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귀의 고등 수법 (행 23:27~35)

  • 잡초 잡초
  • 251
  • 0

첨부 1


마귀의 고등 수법
사도행전 23:27~35

오늘 성경말씀을 우리가 영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데, 문제가 어디까지 왔느냐 하면 극렬주의자들이 생겼습니다. 이 극렬주의자들은 바울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이 극렬주의자들의 눈동자와 주장하는 내용을 보니까 마치 바울을 찢어죽일 것 같이 생각되어서 “이거, 큰일 나겠다.” 철저하게 바울을 보호하려고 군대 470명을 동원했습니다. 그랬더니 극렬주의자들은 매복하여 있다가 바울을 호송할 때 몰래 암살해 죽이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험악해진 내용을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암살해 죽이려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지금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안 먹겠다!” 지금 바울은 재판 중입니다. 우리 상식으로 재판을 하려면 원고와 피고, 재판관이 있고,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이 있어야 그 재판이 진행되는 것인데 그 모든 과정을 다 무시하고 “죽여 버리면 끝나니까 재판이고 뭐고 떠들 것 없다! 어서 빨리 죽이자.” 이렇게 험악하게 발전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미치광이처럼 되어버린 상황을 분석해보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고유 권한의 축복을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나가서 전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교리를 흔들어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혈통된 후손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왜 이방 사람들에게 주었느냐? 그리고 네가 에베소 이방사람 드로비모를 감히 성전에 들고 들어오지 않았느냐? 넌 죽어라!”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시기 질투가 이렇게 고약하고 심술 맞게 살인극이 벌어질 만큼의 문제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한번 여기에 비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의 고등 수칙! 시기와 질투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것이면 끝납니다.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점잖고 경건하게 기도 많이 하고 욕심 없고 조용히 사는 훌륭한 신앙인도 시기와 질투 문제에 부딪히면 정신없어집니다.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결국 이것은 극단적 살인으로 죽여야 되는 것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시기와 질투는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는 마귀의 고등 수칙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심이 있게 하는 것은 철저한 마귀의 수법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아주 비극적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LA에서 꽤 잘 나가는, 교인도 2000명이나 되는 교회로 그 교회 목사님이 아마 저희 갈보리교회에 와서 여러 번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이렇게 목사님의 은퇴와 더불어서 교회가 시험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 목사님이 오셨는데 교인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싸우기를 시작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권위가 다 없어집니다. 오직 이겨야 되는 그 한 가지만 남습니다. 이 시기와 질투심은 주일날 예배드리다 말고 험악하게 싸우는 중에 부목사님 한분이 어떻게 말릴까 하고 앞에 나가서 쳐다보다가 갑자기 교인들의 눈동자와 살기등등한 모습을 보시고 ‘어휴, 이게 뭐야?’ 쇼크를 받으셔서 40대 초반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소식을 제가 어제 들었습니다. 지금 바울 죽이기 작전에 나선 자리가 이렇게 된 겁니다. 이런 거 저런 거 전혀 생각이 안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오직 내 마음 속에 일어난 증오와 복수심, 이것이 마귀의 고등 수칙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도 잃어버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정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우리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마귀의 역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것을 말씀드리면, 어느 교회나 여신도가 더 많지 않습니까? 우리 갈보리교회는 남성도가 많아서 거의 반반이라고 생각되는데, 지금까지 집회하러 나간 교회들을 보면 4분의 3정도는 언제나 여신도들이고 4분의 1정도가 남신도입니다. 유일하게 남자가 많은 교회가 군인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우리가 상식적인 판단을 하면 교회에 여신도가 많으니까 교회 지도급 인사도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여신도들을 위한 여성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균형이 맞고 남자들이 알지 못하는 여인들의 신앙적 부분을 잘 알아서 정보를 줌으로 목회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국의 교회들은 거의 다 여성 지도자를 50퍼센트 이상 세웁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 교회는 없지만 장로를 세워야 한다면 여성을 반드시 장로로 세워야 됩니다. 필수적으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있던 PCUSA 총회는 총회장 선거에 여자가 나오면 거의 다 당선이 됩니다. 안 나와서 그렇지 나오기만 하면 당선됩니다. 그래서 흑인 여자가 나와도 당선이 되고 백인 여자가 나와도 남보다 훨씬 표를 많이 얻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수천 명 모이는 한인교회는 여자들이 거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여성 지도자를 세우는 것에는 인색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노회가 명령을 합니다. “너희 교회는 성차별이냐?” “성차별 하는 것 없다.” “없다니? 여자가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여성 장로를 안 세우느냐? 이것이 성차별이 아니고 뭐냐?” 그러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여자 장로감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핑계를 댑니다. “그래?” 그러면 노회장 미국 목사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네 아내를 장로로 세워라.” 그래서 실제로 목사 아내가 장로가 된 분이 계십니다. “아니면 네 딸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성 지도자를 교회에서 세워라. 아니, 목사 사모 정도라면 충분히 장로할 수 있다. 왜 안 세우느냐? 그렇지 않으면 성차별이다.” 그래서 이것부터 물어봅니다. “교회 교인이 몇 명이냐?” “천명이다.” “남자 장로가 몇 명이고 여자 장로가 몇 명이냐?” 그래서 제가 목회했던 교회도 이 문제를 지적을 받아서 여자 장로를 세우기 위해 그 작업을 제가 해 나갔는데,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주 지끈지끈 아픕니다. 여자 장로를 세운다고 했더니 끝도 없이 찾아오고 전화가 오는데 “목사님, 누구를 시키실 겁니까?” “아니, 내가 시키는 게 아니고 교인 총회에서 뽑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그래도 목사님, 입김이 있잖아요?” 아니, 그러면 입김이 없으면 숨 막혀 나보고 죽으란 말입니까? 여성 장로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출이 되었다고 금방 되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 이상 수련 과정을 거쳐서 그 다음에 장립식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겪은 일이 소설 같습니다. 뽑힌 장로에 대한 비난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 여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바람둥이였다”라는 둥 못 견딜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집단으로 “여자가 장로가 되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말씀하시기에 “그러면 할 수 없다. 당신은 PCUSA에서 나가라! PCUSA에서는 오래전에 이 문제를 해결했고 성서적으로 이미 다 정리했다. 당신은 PCUSA 교단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도 누가 된다고 할 때 그것을 못 견디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고등 수책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도를 없애자고 제가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 교회에 지도급 장로 제도를 없애는 것이 교회에 훨씬 유익하고 하나님 기뻐하시겠다.” 여신도들 모아놓고 “여러분! 대한민국의 여권 신장은 여인들이 망칩니다. 만약 극렬하게 반대하는 당신이 여기 장로가 되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나는 할 수 있지.” 이렇게 나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것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제가 겪은 일은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정착이 되어서 그야말로 24살짜리 여자 장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거, 장로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누구든지 “OK!” 하면하고, 또 2, 3년 지나면 그만 두고 또 다른 사람이 하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시기, 질투가 “바울을 찢어 죽여야 돼!”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어떤 이상한 일을 불러왔느냐 하면 보통 죄수를 호송하는 간수들은 죄수가 도망갈까 봐 신경을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이라는 죄수는 가만히 태연하게 있으면서 절대 도망을 안가고 죄수를 못살게 구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되어 한명 호송하는데 470명이 동원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죄수를 오히려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천부장이나 백부장의 판단은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이 죄도 없는데 피살된다면 자신들에게 책임이 돌아오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동원해 바울 보호에 나서는 것입니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그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가이사랴입니다. 그곳에 유대를 통치하는 로마의 총독 관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잘못하면 로마와 유대 간에 어떤 정치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총독 재판에 회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람들이 없는 밤을 틈타 안전하게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호송하는 비밀 죄수 호송 작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총독은 빌라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뀌어서 벨릭스라는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이 있는 가이사랴는 해변 도시로 옛날에는 서로마라고 불리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그 항구를 통해서 오고 가기 때문에 편리상 그곳에 총독 관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벨릭스 총독이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신상을 잠깐 봐야 합니다. 안토니우스 벨릭스라고 하는 사람으로 본래는 노예 출신입니다. 팔락스라고 하는 형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처세술에 아주 능해서 네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팔락스 형의 은혜로 말미암아 노예였던 사람이 자유인이 되었고, 급기야 지방 장관까지 되어 유대 나라의 총독까지 오게 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마리아 총독으로 와서 2년을 지냈고 유대에서 5년째 총독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형을 닮아 처세에 매우 밝고 출세에 필요한 주변을 만드는 기술과 지혜에 아주 민감합니다.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알려지지 않았고 두 번째 부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클레오파트라의 손녀를 데리고 사니까 유명세를 탔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한국 사람들의 귀에 까지 익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여자를 데리고 사는 사람이 유대 나라 온 후에는 유대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유대 여자를 데리고 삽니다.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맏딸 두루실라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래서 9년 동안이나 총독 자리를 유지하고 처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이 총독은 ‘이 바울도 내가 잘 이용하면 무엇을 얻을까?’라고 머리를 쓰는 게 나옵니다.

이제 사건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바울이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백부장, 천부장의 군대 470명을 동원해 밤잠도 자지 않고 비밀 호송 작전을 하는데 목적지는 총독에게 보내는 겁니다. 바울 선교사 한명 때문에 총독까지 동원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영적 관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 앞에서 23장 11절에 보면 환상 중에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바울을 로마로 부르기 위해 벌써 작정하시고 이미 환상으로 약속을 하시고 그 작업을 하고 계신 겁니다.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위해 천부장, 백부장의 군대를 동원하고 계십니다.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빌립보서 1장 12절에 말했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군대가 동원되고 자기가 감옥에 갇히고 한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이다.” 이제 바울은 신변의 보장을 받으면서 총독에게 가게 됩니다. 31~32절을 읽어보면 “보병이 명을 받은 대로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에 이르러 이튿날 마병으로 바울을 호송하게 하고 영문으로 돌아 가니라” 안전하게 호송해줍니다. 33절에 보면 “저희가 가이사랴에 들어가서 편지를 총독에게 드리고 바울을 그 앞에 세우니”라고 말했습니다. 총독 앞에까지 무사히 갔습니다. 결국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40명의 결사대는 그 후로 굶어죽었는지 살았는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영적 관찰을 해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 택한 자의 길은 무엇인가?’ 찬송가 43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그 다음에는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성령 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하나님이 다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쓰시는 자는 일거일독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움직이는데 바울 주변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명이 있는 자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애를 보면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누구나 다 있었습니다. ‘아! 그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곤고한 지경에 내버려 두셨는가?’ 나는 그것이 나의 손해라고 생각되고 다소 원망스러운 감도, 그리고 한으로 남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했으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명자로 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지혜로 그렇게 해야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쓰임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나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손길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다윗은 유대나라를 지키는데 공헌한 일등 공신입니다. 또한 그의 믿음은 누구보다도 투철했는데 그렇게 큰일을 한 다음에 13년 동안 거지 생활을 했습니다. 쫓겨 다녔습니다. 거지가 되어 산속을 헤매어 피해 다니고, 사울의 정예 부대 3,000명이 얼마나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 나섰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둘람 동굴 사망의 음침한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그곳에 숨어있으면서 배도 얼마나 고팠겠습니까?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틈틈이 밥을 얻어다 주면 동굴 속에서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해서 제사장 85명을 끌어다가 먹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골짜기 속에서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한 달, 두 달이 아닌 13년 동안 쫓겨 다니면서 험악한 생활을 살았던 그 시간에 다윗이 지은 시가 무엇입니까?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이때에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이 순간에도 안위하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훈련된 다윗이기 때문에 히브리 민족사에 가장 빛나는 40년 통치를 했고, 그 다음에 아들에게 물려주어 솔로몬이 또 40년 통치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다윗, 솔로몬 시대와 같이 될 때가 이때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민족사에 가장 빛이 나던 때가 언제이냐 하면 다윗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의 깃발 기억나십니까? 하얀 바탕에 파란 색깔로 별 하나를 그린 것이 이스라엘 깃발입니다. 그게 무슨 별입니까? 다윗의 별입니다. “다윗과 같이 이 나라가 영원히, 영원히 빛나라!” 그런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궁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우리 상식으로 죄수된 사람이 어떻게 총독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왕궁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하나님이 로마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보호하시는 겁니다. 누구도 근처에 오지 못하게, 이때는 바울의 생명을 보호해야 되니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로마에 들어가서 로마를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역사가 온 세상에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지금 로마에 뭐가 있습니까? 교황청이 자리 잡고 바티칸이라는 세계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베네딕트가 한마디 하면 금방 온 세상에 전파되고, 우리나라에도 “한국에 추기경 한 자리 더 주겠다.” 그 사람이 말하니까 하나 생기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도 로마 바티칸 광장에 가보면 바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한쪽에는 베드로, 한쪽에는 바울! 성지순례를 가시면 베드로와 바울이 언제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손에는 언제나 칼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입니다. “이만큼 성령의 검을 이룬 사람이 없다.” 이런 뜻이고, 베드로의 손에는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그것을 보시고 바울과 베드로를 구분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한번 필름을 거꾸로 돌려서 더듬어 보세요. 한이 맺혔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한이 되어서 괴로워했지만 결국 그 수련을 통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시면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을까? 나의 모습이 지금 어떻게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이것은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때는 네가 나서라.” 목적이 있어서 나를 쓰실 하나님의 계획이 남아있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 겁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안에서 만사가 형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필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