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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가지 영성과 제자의 길 (마 2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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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본문은 사실 각각 따로 떨어진 독립된 본문입니다. 각각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다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자도’의 안경으로 본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의미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과 가룟 유다가 보여주는 영성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영성도 있고, 우리가 닮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영성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어떤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소유해야 할 영성 어떤 영성일까요? 우리는 어떤 영성을 소유하고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1. 예수님의 영성 - 창조적 영성
  예수님에게 점점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손에서 놓임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경험하였던 그 유월절을 제자들과 함께 보낸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6:1)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제자 가룟 유다가 돈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변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에게 진정한 스승으로 남기를 원했지만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그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여 죽게 된 마음을 끌어안고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씨름하던 그  날 밤에 예수님은 샬롬의 인사를 건네는 유다의 웃음의 의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인자가 더러운 욕심의 노예가 된 짐승 같은 한 인간에게 팔리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다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3-4절)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놀라운 일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는 사건들 앞에서는 놀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면서 마음속으로, 뒤돌아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기에 혈안에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인자가 사악한 무리의 흉계에 빠져 덫에 걸려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유다의 손에 팔려도, 종교 지도자들의 흉계 속에서도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게 죽어야만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그리고 내가 죽는 것까지도 나는 십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 한다”는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열리기만 한다면 나는 죽어도 상관없고, 내가 배반을 받아 팔려도 상관없고, 내가 흉악한 계획의 대상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인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배반도, 흉계도 하나님의 뜻을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마음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영성을 이렇게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창조적 영성”
  현실 그대로 보면 예수님은 제자에게 배반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예수님은 장로들의 흉계에 걸려 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에게 벌어진 사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창조적으로 대했습니다. 창조적인 영성을 가지고...

  내가 창조적인 영성을 가질 때는 그것은 배반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입니다. 내가 창조적인 영성을 가질 때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영성을 소유했습니까? 여러분에게 있는 그 고난이 왜 내게 왔다고 생각합니까? 오늘 내게 있는 이 실패가 왜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왜 내게 오늘도 눈물 골짜기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일까요? 재수가 없어서요? 자업자득이라고요? 어느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요? 아니요. 아닙니다.

  저도 철없던 어린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에 내 자신과 가정에 대해서 원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가정, 왜 내가 이런 집구석에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낭비하는 일이 없습니다. 목사가 된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아픔, 눈물, 실패, 그런 가정의 경험과 성품의 경험까지 목회의 영양분이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삶은 오늘 목사인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토기장이의 틀이었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오늘 나의 모습이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창조적인 영성을 가지십시오. 내게 오는 모든 일, 사건, 상황을 창조적으로 바라보십시오. 이것은 어느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의 눈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창조적인 영성은 그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합니다.

2. 제자들의 영성 - 현실적 영성 (실리적 영성)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한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분노하면서 말합니다. “왜 이렇게 귀한 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더 좋지 않으냐?”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매우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이런 행동을 했을까? 아니면 여자는 몰랐지만 이런 행동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석해 주신 것일까?’ 저도 처음에는 후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이것을 보면 전자가 맞는 것 같아요.

  만약 이 여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런 행동을 우발적으로 했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말씀했어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여인은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인 우리가 소유해야 할 또는 소유하지 말아야 할 영성을 배우게 됩니다. 제자들은 현실적 영성,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실리적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 영성이라는 말을 붙이기는 그렇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과 삶의 방식을 이렇게 표현함)

  제자들은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서 없애 버리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실리적인 영성의 특징은 작은 것보다는 보다 큰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큰 것을 위해서라면 작은 것은 언제나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프래그머티즘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지혜를 줍니다. 그러나 또 많은 것을 잃게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좋아합니까? 보다 큰 것, 보다 화려한 것, 보다 주목 받는 일에 여러분의 인생을 던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한 번 쯤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제자들이 가졌던 그 실리적 영성에 물든 사람은 아닌가?’하고.

  우리는 큰 것, 화려한 것, 사람들의 집중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아주 작은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뎀 나무 아래서 지쳐있는 엘리야를 찾아가서 그를 어루만집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서 먹을 것을 공급 받고, 힘을 얻어서 엘리야는 호렙산을 향하여 발길을 옮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곳에 가서도 낙심합니다. 엘리야가 굴 속 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왜 여기 이렇게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하나님! 이제 저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저만 남았단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굴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의 앞으로 강한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지나가고, 불이 지나가지만 하나님은 그 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세미한 소리가 들려 왔는데 하나님은 그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엘리야에게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웅장함을 통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침묵 가운데서도 말씀하신다는 것을 엘리야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중에서도 대화하실 뿐 아니라 누추함 속에서도 대화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일할 때 대중에게 더욱 많이 알려진 일들,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것처럼 보이는 역동적인 드라마와 같은 것에 열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위대한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일과 작은 일 둘 다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만한 엄청난 사건은 아주 가끔 한 번씩 일어납니다. 그러나 영원히 중요한 사건들은 날실 씨실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항상 우리 주변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엄청난 사건들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사소한 작은 일들로 우리의 삶이 꾸려져 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승리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그는 굉장히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스르엘 골짜기를 지나, 브엘세바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신나는 갈멜산이 아니라 평범하고 낮은 골짜기와 평지에서도 살라고 하십니다. 갈멜산에 있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골짜기와 평지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 있어야 할 곳은 화려하고, 크고,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곳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작고, 드러나지 않는 곳입니다. 세미한 음성은 엘리야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인을 칭찬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크고 화려하고 번쩍이는 것보다는 가장 소중한 것에 너의 인생을 걸어라. 비록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별 볼 일없이 보여도 소중한 것에 너의 인생을 사용해라.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리처드 볼스(Richard Bolles)는 우리 각자에게 세 가지 사명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 매시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의식적으로 서는 것  2) 당신 안에, 주변에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 매일 순간 한 걸음씩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3)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장 끌리게 하신 장소와 환경 속에서, 세상에 가장 절실히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뜻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구사하는 것.

  세 가지 사명 모두 아주 평범하고 작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상적이거나 이론적 영성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행할 수 있는 현실적 영성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적 영성이 실리적 영성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현실적 영성은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일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너무 작다고 느껴지는 그 일이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일 수 있습니다.

3. 가룟 유다의 영성 - 배반의 영성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 줄 테니 얼마나 줄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은 30으로 값을 정했습니다. 은 30, 그것이 유다와 대제사장들이 정한 예수님의 값이었습니다. 은 30이 아니라, 은 300이 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고 값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섬기고 따르고 사랑해야 할 주님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드린 여인을 칭찬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드린 것이라면 아무리 큰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으며, 아무리 작은 것을 드려도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판다면 아무리 많은 값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무의미하고 값싼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이 세상 명예와,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또 믿을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고, 내가 아무리 빛나는 명예를 가졌고,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 분이 없으면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내가 비록 가난하고, 알려지지 않고, 허덕이며 산다고 해도 예수 그 분이 내 인생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나는 무한한 가치로 넘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소유했던 배반의 영성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적 영성을 떠나버린 실리적 영성에 치우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소유하셨던 그 창조적 영성. 모든 것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예수님의 그 영성. 그 창조적 영성으로 여러분의 삶도 새롭게 디자인 하십시오. 영성의 대가셨던 주님은 오늘 제자된 우리들을 창조적 영성으로 초대하며 너의 인생을 새롭게 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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