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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배부를 자의 행복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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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를 더듬어 살펴보면 그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놓고 줄달음질쳐 왔습니다. 영국의 인문주의자요 정치가이며 대법관이었던[토마스 무어]가 부르짖었던<유토피아>라는 말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적인 세계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유토피아>는 이 땅에 없습니다. 더 나은 내일과 이상과 꿈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적 세계가 하나님을 거슬리고 인간의 힘으로 건설되리라고 믿는 것은 큰 어리석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죄악과 불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이 의롭게 되지 않는 한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대속의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좀 더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혁명정부를 세우시거나 정치단체를 설립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외치신 메시지가 무엇입니까?“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이상적인 천국과 그 천국의 행복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다가올 수 없는 것임을 증거 해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완전한 행복이란 없는 것입니다.<이상적이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이상적인부부>,<이상적인 가정>,<이상적인 직업>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마는 과연<이상적인 부부>가 존재할까요? 뿐만 아니라<이상적인 가정>도<이상적인 직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인간의 불의가 그 속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란 곧 죄의 문제입니다. 죄 성이 끼어들어 그 꿈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러면 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의란 무엇일까요? 가끔씩 신문에 보면 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리곤 합니다. 언젠가 보니까 손님이 차안에 잊어버리고 내린 지갑을 택시기사가 찾아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현찰 50만원, 신용카드 3장, 거래처 전화번호가 가득 적힌 수첩이 들어 있었다는 내용을 소상히 밝히면서 기사화 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의로운 일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시대가 되어버렸느냐 하는 유감입니다. 어떤 분들이 그래요“막말로 안돌려 주고 자기가 가겼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그래 생각하면 감사하고 의로운 사람이죠. 하지만 그런 생각마저도 값진 시대가 유감입니다. 사실 우리가 냉정히 생각을 해 보면 이런 일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남의 돈 내가 안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남의 돈에 손 안대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슨 자랑거리고 기사거리가 됩니까? 이것이 착한 행실이라고 기사화 되어야하는 사회정황, 우리의 생각과 기준, 가치관 그것이 가슴 아픈 것입니다. 정말 선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남의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돈을 남을 주어야 적든 크든 그게 선행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슈바이처박사]입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아서 많은 돈을 받아 가지고 그 상금으로 자기가 일하던 현지에다 병원을 짓고 약품을 사서 나머지 생을 그들을 치료하며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알베르 까뮈]라고 하는 문학가입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아 역시 많은 상금을 챙겼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교외에다가 고급 별장을 짓고 거기서 향락하고 고급차를 몰고 다니다가 자동차사고로 죽었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말릴 것입니까? 누가 정죄할 것입니까? 내 것이니까 내 맘대로 쓰겠지요. 그러나 거기에<의>가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입니다. 이것이 행복과 불행의 차이 이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내 살 길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과 허세를 부리는 일에 갈망하는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그 갈증을 채우려고 자신의 전부를 바쳐 찾고 애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의’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표준에 의한 도덕적인 의나 행위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준에 의한 완전무결한 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상태요, 하나님의 표준에 의한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의리>라는 게 있습니다.“우리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는 사람 사이의 의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비췬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도 모르고 한번도 전도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보세요, 우리나라에는 유달리 무당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용하다는 무당이라 해도 그 속에는 의가 없습니다. 의란 오직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알아들을만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그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육체적인 욕구에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삶에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먹는 게 우선입니다.<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는 것, 먹는 것, 그리고 사는 집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순서는 유교사상에서 만들어진 용어인 것 같습니다.“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겨를 태우는 불은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불이 느긋하면서도 끊이지 않고 꾸준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불기운이 약하고 신통치 않습니다. 이 속담은 옛날 양반들은 아무리 추워도 이렇게 시원치 않은 겻불은 쬐지 않을 만큼 체면을 중시했다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는 한이 있어도 우선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에서 나온 말인 듯 합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서는 옷이 우선 입니까? 먹는 것이 우선입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먹어야 하고, 그리고 입어야하며 집은 제일 나중입니다. 즉,<식·의·주>란 말입니다.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먹고 일년 정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계속 먹어야 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의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고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 손해 보아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장사를 하든, 사업을 하든 사실이지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 볼 때가 있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희생을 지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해나 희생이 아니라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셨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려고 할 때에도 죽음이라고 하는 큰 희생이 수반되어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대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주어진 의를 늘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것이 곧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의 자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면 나는 의인으로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면 두렵고 떨리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께 무엇이라고 했습니까?“나는 이제부터 아들 자격이 없사오니 머슴꾼의 하나로 대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시고“너는 내 아들이다,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비단 옷을 입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에 아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습니까?“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몹쓸 놈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외양간에서 일꾼으로 살겠습니다.”라고 사양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다. 다 부러지고 넘어졌는데도 아직도 교만은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내 스스로 의롭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이제부터 얼마동안 종살이를 해서 체면을 세운 다음에 아들 노릇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에 관계없이“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체면도 없고 형님의 눈치도 따갑지만 아들 노릇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내 의가 아니라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격이 이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그 의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믿는다는 자격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인이면서, 계속적으로 의인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왜 나를 알아주지 않나!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나!”를 생각하는 하등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대우해 주고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도덕적인 의에서 벗어나야만 하나님나라가 보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막혀서 하나님나라가 보이질 않습니다. 평생 남의 것으로 인심이나 쓰려 하고 그것 붙들고 살다가 자기 것은 하나도 하나님께 못 드린 채 죽어봐야 뭐합니까? ‘의’가 없는 삶은 여느 동물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통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는 체면 따위도, 명예 따위도, 다 벗어 던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으로 배부르며 살고 계십니까? 나를 대접해 주고 인정해 주는 그 맛에 살고 있나요? 곧 허기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대외적으로 명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나요? 철저한 인간관계 속에서만 주리고 목마르다면 곧 영적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준비하고 계신 복은 결코 이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 믿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것으로 배불리시기를 바랍니다. <배부를 자의 행복>은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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