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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계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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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와서 몇 년을 지내봤는데 대체 이 교회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좀 완벽한 교회, 완전한 교회를 찾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승낙을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가 다니면서 완전한 교회를 찾거들랑 내게도 연락을 해주게. 나도 그런 완전한 교회에 가서 한번 목회를 해보고 싶어.”

  그러면서 목사님은 또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러나 자네가 그런 교회를 찾거들랑 자네는 절대로 그 교회에 출석하지 말게나.”
  “아니 왜요?”
  “그 완전한 교회가 부족한 자네 때문에 깨어질지 모르니까!” 라고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디를 봐도 완벽한 교회,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천상의 교회만 완전할 뿐, 지상의 교회는 다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인 사람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체가 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완전하고 성결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늘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영신교회도 8월 한달 동안 친절한 교회, 미소가 있는 교회, 인사 잘하는 교회가 되려고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이 기대하시는 교회가 되려고 늘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비둘기는 그 하얀 백색의 모습을 자랑을 합니다. 비둘기는 진흙탕을 밟고 지나다니면서도 늘 깨끗함을 보존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 하고 학자들이 연구 해 보았더니, 비둘기의 날개에서 기름과 같은 세척제가 나와서 더러움을 다 씻어내린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늘 그 흰색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죄악되고 오염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순결을 지키는 방법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늘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 받고 이 어려운 세상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영신교회가 정말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날마다 성장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개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는 네번째 교회입니다. 이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일곱 개 도시 중에 가장 작은 도시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 편지가 이 곳으로 보내지고 있음을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작은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은 가장 많은 말씀을 허락하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일곱 개 교회는 나름대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는 책망이 전혀 없습니다. 칭찬 밖에 없는 교회요, 주님이 보실 때 거의 탓할 것이 없는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영신교회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만 받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일곱 개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전혀 없이 책망 밖에 없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가 있을 수 있을지 참 안타까운 교회입니다. 그 교회도 나름대로 수고하고 애썼지만 칭찬 받을 거리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 두아디라 교회는 칭찬도 있고 책망도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본 버가모라는 도시에서 약 64Km 동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상업 도시입니다. 풍부한 곡물의 생산지요, 자줏빛 염색 약품 공업이 발전한 지역입니다. 옷에다가 물을 들이는, 천에다가 빨간색 파란색 등의 물감을 들이는 염색업이 특별히 발전한 도시가 이 두아디라입니다.

  사도행전을 거슬러서 생각해보면 사도바울이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 성에 도착을 해서  처음 만난 사람, 여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자주장사 루디아 입니다. 염색업을 하는 장사꾼이었습니다. 루디아라는 이 여인을 만나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거기서 교회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유럽의 첫 교회, 빌립보 교회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관심 있게 보신 분이 계시다면 이 자주장사 루디아의 고향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두아디라입니다. 염색업이 발전한 도시에 살았기 때문에 빌립보까지 와서 루디아는 염색업을 했습니다.
  이 두아디라 지방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오늘 주님이 편지하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자 여러분, 주님께서 이 교회에 주시는 칭찬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책망의 말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그 말씀은 바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요, 오늘 나에게 주는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19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도다” 아멘. 

  오늘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사랑과 섬김을 칭찬하십니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마음입니까? 그런 교회가 흔히 친절한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교회였는데 이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섬김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인내가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뜨겁고, 또한 어려운 시련을 잘 견뎌내는 교회가 이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도 보면 정말 잘 참아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이 믿음과 인내가 뛰어난 훌륭한 분들입니다.

  또한 이 두아디라 교회는 사업이 풍성했습니다. 19절 맨 앞에 보니, 사업에 대해 언급하는데 교회에서 무슨 사업을 했겠습니까? 구제 사업을 하고 선교 사업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경로대학도 하나의 사업이요, 어린이집도 사업이요, 방과후 교실도 사업입니다. 아마도 이런 사업들을 이 두아디라 교회는 많이 펼쳤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작지만 큰 일을 한 교회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힘에 부칠 정도로 귀한 일들을 많이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중요한 말씀이 19절 후반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바꿔 말하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다는 얘기입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이, 나중 행위가 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얼마나 귀한 교회입니까. 따라해 보십시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교회!”

  용두사미라고 합니다. 사람이고, 사업이고 처음에는 훌륭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원래 정신을 잃어버리고 쇠락의 길을 걷는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두아디라 교회의 자랑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교회입니다. 저는 오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도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면 더 좋아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말씀도 더 많이 듣고, 기도도 많이 하면 믿음도 더욱 훌륭해지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집사님, 권사님으로 처음에 임직 받을 때는 참 믿음이 좋고, 봉사도 많이 했는데 그 후에 몇 년 지나다 보니까 점점 봉사의 시간이 줄어들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많아질 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린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가 되야 할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저 혼자라도 늘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내 인생에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여러분, 아직도 내 인생에 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달은 좀 더 좋은 일이 생기겠지, 내년엔 더 좋은 일이 생기겠지 늘 이런 희망이 있습니다.

  “아, 나는 말이야. 좋은 시절 다 지나갔어!”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러면 살 맛이 없습니다. 이제는 죽 쓸 일만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과거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 청년때가 좋았지...” 그런 분은 현재가 비참하단 얘기입니다.
  그러나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청년보다는 중년의 때가 더 좋고, 중년보다는 노년의 때가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건강은 쇠퇴하고, 사업도 줄여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은퇴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면이나 물질적인 면에선 부족해질지라도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과 더 깊고 밀접한 교제를 가질 수 있구요, 더 많은 시간이 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좋은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영신교회도 날이 갈수록 좋은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 좋았던 교회, 그것 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유럽에 가면 그런 교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중세 시대 때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거대한 예배당에 수 천 명이 모여 예배 드렸지만, 지금은 그저 노인들만 한 30명 모여 예배드립니다. 그러다가 그 큰 건물의 청소나 관리를 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 극장에 팔아버리는 등의 교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점점 비참해지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도, 우리 교회의 모습도 어제보다 내일이 더 아름다운, 미래가 더 좋은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옆의 분들에게 격려해 주십시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성도가 됩시다.”

  자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이 교회에도 주님의 책망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주님의 준엄한 책망은 장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책망이었습니다.

  20절 말씀을 같이 읽어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아멘. 

  여기 이세벨이란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부인의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아주 사악한 여자였고, 남편을 쥐고 흔드는 여자였습니다. 시집 올 때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가지고 와서 북 이스라엘 전체를 우상으로 그냥 가득차게 만든 여인이 이세벨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자, 이런 사악한 여인이 여기에 또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명이인듯 합니다. 아니면 이 여인의 별명이 이세벨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이 두아디라 교회에 오염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이 교회의 가장 큰 책망의 요인이었습니다. 제가 이씨 성을 가졌지만 이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여자 중에 하나가 이세벨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멜다, 이순자씨도 비슷합니다.
  하여튼 이 여인은 두아디라 교회에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두아디라는 이 여인을 그냥 용납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이 자칭 선지자라 하는걸 보니까 꽤나 기도의 능력도 있고, 뭔가 예언의 은사도 받고, 뭔가 기적을 행하는 그런 힘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저 겉만 보고 참 훌륭한 사람이 왔다고 받아들여서 그를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로 삼았는데 그 여인이 잘못된 사상을 이 교회에 퍼트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아디라 도시의 상황을 우리가 조금 이해해야 합니다. 이 두아디라는 염색업이 성행했다고 했습니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조합을 만드는데 우린 그것을 중세 표현으로 길드라고 합니다.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어서 일 년에 몇 차례씩 같이 고사도 지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공장을 짓거나 개업을 할 때 고사를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돼지 머리 놓고서 말이지요. 그 고사상의 돼지 머리를 보면 씩 웃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가소로운 인간들아. 나에게 빌어봐야 나한테서 뭐가 나오겠냐! 내가 그런 능력이 있으면 내가 목 잘려 죽겠냐?”하며 웃는 것 같습니다. 그런 돼지 머리 앞에 절하면서 또 콧구멍에다가는 왜 또 만원 짜리를 꼽아놓는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풍습을 가지고 있듯이 이 두아디라 도시에서도 일 년에 몇 번씩 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를 지내면서 이방의 신상 앞에, 우상 앞에 절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물을 드리고 제사 후에 번제물을 나누어 먹습니다. 자기 친구들, 가족들 다 불러서 인심 쓰고, 마음 놓고 먹는 것입니다. 술도 먹고, 거나하게 취하면 그 다음 순서가 당시 이방 사회에서는 이방 신전에서는 성창들, 창녀들이 있었는데 이 창녀들과 함께 몸을 합하는 겁니다. 이런 음란한 행동들이 가득한 문화가 이세벨을 통해서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그 길드 조합에 가입을 해야 합니다. 가입이 안 되면 사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거기에 가다 보면 같이 제사를 드려야 하고 제사 드린 제물을 먹어야 되고 그러다 보면 그 좌석에 어울려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기업을 하는 분들도 가끔 그런 고민을 이야기 합니다. 사업 하다 보면 술 안 먹기 참 어렵다구요. 거래처 사람 만나면 대접 안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떤 회사는 아주 술 상무라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술만 잘 마십니다. 대개 그런 분들이 50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빨리 죽습니다. 대개 저녁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저녁 먹으면 2차 가야 하고, 2차 가면 노래방 가야하고, 그 다음에 유흥주점 가야하고.. 이런 게 다 하나의 잘못된 문화요, 습관입니다. 이 두아디라도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이란 여인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혼미케 하는데 자,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 여인이 종들을 꾀어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 하려면 그런 것도 이해를 해야지, 어떻게 그런 것도 안하고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느냐, 예수 믿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돈을 버느냐... 이러면서 사람들을 유혹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고 했고, 여기에 두아디라 교인들 중에 일부가 그 여인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악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주위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 좋은 영향력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교인들이 기도를 배우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열심히 구제하는 모습을 보고, “집사님처럼 구제해야지.”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봉사하는 모습 보고, “저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나도 봉사를 배워야지”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린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권사님이 성가대석에 앉아있는 것을 보면 천사 같아. 나도 성가대석에 한번 앉아 봤으면 좋겠어.” 이런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이게 선한 영향력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나쁜 영향력을 이 두아디라 교회에 퍼뜨리고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21절, 22절 말씀을 읽읍시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아멘.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 이세벨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건 뭡니까? 중병에 던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리면 침대에 누울 수 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네가 회개치 아니하면 환란 가운데 던지고, 나중에는 사랑으로 그의 자녀를 죽일 것이라고 하나님은 무서운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왜 이런 경고를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몸 된 교회가 거룩한 신부처럼 그 정결과 순결을 지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교회 속의 작은 악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교회가 순결할 때 세상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타락해 버리면, 더러워져 버리고, 오염되어 버리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소금이 어떻게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습니까? 아무런 빛도 비추지 못하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 광명을 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교회에 진정한 순결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책망에 이어서 또한 교회를 향한 권면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24절 말씀을 읽습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아멘. 

  하나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세벨의 악한 사상을 쫓아갔지만,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고, 그 거짓된 교훈을 좇지 않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니까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거짓된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거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25절, 26절 말씀입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아멘. 

  그 믿음의 순수함을 지키고 있는 그 거룩한 백성들을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 까지 굳게 잡으라. 따라해 보십시오. “굳게 잡으라.” 아멘.

  주님이 다시 재림의 주로 오실 때까지 너희 지금 믿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너희 믿음을 굳게 잡고 믿음의 중심인 예수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네가 있는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흔들리지 말아라.” 그 믿음의 순수함을 그대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 했습니다. 영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이기는 자,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바로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은 주님의 그 영광스러운 보좌에 같이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린 오늘도 혼탁한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죄악의 물결이 넘실대고, 세속적인 흐름이 교회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거룩함과 정결함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례할 때 보면, 어느 신부나 대개 흰 드레스를 입습니다. 순수함, 순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는 바로 그런 영적 순결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독일의 한 조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꽤나 유명한 조각가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가 인생의 허무 가운데에서 성경을 읽게 되었고, 성경에 몰두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리고 주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믿음 안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귀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내가 일생을 조각을 하며 살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이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조각에 담아봤으면 좋겠다. 그럼 그걸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을까...’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영감으로 받은 예수님의 모습을 조각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예수님의 동상을 조각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이 동상이 누구의 모습 같습니까?”
  “멋진 신사 같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그것을 깨뜨려 버립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면서 심혈을 기울여서 또 예수님의 조각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후에 또 완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누구의 모습 같습니까?”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겁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어느 날, 프랑스의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가 이 조각가를 불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길 터인데, 이 유명한 비너스상을 조각을 해서 우리 프랑스의 유명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시오.”하고 요청했습니다. 많은 돈도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각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예수님 상을 조각한 이 손으로 어떻게 이방의 신상을 조각해서 내 손과 마음을 더럽힐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조각한 이 손으로 더러운 이방의 신상을 조각해서 내 자신을 더럽힐 순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오염되지 않는 신앙의 순수함을 보존해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는 너희가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 믿음의 순수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한 행위를 한 자들은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이요, 악한 행위를 일삼은 사람들은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받는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 보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순결함을 가지고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신부의 순결함을 보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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