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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전 10: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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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전 10:23-11:1

1세기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그리스 최고의 도시오,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며, 많은 신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의 시장에는 풍족한 물자가 오고갔는데, 그중 오늘 말씀은 그 지역에서 오곡가는 고기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 고기들은 대부분 고린도의 신전에서 제물로 드려졌던 것들입니다. 그러한 고기들이 시장에 흘러나와 시민들이 사먹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이러한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문제나, 거리낌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는 이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를 교회에서 정식으로 논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분명 우상 신전 앞에 놓여졌던 고기라면 문제가 되고, 거리낌이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교회는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둘다 나름대로 논리와 이유를 가지고 ‘먹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를 논해야 했습니다.
우선은 일명 ‘강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혹은 양심적으로 강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비위가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이미 우상 자체가 의미가 없기에 그 앞에 놓였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주를 믿는 자들에게 주님만 의식하며 살기 원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중요하시 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참 신은 오직 하나님뿐이며,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 속한 것이기에 먹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닏.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먹어도 되다는 것입니다. 뭐든 먹어도 좋다는 것이고, 먹느냐 마느냐는 철저히 우리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고기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일컬어 약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지 저쩌니 해도 그렇게까지 해서 고기를 먹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문제를 앞에 두면 뭐라 하실 것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먹어도 좋고, 안먹어도 좋다. 신앙의 소위대로 하자, 자신의 신앙이 허락하지 않는데 굳이 먹어 걸림이 될 이유도 없고, 먹는 것으로 인해 아무런 신앙적 문제가 없는데 일부러 이런 저런 제한을 만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지 모든 것이 가하다.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차원에서만 이야기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차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교회의 덕을 세우라

우선 바울은 신앙의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먹든 말든 상관없을 문제 같지만 사실 실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그저 나만 알고, 내 주관만을 가지고 판단해 나간다면 신앙적으로, 교회적으로 덕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조화라고 생각합니다.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건덕, 즉 사랑으로 인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10여년 전의 일입니다. 지리산 지역에 큰 물난리가 났습니다. 갑자기 내린 큰비에 계곡에서 야영하려던 사람들이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거기에다 그때가 가장 더운 피서철이라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몰렸기 때문에 더 큰 피해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나자 돌 좋아 하는 사람들이 부랴부랴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관심도 없이 큰비로 뒤집어진 계곡 위에 드러난 특이한 돌을 찾아 헤메다녔다는 것입니다.

물론 돌 좋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것은 극히 개인의 자유 문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 울부짖는데 돌 좋다고 좋아라 쾌재를 부르며, 호들갑을 떨며 다닌다는 것은 뭔가 잘못되고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건덕이라는 차원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흔히 이런 배려의 태도, 공동체로서의 질서와 서로 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을 건덕이라고 합니다. 마치 집을 짓듯 몸되신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설한다”라는 뜻의 건덕이 반대말이 “허문다”라는 말이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고기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먹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앙적인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그것만 고려하여, 교회 안에서 피차 간에 문제를 삼고, ‘당신은 먹지 못하냐’는 식으로 매도를 한다든지, 남에게 걸림이 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한몸된 교회로서의 모습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바울의 권면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2)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인생이 되라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잘하면서 양보요, 배려를 하는 것이지, 분명 내가 잘못해서 내 생각을 접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양보라고, 배려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 내가 잘했어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양보할 부분만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양보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은 이런 말씀을 수없이 듣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이 자기희생이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용서라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배웠으니 그렇게 살아야죠.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쉽게 처리할 문제를 우리는 괴로워하면서, 기도하면서, 울면서, 때로는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는 길을 생각하세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더 유익한 길을 생각하세요.” 하는 말씀은 일관성이 없는 말씀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한 단계 더 숭고한 말씀입니다. 우리 미천한 자들이 배우고 감히 실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내가 배려하고 양보해서 덕을 세우는 것은 “내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것은 아픔을 동반하는, 더 숭고한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가 아니라,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희생적 자유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어느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이니까 감사드리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음식은 우상 앞에 드렸던 제사 음식이다" 라고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일로 인해서 옆 사람이 시험에 들거나 양심에 해를 입을까 싶으면 그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을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먹을 자유와 먹지 않을 자유를 신축성 있게 누리되, 늘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할까?"를 생각하고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될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꼭 유익한 말을 하고 유익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그것을 파헤치고, 해결하고, 의견의 합의를 보기까지는 긴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로 더 상처받고 아파하는 과정이 동반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그 길을 가기보다는 조금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덮어놓고 없던 것처럼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자”를 위해 배려하고 양보하고 그래서 모두를 위해 덕을 세우는 쪽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문기자 필립 옌씨는 4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무려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터뷰 끝에 그가 깨달은 바를 그의 회고록에서 인생에는 Star형과 Servant형이 있다고 술회했습니다. 스타형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 자랑만 하는 껍데기뿐이지만, 써브엔트형은 그저 어떻게든 섬기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사과가 둘 있으면 큰 것은 남 먹도록 하고, 어떻든 기회만 있으면 섬기려는 마음으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하늘의 스타가 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으면 헛된 수고가 됩니다.

어떤 주부가 결혼생활에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날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이 반복되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허무에 빠진 것입니다. 위기를 느낀 그녀는 매일 성경구절을 적어 싱크대 앞에 붙여놓고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보다 성경구절을 암송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의 성경구절이 고전 10:31의 말씀이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그 말씀을 읽는 순간 그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록 설거지라 할지라도 내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면 회의를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목적이 생겼으며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매일 반복되던 일들이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이라는 것에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귀신을 내어쫓고, 예언을 하고, 신비한 것을 보는 것만이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영적인 것입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일하는 것도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영적인 것입니다.
목사가 되도 좋고, 평신도로 살아도 좋은데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춤을 추어도, 운동을 해도, 밥을 먹어도, 직장 생활을 해도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러라고 만들어 놓으셨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신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이를 오해했기에 그러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바로 안 신앙의 거장,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지금 죽어도 좋지만 예수님을 존귀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삶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은 당당합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당당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인생을 가르치는 책이나 현자들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그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가는 길이 다릅니다. 사람들이 흔히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과는 아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걸 맞춰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게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부여한 목적을 완성하는 게 성공입니다. 이런 논의가 바로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이 성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만족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걸 이루고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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