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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라! (눅 13:29~30, 잠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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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성경에는 연회라는 말은 아름답게 쓰이질 않았습니다. 인간의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흥청망청 또 망청”의 목적으로 모이는 모임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잔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잔치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잔치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잔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잔치가 있기도 합니다.

나발과 같이 죽음에 이르는 미련한 자의 잔치가 있고(삼상25:36), 원수 하만을 목매다는 에스더가 베푼 잔치가 있기도 합니다(에7:7).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1000여명의 만조백관을 모아놓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큰 잔치가 있기도 합니다(단5:1-31).

성춘향 전에도 재미있는 잔치가 소개됩니다. 성춘향 전에 변사또가 큰 잔치를 베풀고 고을 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춘향이를 수청 들게 하는 목적이었으나 자기의 곤장을 재촉하는 잔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로 주님을 초대하는 목적으로 베푼 잔치가 소개됩니다.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가정에서 주님을 초대하는 잔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천국을 혼인잔치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잔치”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열리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하루하루가 초상집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초청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같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면 하루하루가 잔칫날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하루하루가 잔칫날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잔칫날이 될 수 있습니다.

1. 잔칫집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눅13:24)

잔칫집에는 사람이 많이 들락거려야 합니다. 왕래가 잦아야 합니다. 오고 가고, 가고 오고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남의 잔치는 소홀히 하면서 자기 집 잔치는 챙겨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자기 집 잔치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의 삶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국 백성은 남의 잔치부터 먼저 챙겨야, 남도 나의 잔치를 챙겨 준다는 말씀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남의 일에 부지런히 쫓아다녀야 합니다. 장례식, 결혼식, 병문안, 우환질고를 당한 자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같이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으로 “거저 주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자기를 위해 심는 것입니다.

전도서 11:1-2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누어 주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한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일곱은 내가 당연히 나누어 주어야 할 자를 말합니다. 여덟은 내가 꼭 나누어 줄 의무가 없는 자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 백성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항상 잔치만 있습니다. 그러한 나라에 들어가기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칫집은 좁은 문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허들 경기와 같습니다. 찾는 이들이 적습니다. 별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칫집문은 느닷없이 닫힙니다. 예고도 없이 닫힙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닫힙니다. 사람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의 시간에 맞추어 턱받치고 있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열려있는 시간이 세상적인 시간, 인간의 시간으로는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지체하고 핑계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곁눈질 할 겨를도 없습니다. 노닥거릴 여유는 더욱 없습니다. 게으름 피울 짬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하게 됩니다.

교인들은 세상적인 시기는 많습니다. 정욕적인 질투는 강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샘이 너무 없습니다. 신령한 야심이 한결 부족합니다. 다른 이들은 영적인 잔치에 동참하여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삼손과 같이 세상적인 죄악의 잠을 자고 있습니다. 천하태평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조만간에 영적인 고뇌와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일단 잔칫집에 들어가야 마음이 즐겁습니다. 주님을 모신 잔칫집을 말합니다. 주님을 모신 잔칫집은 가정, 교회, 선교모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모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2. 잔칫집에서는 말석에 앉아야 합니다.

잔칫집에서는 자리 때문에 즐겁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합니다. 잔칫집에서 상석에 앉아 안절부절하는 것보다는 말석에 앉아 마음 놓고 즐기는 것이 훨씬 더 났습니다. 잔칫집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기분 상하게 되는 이유가 다 자기 중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자존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상좌에 앉지 말라”(눅14:8)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좌에 앉았다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올 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눅14:9)고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눅14: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잔칫집 기분이 아니라 초상집 기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한 잔치행차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닙니다. 높은 자리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자리입니다. 높은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즐거운 자리, 유쾌한 자리가 못됩니다. 기분잡치는 자리요, 신경 쓰이는 자리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다윗의 시신을 모셔놓은 궤라는 것을 카버를 씌워서 안치해 놓았습니다. 궤옆에는 빈 의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모세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 자리는 높은 자리, 상석, 상좌라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의 강단 중앙에는 빈자리가 항상 있었습니다. 어떤 외부 목사님이 그 교회 강단에 올라가서 그 자리에 앉았다가 당회장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라

<다윗의 시신을 모셔놓은 궤>  고 하더랍니다. 강당 중앙의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가 아니요 당회장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자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았을 때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눅14:9)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석에 앉으라는 말씀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go and sit down in the lowest room, eis ton eskaton topon, "in the last place)”(눅14:10)고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높은 자리를 체념하라, 차라리 낮은 자리, 끝자리를 잡으라”는 것이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천국시민의 윤리 의식입니다. 그게 속편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잔칫집에 가서는 자기를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잔칫기분이 오래갑니다. 자기를 의식하게 되면 반드시 섭섭하게 되고, 기분잡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칫집입니다. 교회는 잔칫집입니다. 내 자리, 네 자리 따로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같이 자리다툼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먹을 것 내가 먹고, 내가 받을 은혜 내가 받으면 됩니다. 상좌에 앉으려고 자리다툼하는 것이 얼마나 꼴사나운지 알아야 합니다. 

자리다툼하는 곳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잔칫날이 아니라 전쟁과 투쟁과 싸움의 날이 되고 맙니다. 

3. 잔칫집에서는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예의가 사라진다면 사회나 조직은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예의가 있는 곳에 웃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의가 상실된 곳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불쾌함이 있을 뿐입니다.

상가에는 상가에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상가에 합당한 옷, 합당한 말, 합당한 행동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상주와 유족들에게, 조객들과 교인들에게, 심지어는 고인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혼인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인집에서는 혼인집에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혼인하는 날은 혼주 중심의 날입니다. 신랑 신부의 날입니다. 그들을 화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들의 기분을 살려 주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가끔 하객들 중에는 자기 위주의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절대 금물입니다.

혼인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식에 동참하는 겁니다. 얼굴 내밀고, 축의금 접수하고, 식사하고 그냥 사라진다면 가 중요한 예식에 동참하여 축하하며, 축복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우선순위를 지키는 교양과 예의가 필요합니다. 교인들은 혼인식의 예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수준 높은(high level) 예법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주일에 혼인식을 하는 경우에는 무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시해서는 안 될 자리라면 미리 찾아보고 축금을 전달하고, 미안함을 전하면 대개는 이해하고, 양해하고, 고마워합니다. 주일 지난 후에 찾아보면 축금을 조금 후하게 전하고 사과하면 서운함은 이내 풀리고 맙니다.

설익은 교인들은 주일을 일요일로 알고 뻔질나게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켜 냅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주일에는 결혼식보다 더 급한 장례식도 집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혼인 잔칫집과 같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 나라의 임금이 “❶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❷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❸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2: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혼주가 되는 왕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향해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유구무언이어늘”(눅22:12)라고 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자는 그 이유를 대지 못했습니다. 예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왕이 사환에게 이르기를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22:13)고 명령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하객이 아니라 혼인집에 재를 뿌리는 심술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혼인도 혼인이지만 자기 자신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수족을 결박당하여 어두움에 던져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혼인집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으므로 큰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잔치만 벌이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혼주이시고,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교회는 그의 신부입니다.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는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최소한의 예의와 예절이 필요합니다.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잡담을 하거나, 할일 없이 들락거리거나, 귓속말을 주고받거나, 찬송을 성의 없이 부르거나, 말씀을 선포할 때 졸고 있거나, 헌금을 성의 없이 하거나, 늦게 오고 일찍 나가거나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잔치중의 잔치 의식인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예배가 몸에 배어야 합니다.

4. 하루하루가 잔칫날이어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하루하루가 초상치는 날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하루하루가 잔칫날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15-24절에서 어떤 사람이 큰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자들은 일치하게 사양했습니다.

하나는 새로 산 밭에 나가 보아야 겠다는 겁니다. ❷또 하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 하므로 못 오겠다는 겁니다. ❸또 다른 이는 장가들어 못 오겠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살만한 사람들은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아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주인에게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눅14:21), 실업자들(눅14:23)을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종이 주인의 시키는 대로 하여 그러한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잔치는 거지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병신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소경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자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실업자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밭을 사서 못 오겠다고 하던 자는 조만간에 거지가 되고, 잔치에 참석하여 떡을 먹고 잔치 맛을 본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됩니다.  결혼하여 신혼여행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던 자는 낭패를 당하고, 소경과 절름발이는 오히려 건강을 회복하여 장가가고 시집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상업하는 일 때문에 거절하던 자는 이내 부도가 나고, 실직하여 노닥거리던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고 취직하여 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아무나 초대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초대할 때에는 절대 세상의 그 무슨 이유로도 핑계치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핑계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슬프게 만듭니다.

전도서 3:1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습니다.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눅13:25)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칫집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칫집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닫혀 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평상시에 확실하게 해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유사시에 신앙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신앙생활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은 유고시에는 불신자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끝맺는 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5:15절에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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