 한 후, 무릎을 꿇고 마구 들이키는 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혀로 물을 먹는 자들, 300명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이 기드온 군대가 선택되는 과정입니다.

다음은, 7:9절 이하 8장에 이르기까지는 기드온이 어떻게 이 <소수>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무찔렀는가 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300명이 한 손으로 나팔을 불고, 한 손에 횟불을 들고, 빈 항아리를 깨며 "야훼만세, 기드온 만세!"하고 일제히 외쳤습니다. 그때에 미디안 군대는 정신이 혼돈, 서로 찌르고 죽이고 하여 밤새 서로 죽였다고 합니다.

1.

오늘 우리는 본문 중 7:1-9절까지, "기드온의 군대가 선택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학의 소명(召命)과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에게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정예부대 300명을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에 걸쳐서 수(數字)를 줄입니다. 처음에 32,000명이 몰려왔으나, ① 첫 번째로, "무서워하고 떠는 군인" 22,000명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가 갑니다. '무서워 떠는 자'는 군인으로 합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나 둘째로 만 명중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구 마시는 사람 9천 7백 명을 또 돌려보내고, 결국 물을 혀로 마시는 사람 300명을 택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에도 그 해명은 없었습니다. 다만 물을 손으로 떠서 혀로 먹는 사실과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사실을 선택의 조건으로 보려할 때 이것은 예정론으로 보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거부할 자에게 거부하고, 염소와 양을 갈라놓는 영원한 하나님의 무서운 뜻과 계획에 의해서 9천 7백 명을 돌려보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하나님, 무서운 운명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사람, 저 사람, 선택된 사람과 거부된 사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개처럼 핥아먹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의 '조건'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물을 핥아먹는 것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것 사이에 (물론 심리적 설명을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우월을 놓는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구원, 하나님의 선택이 물을 혀로 먹느냐, 무릎을 꿇고 먹느냐에 달려있다면 그러한 구원은 가짜일 것입니다. 우리의 격분을 살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주역을 담당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룩한 구원의 역사의 주역이 된 것은 "이스라엘의 공적" 때문입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적에 따라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들의 공적에 따라서 우리를 선택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이것은 비유적으로 1학년에 입학했을 그때 숫자를 32,000명에 비하고, 2학년에 올라가면서 떠나보내고, 3학년, 4학년에 올라가면서 300명으로 선택되는 이러한 과정으로 해석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 본문에 대해서는 주석적으로 여러 가지 풀이가 있을 수 있을 겁니다만은 저는 오늘 기드온의 군사의 수가 줄어가는 이 과정을 '소명(召命)의 형성과정'으로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서해석은 나도 처음이고 여러분도 처음일지 모릅니다).

소명이란 "책임의 장소"라고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삶이 만나는 곳, 소명의 과정입니다. 소명은 일회적이며 또 과정입니다. 바울처럼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은 형성되어 나가는 것이 소명입니다. 약한 데서부터 강한 데로, 애매하고 불확실한 데서부터 명백하고 확실한 자기로 성장하고 발전해 갑니다.

소명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곳에 열심을 낼 수 없습니다. 열심이 없는 곳에 소명도 자라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소명의 자리는 신학교육, 소명은 신학공부입니다. 1학년 때 입학한 신학생이 개학강연이나 개학 특별 집회의 몇 차례 강연을 듣고 신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신학에 흥미를 붙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소명은 질서있게 형성됩니다. 연령, 장소, 상황은 소명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로서, 노인은 노인으로서,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의사는 의사로서, 목사는 목사로서-소명이 다릅니다. 소명의 과정은 방법적으로 진행됩니다. 하나 하나의 과정이 채워져야 합니다. 신학의 소명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소명도 질서있게, 문법적으로 형성되어야 할겁니다. 여러 학생들에게서 소명에 대해서 참을 수 없고, 조급하게 서두는 말을 듣는 때가 많습니다. 1학년은 1학년의 소명을 채워야 하고, 2학년은 2학년의 소명을 채워야 하고 이와 같이 신학의 기초과목을 다 채워야 합니다.

1학년에서 대학원으로의 비약은 없습니다. 하물며 신학생으로부터 전문적 지도자로의 비약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신학의 소명은 신학의 기초과목을 거쳐서 대학원의 전문과목을 연구하는 것이 학문의 질서입니다.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얻는 교훈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 하나의 과정을 충실히 채우는 일이다"라는 것으로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기초과목은 그냥 그냥 시간을 채우며, 학점을 따서 졸업을 하고, 앞으로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고, 대학원에서도 석사학위나 따고 목회에 나가서 잘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명에는 비약이란 좀처럼 있기 어렵습니다. 기초과목 4년 또는 3년을 불충실하게 하고, 대학원 과정 2년 또는 3년을 불충실하게 하고, 목회에 들어가면 그는 불행하게 됩니다. 그는 불충실의 열매를 먹게 될 것입니다. 나는 사람의 교육에 있어서 과정의 하나 하나를 성실하게 채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무가 어려서 받은 상처는 커지면 없어질 것 같은데 커질수록 그 상처가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연령의 과정에서 받은 상처, 공허, 결핍, 병은 어른이 되어가며 더욱더 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신학생시절, 기초과정, 대학원과정의 소명을 껍데기로 지내고 후에 목회의 소명을 수행하려고 할 때의 비극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마다 설교단에 서는 때마다 그는 울게 될 겁니다.

2.

그러면 "물을 손으로 떠서 혀로 먹는 것"을 신학의 노력의 결정적인 과정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신학을 하는데는 두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평선(地平線)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수직선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연구(study)요, 하나는 기도입니다. 연구 없는 기도는 공허하고, 기도 없는 연구는 맹목적 일 것입니다. 이 두 뿔은 불가 분리하게 결부되어야 합니다. 이 두 뿔을 우리는 동시에 잡아야 합니다. 한 뿔을 놓치면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 한신대학의 신학 공부가 잡은 뿔은 어느 것입니까? 학문, 연구, 기도? 한 뿔도 잡지 못한 것은 아닌지요?

  그 경우에는 상처를 입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신학도들(우리 교수님들, 그리고 나 자신도 마찬가지)에게 가장 결하기 쉬운 것은 신학의 수직선적인 방향인 것 같습니다(제 경험이 그렇습니다).

신학적 작업의 첫째, 그리고 근본적인 행동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이 단순히 기도로서 시작하고, 기도가 동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학은 기도의 행위에서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은 신학의 특수성이다"라는 것입니다. 신학이 다른 학문과 다른 것은 '신학의 영성'에 있습니다(물론 신학의 영성에는 많은 체험이 요구됩니다만).

신학은 하늘에서 떨어진 학문이 아니고, 인간의 시도입니다. 신학을 하는 자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신학이 해야하는 과제 앞에서 신학도는 항상, 권태, 낙심, 불안 모든 위협 속에 있습니다. 인간의 학으로서의 이 <신학의 門>이 깨트려지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신학적 인식, 학문적 탐구도 그 자체로서,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굉장한 노동입니다. 신학도들에게는 '안식일'이 요구됩니다(아마도 그래서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이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신학도들에게는 스포츠, 오락, 예술 등에 대한 관심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하늘로부터의 '빛'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스트레스의 심리적 해소가 아니라). 신학도들은 잠시동안 신앙의 지식(intellectus fidei)의 학문적 노동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타적으로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에서 우리는 잠시동안 우리자신의 노력들(efforts)로부터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신학도들에게는 세상으로 연결되는 뚫린 창문이 열려 있어야 하는 동시에 "하늘을 향해서 뚫린 창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야곱의 꿈과 같이 '하늘과 연결되는 사다리와 천사들의 노래, 이 축제와 하늘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자신을 떠나고, 우리의 신학연구를 떠나서, 그리고 우리의 사고를 떠나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은 지배하시는 분이다"라는 사실에 대해서 새로운 확신과 명백성은 얻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우리의 공부를 잊어 버리거나, 우리의 공부를 희생시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학 공부가 열매 없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조명 아래서, 따라서 하나님의 지배와 축복아래서 열매가 풍성한 공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about)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향해서"(toward)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을 하고, 또 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신학'(theos-logos)이란 '하나님에 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해석하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을 해석하고, 소개하는데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아직 제3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제3자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제2인칭으로, '당신'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에 대한 대화의 가장 강한 형태는 기도입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 '당신'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만 멀리서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과 말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있습니다. 신학은 나와 하나님 '당신'과의 말씀과 응답, 다시 말해서 기도 속에서 진행됩니다. '나-당신'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나는 하나님의 너가 됩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리니 문을 열어 주면 내가 그 집에 들어가 더불어 같이 마신다"- "더불어 같이", 이것입니다. 밖으로부터의 모든 하나님의 존재 인식이나 증명은 '문제'가 안됩니다. 신학은 암암리에든, 노골적으로든 대화(proslogion) 즉 '기도'가 되야 합니다. 신학이 이 대화가 되지 못하면 신학은 '나'의 자기독백이 되고, 가장 불확실하고, 약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3) 모든 신학적 노작은 모든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제사(헌신)의 성격을 가지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신학이 성서주석이나 조직신학의 문제에 관계하거나 교회사의 해명에 관계하거나, 기독교교육, 실천신학의 문제들에 관계하는데, 신학의 작업은 그것의 모든 차원들(영역들)에 있어서 제사(offering)입니다. 이 제사의 행위에서 지금까지 얻어진 모든 목적, 모든 지식, 지금까지 실천하고 가치가 증명된 방법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넘겨져야(드려져야)하고, 전적인 제사로서 그에게 드리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기도의 행위는 '나'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참으로 힘있고, 생명 있는 신학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 항복(surrender), "내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기도, '나'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3.

신학적 소명의 과정은 결국 신학의 대상에 대해서 '나'의 이 숫자가 줄어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나의 재무장'(rearmament)이 아니고 '나의 무장해제'(disrearmament)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그렇게 기분 좋은 말로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4년, 3년 또는 6년 동안 신학을 하는 동안에 고려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재무장이 아니라 우리의 무장해제, 우리의 무장에서 해방이 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4년, 3년 또는 6년 동안에 우리 자신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것'으로 "풍부해지고",  어떻게 우리가 철저한 복종의 사람이 되는가? "나의 뜻이 아니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옵소서"에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다 하는 사실을 내가 허락하는 것"이라고 Tillich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것으로-우리가 이것을 '허락'할 수 있는 데까지 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빌립보서 말씀(3장)과 같이, 우리가 붙잡으려고 애쓰는, 인간의 신앙적 노력, 인간의 지적노력, 이것은 곧 '하나님께 붙잡혀지'는 노력이요, 과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신앙의 힘의 승리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 안타까운 인간의 노력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주신 그의 권세, 그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인식은 Cogito, ergo sum이 아니고, Cogitun, ergo sum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알려지고, 발견되고, 소유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약함"이라 했습니다.

신학의 과정은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과정은 하나님께 붙잡혀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히는 과정, 하나님에의 항복은 쉬운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무장해제는 피와 땀을 흘리는 겟세마네의 (투쟁) 애씀이 따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일,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 그것입니다 : "아버지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십자가를 지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얼마나 피나는 <자기와의 투쟁>이 있어야 하는 지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르트는 그의 신학자로서의 출발에서부터 슐라이에르마허, 하르낙 등과의 수많은 논쟁을 해야했고 신학적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싸움이 다 끝나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싸워온 것은 슐라이에르마허도 아니요, 자유주의 신학도 아니요, '나 자신'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헌신된(바쳐진) 사람, 즉 하나님이 완전히 그의 지배를 행사하는 곳, 거기에서 기드온의 300명이 미디안의 큰 군대를 부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디안의 메뚜기 떼와 같은 군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헌신된) 300명의 소수자의 문제입니다. 세속문화, 무신론, 성공주의 등의 악마들이 메뚜기 떼와 같은 현대적 미디안적들입니다. 과연 무서운 적군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300명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미디안군을 군대의 수를 가지고 대항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33만 2천명의 문제가 아니라 1000명, 800명, 몇 만 명이 된다는 신학생의 수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소수자',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소수자',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는 '소수자'가 문제입니다.

철저히 결단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소수자들이 미디안의 큰 군대보다 강합니다. "악마가 비록 기왓장처럼 많다고 해도 두려울 것 없다. 내주는 강한 성이다": 마르틴 루터는 말합니다(소수자는 하나님이 선택된 무리입니다).

기독교는 '소수자'로서 출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유대교 속에서도, 헬라문화 속에서도 기독교는 소수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소수자는 강했습니다.

오순절의 제자들, 그들의 용기, 그들의 능력, 그들의 확신, "내가 사람의 말을 듣겠는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돌에 맞아 죽으며 하나님을 찬미한 스데반-이 확신과 이 힘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된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소수자는 마치 창끝과 같다'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역사에 구멍을 뚫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대중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창끝, 이 소수자, 철저히 하나님께 바쳐진 소수자를 통해서 인류의 원수, 큰 미디안을 무찌르시고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심기 위해서 바른 이 소수자를 찾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하는 사람이 어찌 많겠습니까? "세계의 희망은 소수자들 속에 있다"고 Fosdick는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있는 미디안은, 세속적 문화요, 구조악이요, 기술문화의 형태요, 정치와 경제와 인간의 욕심이 결합된 세력입니다. 기왓장처럼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많은 현대적 미디안 앞에서 헌신되지 않는 자,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은 자, 확신이 없는 자, 주저하는 자, 이기주의자들이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희랍신화에 나오는 거인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어떤 힘있는 사람도 이 거인을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는 어떤 사람이 이 거인의 한 발을 땅에서 떼게 하는데 성공하자 이 거인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두발로 단단히 서있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헌신된 <소수자>, 오늘 우리의 신학교육의 과제는 이 <소수자>를 키우는 문제라고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천명을 남겨두었다"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약속하시고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요한복음 16:33)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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