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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해방시키시는 하나님 (사 43:4~7, 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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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리 시대의 개념어 가운데 ‘유비쿼터스’(Ubiguit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 시대는 이제부터 ‘e’ 시대가 아니라 ‘u’ 시대라고 말할 만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1991년 미국의 마크 와이저박사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기계에 컴퓨터가 장착되어 있지만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술이 배경으로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새로운 개념은 ‘deus ex machina’, ‘기계로부터 튀어나온 신’이란 개념에서 이미 알려졌습니다.

  기계로부터 튀어나온 신이란 결국 기계가 신입니다. 컴퓨터가 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곳에 보이지 않지만 컴퓨터가 있다는 말을 신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제 사람들이 기계의 노예가 되고 컴퓨터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컴퓨터가 신이 되는 시대이며 인간이 컴퓨터의 노예가 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자유로운 시대에 사는 것 같지만 반면에 무엇엔가 종살이하며 삽니다. 해방된 것 같지만 기계, 기술, 정보 등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가 없이는 누구나 노예의 삶을 삽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이 나자 각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같은 해에 필리핀도 독립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후에 세계는 소위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각국의 독립이 이어졌습니다. 인도는 1947년에 독립하게 되어 47이란 수를 잊지 못합니다.

  미국은 ‘76’이란 수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1776년에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지금 그 종은 필라델피아의 시의사당에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 종에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는 미국의 정신이기 전에 성경의 정신이고,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한지 벌써 59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민족은 완전한 해방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광복은 문자적으로 빛을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일제 강점 시대에 우리에게는 빛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주권을 잃으면 빛을 잃습니다.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빛을 주시고, 회복하시고, 밝히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광복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가 있습니다. 31절과 32절에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33절에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34절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종의 자리에 있으면서 종인지 알지 못합니다. 죄의 종은 가장 심각한 종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받는다”는 말과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란 “풀어준다”,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입니다. 해방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해방의 참 의미를 살피고 자유를 얻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해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내가”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등입니다. 이 말은 해방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하나님이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해방이 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왜 하나님이 해방하십니까? 하나님은 해방자이십니다. 반면에 죄는 방해자입니다. 성경은 이 곳 외에도 여러 곳에서 “내가 하리라”, “내 손에서 너희가 하나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해방의 주체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역사의 축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주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4:18에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자유하게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직접 들어오신 이유입니다.

  새는 공중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물속에서는 죽습니다. 고기는 물 속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모래위에서는 죽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하나님 밖에서는 죽습니다. 죄와 더불어 살면 자유가 없습니다. 이미 죄의 종인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인생의 처음 25년 동안 나는 자유를 갈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를 추구했다. 그 다음 25년 동안 나는 질서가 곧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그 질서 안에 참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질서를 알고 자유를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길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려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를 원하지 말고 옳은 일을 해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 교육 철학자인 피터스(R. S. Peters)는 자유의 역설을 얘기했습니다. “작은 자유를 버릴 때에 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육신의 자유 버릴 때 큰 하나님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자유와 하나님의 자유를 동시에 둘 다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할 때만이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란 하나님 안의 거룩한 부담감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자유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해방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4절에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해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보배롭고, 존귀하게”라는 말도 사랑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보낸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절대로 보내지 않아요. 몸은 보내도 마음은 보내지 못해요. 사랑이란 나에게서 해방이 아니라, 나와 하나 되기 위한 다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손에서, 죄로부터 해방하겠다고 하십니다.

  최근 우리의 주변 정세를 보세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알고 보면 우리나라의 통일 후를 포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통일 후가 되면 조선족 문제나 자치주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나라의 힘이 생기면 만주도 우리의 것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먼저 고구려가 자기의 고대 역사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런 중국의 역사 왜곡은 주변국의 자존심과 심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강대국 사이에서 당한 설움이 그 얼마인데 또다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강점의 진심의 사과나 양해 없이 독도를 자기 땅으로 우기는 이웃 나라입니다. 저는 억울한 심정에 “원교근공”(遠交近攻)이란 목회서신을 썼습니다. 먼 나라와 교제하고 화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라는 말입니다. 먼 나라와 화친해야 하는데 미국도 점점 멀어지고 있고 어느 나라와 교제하고 화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고립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도 낳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세계적 정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변국의 시달림이 끊임없는 것이 이스라엘의 당시 형편이었습니다. 주변의 강대국인 애굽, 앗수르, 로마, 불레셋 등은 쉴 새 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침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십니다. 무슨 까닭에 그렇게 하시지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이 이유였습니다. 사랑이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구하신 하나님 편의 이유였습니다. 정말 “사랑이 뭐길래?”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받는 민족이 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받으면 끝납니다. 하나님이 끝내 주십니다.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주변국이나 강대국들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아기들처럼 예쁜 짓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쁜 짓 많이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합니까?

  지난날의 해방의 역사를 보세요. 일본은 교만이 극도에 달해 무모한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일로 미국을 태평양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해방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독립투사들이나, 교회의 역할이나, 선교사들의 공이나, 국제적 도움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결정적 계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서 살 때에 비로소 해방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유를 버릴 때 비로소 자유함이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홍수로 모든 생물이 다 죽었지만 방주 안은 자유하고 평안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품입니다.

  요한일서 4:8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예례미야 31:3에는 말합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하나님은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해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받으며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바람이 바람개비를 돌리듯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을 빌어 당신의 삶을 풀어가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싫어할 일을 시키시기에는 너무나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사랑하시면 처음부터 구류당치 말게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랑한다면서도 구류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면 그것은 벌을 주셔야만 하기 때문이요 그분의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똘똘 뭉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심치 말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해방은 하나님의 지으심 때문입니다.

  7절에는 말합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창조한 자라고 합니다.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같은 의미의 세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조성, 완성의 세 단계 의미한다고 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야곱아”라고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야곱과 70인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는 평안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세워지자 이스라엘은 종살이의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십니다. 이 과정에서 애굽인들은 모진 재앙의 경험을 합니다. 장자가 다 죽습니다. 바로의 병거가 이스라엘을 추적하다가 홍해에 수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애굽을 그렇게 망하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을 지었다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고 애굽을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손으로 빚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있으라”고 하셨지만 사람은 정성껏 손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과 정성이 담긴 피조물이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좋으시다면 하나님은 절로 보호하시고,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2에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입니다.

  제임스 에이지는 인간을 날개가 땅에 못 박힌 성난 천사로 묘사하였습니다. 날개가 땅에 못 박히면 자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못은 땅에 박힌 속박의 못을 빼내고 자유하게 만드시는 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은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결론

  1세기 철학자요 노예인 에픽테투스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주인에게서 해방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에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우리 편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국론이 분열되고 일본에 편입되게 결정했던 시절을 참회합니다. 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정한 때를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의 정치, 외교는 국론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듯합니다. 무슨 주제든지 국민들의 생각은 완전히 나뉩니다. 이런 분열로 다시 세상의 종의 멍에를 맬까 두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자유함 가운데서 자유를 얻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일치하고 단결하여 이제는 완전한 국토, 국론의 통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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