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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상유지를 거부하는 신앙인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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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하고 500여명의 교인이 나오는 가운데 평안하게 목회를 하고 있었답니다. 교인들이 교인 많아지면 복잡해지니 더 이상 전도할 것도 없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대로 살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답니다. 목사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목사님이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본문으로 “현상 유지를 거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였다니다. 너무나 성도들이 잘 아는 성경 본문이고 성도들이 오랜 동안 현상유지를 즐기고 있어 설교 처음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강대상에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목사님이 배탈이 났다고 합니다. 예배 인도를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되었답니다. 예배 도중에 설사를 하면 큰 일이라고 생각하고 강대상에 올라갔답니다. 목사님께서 한참 설교를 하시다가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가야할 처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급해서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하며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가셨다고 합니다. 성도님들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어서 웃음을 참지 못하였답니다. 목사님께서 빨리 볼 일을 보시고 오시기를 성도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음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서 성도님들은 더욱더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합니다. 교회 스피커에서 “주여”라고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무선 마이크 핀을 안 빼고 그냥 볼일을 보신 것입니다. 설사하시는 목사님의 화장실이 생 방송되고 있었으니 얼마나 웃었겠습니까?

볼일을 다 보시고 오신 목사님은 분위기가 이상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교인 중에 한 분이 "목사님 다음에 볼일 보러 가실 때는 무선 마이크 핀을 빼고 가셔요" 라고 했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번뜩 설교 처음 시작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제 내장은 현상 유지를 거부합니다. 모든 생물은 현상 유지를 거부합니다. 현상 유지를 부정적으로 거부하면 쇠퇴와 파멸 죽음이 있습니다. 현상 유지를 부정적으로 거부하면 발전이고 승리고 삶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신앙인은 현상 유지를 거부합니다.

1. 먼저 우리는 부정적인 삶의 조건에 현상 유지를 거부합니다.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하가랴입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흑암'이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포로로 잡혀 오면서 아들을 낳은 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이름을 지어 준 것같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재산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부를 찾아 이민 온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 때 강제로 이주해 온 것입니다. 에스라처럼 제사장 가문도 아닙니다. 스룹바벨처럼 다윗 혈통의 가문도 아닙니다.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땅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이름을 '느헤미야'로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또 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니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셨다'입니다. 아주 신앙이 좋으신 분 같습니다. 그 암흑한 시대에 아들을 낳으므로 하나님이 위로해 주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미국으로 이민간 분들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대학을 나와 대기업을 다니시고 대단한 직장과 직책들을 가지고 살았지만 미국가면 세탁소를 하고 주유소에 나가고 신문이나 우유를 돌리고 슈퍼마켓을 하며 한 주일 벌어 한 주간 먹는 고단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직 희망이 있다면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하인즈 워드를 보지 않았습니까? 갖은 고생하며 아들을 기른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잘 되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니 과거의 모든 쓰라림이 보상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민 가서 고생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이 잘 자라 미국에서 상류 사회에 들어가 출세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아마 느헤미야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아버지와 자신의 환경을 보고 젊은 시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인생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포로로 끌려와서 정착한 땅이지만 지배 계층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불행한 자신의 삶에 대한 현상 유지를 거부하였습니다. 억압과 지배를 받으며 가난과 고통 가운데 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1절에 보니 그의 근무처는 수산 궁입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했는데 바로 페르시아 왕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지금 말하면 청와대입니다. 그의 직책은 술 맡은 관원입니다. 왕의 비서관입니다. 언제 독살할지 모르는 고대 사회에서 이방인 출신에게 자신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맡겼다는 것은 왕의 대단한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신뢰를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맡길 정도이니까 무엇을 맡겨도 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분에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신분상승의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출생, 결혼, 실력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출생이 신분 상승의 최대의 지름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지름길은 결혼입니다. 느헤미야는 출생도 아니고 결혼도 아닙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신앙이 철저했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 신분이 상승되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력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실력을 쌓았을 것입니다. 이방 나라에서 자신이 힘을 길렀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원망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실력을 쌓아 현상 유지를 거부해야 합니다.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재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도 있어야 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대한민국 파워엘리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 거의 모든 분야의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3만 1,800명을 분석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실력창의성대중성여성”이라는 미래 엘리트가 되기 위한 4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존 어데어가 지은 “위대한 리더들 : 잠든 시대를 깨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리더들이 소개되는 데 이상적인 리더 소크라테스를 소개하면서 리더십의 핵심은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리더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권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신분이나 지위로부터 나오는 권위, 사람됨으로부터 나오는 권위, 그리고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를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지식 정보시대입니다. 현상 유지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출세하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는 것이 죄악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왕자가 되었고 목동으로 전락되었지만 80세에 민족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고 도망자였지만 그는 왕이 되어 한 시대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루터가 교수가 아니고 농부였다면 종교개혁이 가능했겠습니까? 큰 영향력을 미치려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없다고 탄식하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우리가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 공부를 하지 않는가? 인물이 없다고 탄식하지 말고 네 자신이 인물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 중에 느헤미야와 같은 인물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거부하는 인물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인물이 되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인물이 될 만큼 실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도 보십시오. 순전히 자기 실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느헤미야의 형통의 비결을 볼 수 있습니다. 2장 8절을 보십시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느 2:8)”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느 2:18)”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살인 방조자 바울이 1세기를 움직이는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포로된 여인 에스더가 민족을 살리는 왕비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버림받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죽음의 위기에 처한 다니엘이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리에 오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인생이 역전됩니다. 역사상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보십시오. 링컨, 헬렌켈러. 칼빈, 루터, 처칠, 워싱턴 모두다 좋은 환경 좋은 조건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구자로, 초등학교도 못 갈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2. 우리는 무엇인가 이룰 때 삶의 안주에서 현상 유지 거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초라한 삶에서 화려한 삶으로 나아가면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 하나 출세하고 조금 나아가면 가문의 영광으로 인생을 안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한 시대 쓰임받는 사람들은 삶이 풍요로워졌을 때 현상 유지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출세하여 술맡은 관원장이 되어 살고 있을 때입니다. 지금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비서가 되어 근무하면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왕을 매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안정된 직장입니다. 적당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남부럽지 않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나온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자식이 백악관 대통령이 비서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4년 임기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하는 왕의 비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1차 귀환과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 하나니는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동생이 몇 사람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고국의 소식을 물어 보았습니다. 동생은 좋지 않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3절에 보십시오.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은 소화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1차 2차 귀환한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성벽 복구를 시도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백들을 매수하여 왕에게 탄원서를 보내 성벽 건축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벽 건축이 중단이 되어 버렸고 성문을 불이 타고 성벽은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만약 우리 성도님이 이런 상황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 느헤미야는 바로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금식하며 기도했겠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종으로 형통하여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떤 은혜이겠습니까? 2장 5절을 보십시오. 유다 땅으로 보내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게 느헤미야가 가졌던 생각입니다. 무너진 성을 중건하기를 원했습니다. 민족을 살리기 원했습니다. 민족에게 희망을 주기 원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명예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의 신뢰가 자신의 부가 민족을 살리는 희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나와 나의 가문의 영광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을 살리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임받기를 우원했습니다. 안락한 현상유지를 거부했습니다.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명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출세하고 가문의 영광만을 위한 삶의 현실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에게도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안락함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사용하여 민족을 일으킬 것인가?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을 때도 이스라엘 민족이 죽음의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그 때 망설이고 있는 에스더에게 모르더개가 무슨 말씀을 합니까?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 4:13-14)” 에스더 너에게 권력을 준 것은 이 때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 네가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종교 부지가 되고 교회를 지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담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현상 유지를 하고 싶을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 생활하며 교회를 하나 짓는다는 것 얼마나 복된 일이며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기회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이 때를 위해 나에게 지식을 주었고 이 때를 위해 나에게 물질을 주었고 이때를 위해 나에게 사회적인 지위를 주셨다고 생각하며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쓰임 받으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지은 교회에서 행복하게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 해외에 100교회를 짓는 것 부담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빈국 만명의 어린이를 돌로는 것 사명으로 바다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소년 소녀 가장을 돌보는 것 부담이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로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주신 기회, 사명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아니면 여호수아를 사용해서도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민족을 이끄시는 하나님입니다. 쓰임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무너지 성벽을 재건하는데 쓰임받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는 무너지 도덕을 회복하고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 무너진 민족을 회복하는데 쓰임받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되면 되고 나라야 어떠든 내 가족만 안전하면 되고, 다른 기업이야 어떻든 내 기업만 잘되면 되고 내 지역만, 내 정당만 이익을 보면 된다는 함께 망하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나도 살지만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에게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선물을 아버지보다 더 좋아한다면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기꺼 생각한다는 것이 자신과 자기 집안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섭섭하게 볼 것입니다.

주님은 최고의 강령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상황윤리를 쓴 죠셉 플레쳐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했습니다. 미움은 존재를 인정하지만 무관심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개인 이기주의, 지역 패권주의, 가족 이기주의, 기업 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느헤미야에게 번민이 없었겠습니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됩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편안히 쉴 수 있어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이 희생하였습니다. 자신이 헌신하였습니다. 자신을 드렸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어두울 지라도 밤하늘의 별은 어두면 어두울수록 더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같은 사람이 이 땅에 있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같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힘이 없어 다른 나라에게 노예처럼 살고 있는 백성, 예배의 처소마저 파괴되어 삶에 희망을 상실한 민족에게 느헤미야는 희망을 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무너진 곳이 너무 많습니다. 정치, 경제, 도덕, 질서, 자존심, 가정, 교회, 학교가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3.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의 현상 유지를 거부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과 자기 가족의 일입니다. 나 출세하고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현상 유지 기도도 좋지만 그것을 거부할 때 신앙은 성장합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십시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했습니다. 수일 동안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가는 길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의 배고픔을 내 배고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남의 질병의 고통을 내 질병의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힘들어 어렵드래도 내가 짊어져야 할 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초라함을 내 초라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초라함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나는 화려한데 하나님의 성전도 화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금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금식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슬퍼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국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국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조국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형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왕이 왜 이렇게 근심이 많냐? 고 물어 볼 때 그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3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적어도 4개월을 기도했습니다. 이말을 들은 때가 기슬월입니다(11,12월). 그리고 왕 앞에 나간 때가 2장 1절을 보십시오. 니산 월(3,4월)입니다.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리고 그는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역사에 대하여 열린 눈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철저하게 연대의식을 가집니다. 모세가 그랬듯이 에스라가 그랬듯이 바울이 그랬듯이 민족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회개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자복하며 기도합니다. 주 앞에서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나 주님 보시기에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였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지평을 넓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상 유지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지만 이웃을 보면서 민족을 보면서 통회 자복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7절에 보십시오.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합니까? 5절에 보십시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문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두렵습니다.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언약을 받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언약에 근거하며 종의 기도,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의 기도를 들어 다라고 기도합니다. 이일을 이루는데 형통하도록 기도합니다. 왕의 은혜를 입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장 6절 이하를 보십시오. 왕이 보내기를 즐겨합니다. 이 왕은 변덕이 심한 왕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보내 주기를 즐겨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국경을 통과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여권을 만들어 줍니다. 성을 지을 재료까지 허락합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기도를 통해 응답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했는데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었습니다. 교회를 짓는데 나는 아무 것도 없어 그저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다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능력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해냅니다. 기도회 때 기도를 지루하게 생각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와 내 가정만 위해 기도하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의 지도자들은 기도의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차원 높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의 위험 앞에 있는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금식하며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더 4:16) 그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어 죽음 앞에 있는 유다 민족을 살려 주었습니다. 삶의 지평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내 문제만 보지 말고 이웃의 문제 하나님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범죄할 때 차라리 자신을 죽여주고 백성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출 32:32)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지언정 내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루과이의 한 작은 교회의 벽에 이런 주기 도문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나 혼자만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고 높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우리는 기도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기도의 현상 유지를 거부해야 합니다. 내가 안락하다고 내 기도할 것 없다고 안주하지 말고 이웃의 아픔을 위해 민족의 고통 위해 교회의 미래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지옥에 가는 한 영혼을 위해 느헤미야처럼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불행한 삶의 조건 앞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출세하고 명예와 부를 쌓았을 때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늘 민족의 해방을 마음에 품고 살 듯, 다윗이 평생에 성전건축을 마음에 품고 살 듯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회복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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