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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덕 부리지 맙시다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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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변덕(變德- 이랬다저랬다 하여 변하기를 잘하는 일, 또는 그러한 성질.) 부리지 맙시다
본문 : 다니엘 3:13-18절

"느부갓네살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 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 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유대나라 ‘여호야 김’ 왕 때에 유대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도구로 쓰임을 받았는데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은 유대나라 왕족과 귀족, 학문이 있고 재주 좋은 사람들을 많이 사로잡아다가 바벨론 문화를 가르치고,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것은 ‘유대사람을 바벨론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동화정책’이었습니다. 그 중에 바벨론 신을 섬기던 제물을 먹어야 하는 위기에서 믿음으로 극복하기는 하였지만??‘신앙적 혼합주의’의 위험에 노출되어온 포로들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 겠기던 많은 사람들은 목숨이 두려워 신앙의 절개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명의 친구는 이런 유혹과 목숨을 건 위기 속에서도 절대로 말려들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니엘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 네 사람이 그러하였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탁월했던 그들은 지배국에 들어가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는 출세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모진 시련의 바람이 휘몰아쳐 옵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축복과 시련을 함께 주실 때가 있습니다. 가끔 축복은 시련이라는 보자기에 담겨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이 찾아올 때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울 임금’은 ‘골리앗’ 앞에 섰을 때에 골리앗은 덩치가 너무 커 무찌를 수 없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물맷돌 5개를 가지고도 골리앗은 덩치가 너무 커 내가 적당히 던져도 맞겠구나. 그래서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합시다. “실패자는 문제가 너무 크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성공자는 문제가 클수록 성공도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와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벨론 성 남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두라 평지’에다가 건물로 다지면 약 7층 높이에 달하는 커다란 느부갓네살 모습의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막식 날부터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 신상 앞에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 “왕명을 어기면 활활 타오르는 풀무 불에 넣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드디어 제막식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악기소리에 맞추어 왕명에 따라 금 신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하늘을 찌르며 위용 있게 세워져 있는 바벨론 우상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는 타협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전승국 대군주의 무서운 권위 앞에 서 있는 패전국의 젖비린내 나는 청년 포로들이 감히 무엇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바벨론의 권위보다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 할 줄 알았고, 느브갓네살의 왕좌보다 하나님의 보좌를 더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았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비서새’가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하늘을 곧잘 날고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벌레를 잡기도 하고 또 노래를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위기를 만나게 되면 날개가 꽁꽁 얼어붙고 온몸이 마비가 되어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된다.’고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데 꼭 ‘비서새’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감사도 잘 하고 찬양도 잘하고 곧잘 예배도 드립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를 만나곤 합니다. 우선 삶이 너무 평안할 때, 우리는 영적인 무관심과 영성 마비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반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등반가의 진가는 야산을 오를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험산 계곡을 지날 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흉흉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큰 재목은 큰 연장으로 다듬는 법입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엔 아이들이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열매가 많은 나무일수록 많은 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큰 신앙인 일수록 큰 시련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큰 시련, 큰 도전이 찾아올 때 “야,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시려나 보다.”라고 기뻐하며 시련을 맞이해 보십시오. “야, 사탄도 나를 알아보는 구나!”라고 오히려 기뻐해 보십시오. 문제를 두려워하지도 말고 회피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이 세 청년의 선택의 기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시시때때로 부딪히는 갈등과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도 잃지 않고, 바벨론의 왕좌도 버리지 않는 회색지대가 없을까? ' 생각하고 눈치를 살피곤 합니다.

이에 대해 「라블레」라는 신앙인은 “두 의자 사이에 함께 앉으려 하다가 땅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세 주인공은 우상 앞에 경배하는 길이 아닌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이글거리는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잘못된 물질주의 문화의 유혹 앞에 쉽사리 굴복해 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그 절개가 전혀 다릅니다.

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들과 모든 성도 여러분은 변덕부지지 않았던 이 귀한 신앙을 본받을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본받아야 할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첫째,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회유하며 말하기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에 대한 청년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16절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의 뜻은 ‘양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말로 대화해서 문제를 풀어갈 때가 있고, 행동으로 말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여, 이것은 탁상공론을 하거나 타협해야할 문제가 아닙니다. 말로 대답할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양심과 신앙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결의는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먼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길을 가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길 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어가신 자국마다 뜨거운 눈물 붉은 피 가득하게 고였구나.
눈물 없이 못가는 길. 피 없이 못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라는 복음 성가처럼 존경 받는 주기철 목사님은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양보해야 할 것은 양보하지 않고 당연히 양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너무나 쉽게 양보해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질과 자존심을 죽이지 못하여 우리자신을 쏟아내는가 하면, 반대로 도무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순결, 하나님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둔감해질 데로 둔감해진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을 봅니다.

우리를 유혹으로 이끌 때에, 우리를 타협의 광장으로 몰아갈 때에, 우리는 여기 세 청년처럼 단호한 결의를 보여줄줄 알아야 합니다. “이 일만은 양보할 수가 없소. 신앙 그 문제에 대해선 대답할 필요조차 없소. 나는 행동으로 말하겠소. 내 양심이 말을 하고 있소.” 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고 싶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고난 받는 것, 손해 보는 일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헌신 자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둘째,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신앙) 있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품무불 앞에 던져질 위기에 처한 청년들은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라는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건지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며, 또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현대 인간들을 굴복시킨 세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의 힘이요.
둘째는 권력의 힘이요.
셋째는 죽음의 힘입니다.

현대인들은 돈의 힘 앞에, 권력의 힘 앞에 절하고 고개를 숙여야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리기에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들은 우선 황금우상 앞에 자유 했습니다. ‘두라 평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황금우상! 그 앞에 임금과 모든 대신들이 절하고 있을 때 그 앞에 황금을 비웃듯 당당히 서 있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족도, 대 권력자도, 외국 대사도, 계급 높은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포로병에 불과했던 이들 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돈의 힘 앞에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현대 산업사회,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는 누가 물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느냐? 누가 물질을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물질에 굴하지 아니하고, 초연히 물질 앞에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은 권력 앞에 자유 했습니다. 전승국의 대 군주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내 인생의 진정한 주권자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임금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아니면, 정의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세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자유 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살기위해 몸을 더럽히고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꺾고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는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신앙이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었는데 범사에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도대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졌던 신앙은 어떠한 신앙이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이토록 당당히 자유 할 수 있었으며, 오늘 우리를 이토록 부끄럽게 만들고 이처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단 말입니까?

따라합시다. 그것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세 청년이 가진 신앙의 위대함은 그 다음 절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8절을 함께 보십시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저는 분명히 성경의 모든 풍성한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 신유의 능력을 믿습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넉넉한 재물을 허락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겠습니다. 영원히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시기에 변함없이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살기 원하시면 “아멘”합시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저기 이글거리는 풀무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시험과 환란과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건져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여!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가 풀무불 속에서 우리가 그대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죽어갈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신앙고백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청년의 믿음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었던 주님의 절규가 바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의 고백이 아니었습니까? “내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본문을 의역하면 “하나님이여! 이 풀무불 속에서 내 몸이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일찍이 칼빈은 “내가 지옥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지옥을 내려가는 길목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지옥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넉넉한 재물로 늘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가난을 허락해도 감사하겠습니다. 적은 것이지만 과부의 두 렙돈을 바친 것처럼 최선을 다해 하나님 사업에 드리는 되기 원합니다.” 이런 신앙 으로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이 가난 중에 살면서도 낙심치 않고 감사하며, 헌신하겠습니다. 고결한 신앙을 살며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부자 되기를 탐하지 아니하고, 이 가난한 중에 기쁨으로 주를 섬기겠나이다.” 라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SBS 방송초기 코미디 전망대 진행자 김경태 장로님은 말년에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죽기전날 가족예배를 드렸던 기도는 제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터인데 죽음을 두려워 하리이까? 하오나 이 고통이 너무나 극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술로 범죄 할까 두렵습니다. 못나도 장로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울까 두렵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고통 때문에 몸부림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까 두렵사오니 이 고통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이 고통 가운데도 당당히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사랑스런 내 자녀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그토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서도 당당히 아버지의 영광을 찬송하며 갈수 있었다는 기억을 남기게 해 주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주님앞에 감사하며 눈을 감고 싶습니다.”라고 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침상에서 병으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병상생활의 투병 중에서 내가 신앙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이 귀한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 헌신자의 삶입니다. 할레루야!

셋째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인 신뢰를 보냈던 이 세 청년을 하나님은 외면하셨나요? 아닙니다. 세 청년이 풀무 불에 던져지자마자 “불속에 뛰어들어 그들을 껴안고 구원하신 분”이 계십니다.

나를 살리려 십자가 불속에 뛰어들어 우리가 받아야 할 되의 심판을, 무거운 죄의 짐을 가슴에 끌어안고 활활 타 가셨던 성자 예수님은 영원토록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풀무불속에 던져진 세 청년은 놀랍게도 머리털 하나 상처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요.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불 속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세 청년의 신앙이 가져온 축복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마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28절 말씀 이하에 보면 이방 왕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 사 자기를 의뢰하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드디어 왕은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우선 금 신상에 절하라고 한 첫 번째 조서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공포하였습니다.

본문 29절과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더욱 높이니라.”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저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 청년을 풀무불 속에서 끄집어 내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며 기쁘게 순종했을 것입니다.

오늘 헌신 예배에 참여한 성도여러분! 눈을 감아 보시다. 제가 말할 때 각자에게 자문자답해 봅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지선’이라는 젊은 자매(78년생,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졸업)가 2000년 7월 30일 주일 오빠가 모는 마티즈 승용차를 타고 가다 용산 어느 지점에서 음주운전을 하던 갤로퍼 승용차에 치어 6중 추돌사고 후 차가 불이 붙는 바람에 화상을 입고 새까만 몸으로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넘다들다 겨우 살아 개설한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보는 순간 속을 뱉어 내는 한 마디가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저러고도 정말 살 수 있을까?’ 이지만 정작 본인은 당당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써내려 가는 감사의 글 중 극히 적은 일부입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온전히 남은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며, 글을 쓰며, 엄지손가락을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막대기 같아져버린 오른팔을 쓰며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귀 바퀴 덕분에 귀 바퀴란 것이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 주신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였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 다리가 불편한 이들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였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놀랍게 만드신 것인지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100만분의 1만큼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초라한 사람으로 대해지는 그 기분 또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테니깐요.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라고 바라보지만 “네. 이러고도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해주시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네! 저는 이러고도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한 몸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더 설교하겠습니까? 오늘 헌신 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들과 모든 성도 여러분들께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더라도" '변덕부리지 않겠다.'는 신앙으로 살겠다는 이 결연한 중심이 바로된 세 청년의 이 귀한 신앙을 본받아 참된 헌신자의 삶을 사시고, 승리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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