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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친절합니다 (고전 13:4; 롬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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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아가페 사랑의 첫 번째 특성으로 오래 참음을 들었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나에게 주는 고통을 단순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견뎌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을 기꺼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상대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직감적으로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 참는 사랑의 진정성을 좀더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친절입니다. 개역성경엔 온유로 되어 있는 데 친절이 원어의 해석으로 더 적절해 보입니다. 친절이 원어에 담겨 있는 적극성과 행동성을 더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울은 사랑의 두 번 째 본질로 친절을 들고 있습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오늘 우리는 친절의 의미를 깊이 새겨봄으로써 아가페 사랑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1. 친절함의 뜻

친절함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을 대하거나 보살피거나 가르쳐 주거나 하는 태도가 정답거나 따뜻하거나 자세하거나 하여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상태에 있는 것. 또는, 그러한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번역본에는 to be kind로 되어 있는데 이는 '친절하다, 상냥하다, 동정심 있다, 인정 있다, 사려 깊다, 도움을 주다, 유익하다, 인간적이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자애롭다, 정성 어리다, 애정 있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말의 친절함보다 좀더 폭이 넓은 편으로 원어의 뜻에 좀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친절하다로 번역된 '크레스튜오마이'란 동사는 '크레스토스'란 형용사에서 유래했는데요 그 뜻은 '유용한, 도움이 되는, 우정어린'입니다. 그러므로 친절하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 자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어 상대방에게 구체적 유익을 끼쳐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런 친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에로스가 베푸는 쉬운 친절과 아가페가 베푸는 어려운 친절입니다. 이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에로스적 친절에만 머물지 않고 아가페적 친절로까지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에로스는 쉬운 친절을 베푸는 열정입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물론 그런 친절마저 충분하게 베풀지 못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받은 만큼 주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나에게 이런 저런 유익을 주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만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보단 훨씬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나의 이상형으로서 나의 애인이 되어 주었으면 딱 좋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어렵습니까? 너무 즐겁죠! 비속에서 3시간을 기다려도 마냥 행복합니다. 돈 많고 내 장래, 내 사역 혹은 내 사업을 책임져줄 용의가 있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어렵습니까?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도 보니까 다른 나라들의 원수를 똑 같이 대우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일본의 현직 수상이 미국을 방문하면 아주 각별한 친절을 베풉니다. 자기 목장으로 데리고 가 아주 친밀하게 교제를 합니다. 일본을 방문할 땐 자기 이름이 새겨진 카우보이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쉬운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가페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 사랑입니다. 물론 에로스 사랑도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에로스 사랑을 폄하해선 안 됩니다. 인간 세상에 에로스 사랑마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해지겠습니까? 에로스 사랑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자아발전과 성취를 위한 노력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해줍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청춘남녀들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입니까? 사실 인간이 창조한 문화의 상당부분이 그런 동기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에로스 사랑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에로스를 아가페로 착각해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에로스에 만족하지 않고 아가페로 더 성장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가 아가페로 보완되지 못하면 에로스는 본래의 아름답고 화사한 향기를 잃고 악취를 풍기고 심지어 독을 뿜어내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에로스가 거부당하거나 상대에 대한 환상이 깨어질 때입니다. 그 지경에 이르면 에로스는 결국 자신과 상대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대부라는 3부작 영화를 기억합니까? 아버지 말론 브란도의 대를 이어 대부가 된 알파치노는 자신의 친형이 자신과 그룹에게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 서자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간접 살해합니다. 잔인의 극치죠. 그러나 자기에게 충성하는 부하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딸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합니까? 자기 아들이 출연한 오페라를 감상하고 나오다가 극장 계단에서 자기 딸이 자기 대신 경쟁조폭의 총에 맞아 죽자 오열합니다.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실 알파치노는 그 동안의 모든 잔인한 행동들을 자신과 가족과 그룹을 위한 행동으로 정당화해 왔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던 자신의 딸이 죽었으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에로스적 친절을 아가페적 친절로 착각해선 안됩니다. 하여 예수님도 지속적으로 경고하십니다:

[마 5:46-47]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눅 6:33]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예수님은 쉬운 친절은 세리, 이방 사람, 죄인들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적용하자면 일본의 앞잡이, 일본 사람, 각종 범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신 셈입니다. 쉬운 친절을 베풀곤 자기 만족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쉬운 친절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파 지도자에게도 무안할 정도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네가 그러한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 갚아,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눅 14:12).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에 하나는 분파가 갈라진 것이었습니다(고전 1:10-12). 이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를 각각 자기 계파의 중심인물로 내세우곤 파당을 지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보니 서로 다른 분파의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분파에 속한 사람에겐 각별한 친절을 베풀었겠죠. 그러나 그런 친절은 아가페에서 흘러나오는 친절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언제나 이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다보면 서로 마음이 잘 맞고 성격과 취향이 쉽게 통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열심히 베풀면서 자신에게 아가페 사랑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면 그 순간 성장이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런 친절만 열심히 베풀고 더 나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 수준은 일본 앞잡이, 일본사람, 범죄자 수준이구나!' 제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리죠? 그래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정확하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적 친절을 아가페적 친절로 착각하는 것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친절은 아가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어려운 친절입니다.

3. 아가페는 어려운 친절을 베푸는 능력입니다

어려운 친절이란 친절을 별로 베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첫째,  세상적으로 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친절을 베풀 것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파 지도자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주목해볼까요?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 장애자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눅 14:13). 부유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이 내가 베푼 잔치의 주요 손님이라는 것 자체가 뿌듯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더 풍성한 친절을 돌려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초대하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혹시 내가 베푼 잔치에 고물자동차를 끌고 나타나거나 매우 허름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면 내 명예에 손상이 갈 수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 가난한 사람이 이번 한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나에게 친절을 요구하고 의지한다면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렵고 염려도 되지요. 건장한 사람들을 초대해 친절을 베푸는 것 역시 참 즐거운 일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초대해 친절을 베푸는 것은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잔치의 모든 행사가 그 사람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일일이 설명해줘야 할 것입니다. 지체 장애자들의 이동과 편의를 위해 지속적으로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입니다. 잔치의 즐거움을 만끽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죠.

에로스적 친절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반면 아가페적 친절은 나의 밖에서 오는 능력을 경험할 때만이 비로소 가능합니다. 교회가 아가페의 능력을 경험하면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여러 사회적 소자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그들은 그 교회를 금방 자기 가정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정착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했을 때 바로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여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26).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그 처음 모습을 회복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언덕에도 이런 아가페의 친절이 더욱 넘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현재 한 달에 한번 네 조가 돌아가면서 쪽방 어르신들의 생일잔치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진실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친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어려운 친절이란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입니다. 이는 첫 번째 친절보다도 더 어려운 친절입니다. 나를 아프게 한 사람에겐 원수를 갚아 복수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잘 그려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죠. 아니면 나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무서운 차가움입니다.

최근 공지영 씨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봉순이 언니』를 읽을 때는 뭔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소설의 세계로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마음으로부터 공감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고통과 행복을 나누며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용서와 사랑이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윤수는 한 사건에서 3명을 죽인 사형수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파출부아줌마입니다. 그 여인의 노모는 어느 날 윤수를 용서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워 윤수를 돕고 있던 노수녀 그리고 그의 조카와 함께 윤수를 찾아갑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 양으로 백설기 떡까지 만들어 싸들고 말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를 용서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떡 한 조각을 떼어 들고 윤수 쪽을 돌아보다가 무너지듯 그만 의자에 주저앉습니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왜 죽여야 했니? 이놈아, 이 나쁜 놈아.... 이 천하에 죽일 놈아!' 그는 웁니다. 자신의 눈물로 적셔진 손수건을 들어 윤수의 얼굴의 땀아 닦아주려고 하자 윤수는 비명을 지릅니다. 노파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엽니다. '미안하다. 용서하려고 왔는데... 수녀님이 아직은 안 된다구 했는데도, 내가 고집을 피어서 왔는데, 미안하다... 아직은 다는 못하겠다.... 얘야 미안하다. 널 보니까 우리 애가 자꾸 떠오르고 네가 미워지려고 한다. 오기 전에 그러지 말자고 밤새워 한잠 못 자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날 위해서 기도해주겠니?... 내가 또 오마. 진짜로 널 용서할 때까지.... 오마... 그때까지 죽지.. 말고...'

이 노인을 생각하면서 저는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를 용서하고 그에게 도리어 친절을 베풀어 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인지 말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우리가 어디서 능력을 얻어 그 아름다움을 완성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열정과 에너지 혹은 우리 자신의 의지적 결단과 각오에 의존하려는 한, 우리는 곧 높은 장벽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바울은 그래서 친절을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다섯 번째 것으로 소개합니다(갈 5:22). 그 목록에서도 친절은 오래 참음 바로 뒤에 나옵니다. 오래 참음의 진정한 표현으로서의 친절은 성령님이 내 마음의 중심에 계셔서 도와주실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 아름답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롬 5:5). 물론 우리 자신의 이성과 감성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공감하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우리 가슴을 가득 채워주시는, 그렇게 우리 존재 전체를 감싸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도리는 없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 존재 전체가 치료받고 위로 받을 때 비로소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선 죄와 죄인을 확실하게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여전히 끔찍하게 사랑하십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악인이 죽는 것을, 내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겠느냐?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모든 길에서 돌이켜서 사는 것을, 내가 참으로 기뻐하지 않겠느냐?'(겔 18:23).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 5:45).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마침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인들을 위해 죽게 하심으로써 죄인들이 용서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선량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매우 드물게 혹 있을지 모릅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것은 그 보다도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못된 죄인을 위해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입니다(롬 5:6-8).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목을 곧게 세우고 버티고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살려주시기 위하여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만큼 아가페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친절은 성령의 열매임으로 실천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조급하거나 쉽게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늘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합시다. 아가페 친절을 베푸는 사랑의 사람으로  꾸준히 자라갑시다. 이 친절이 한반도를 덮어나가다 보면 통일의 길도 한결 가까워 질 것입니다. 그렇게 8.15광복의 기쁨이 완성되는 그 날이 속히 오도록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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