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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받았습니까? (거듭 났습니까?) (요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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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 즉 중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 같아도 그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세를 삽니다. 그 연수가 다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우리는 하루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생명을 마치는 날 인생의 황혼이 지면 우리는 돌아가야 할 집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도 내가 가야할 그곳에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구도자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참된 구도자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이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그 도를 깨달으셨습니까?

대학 다닐 때 부산 남포동을 가다보면 이런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도에 관심 있습니까? 그러면 제가 대답하죠. “제가 도사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말한 도사는 전도사의 줄임말입니다. 예, 세상 사람들조차도 진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무엇이 자신을 구원할 진리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립니다. 그들도 찾기를 원하나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제대로 찾아 왔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월이 진리를 알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직분이나 봉사나 훈련코스가 진리를 깨닫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분문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바리새인이라면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지키고 후대에 전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후에 위선자란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래도 신앙과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들 이었고 어깨에 힘을 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을 보면 ‘니고’는 “탁월하다, 뛰어나다”란 뜻입니다. ‘데모’는 “사람”이란 뜻이죠. 그러니 니고데모는 “뛰어난 사람, 탁월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즉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장10절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선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목사와 교사 같은 랍비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밤중에 왔을까요?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을 겁니다. 그의 신분과 지위로 볼 때 살짝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겁니다. 혹시 오늘 교회 오신 분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계실 겁니다.

사람들에게 교회 다닌다는 말하기가 아직 조심스럽고 교회당을 들어 올 때 주변을 슥 둘러보고 재빨리 들어오시는 분 말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답게 제법 인간관계 처세술이 뛰어난 듯 보입니다. 3장2절을 보면 예수님께 말하기를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칭찬이죠? 그는 예수님을 한껏 높입니다. 대체로 사람들 중에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대방을 띄워주는 것을 잘합니다. 자신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죠.

그가 기대했을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오! 니고데모여 당신은 참 훌륭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으로서 당신의 도덕과 신앙은 참 훌륭합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수고가 많군요. 무엇보다 나를 알아보고 이 밤에 찾아주니 당신은 이름처럼 탐 탁월한 사람이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동문서답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는 칭찬을 듣기위해 오신분이 아닙니다. 이적을 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일을 위해 오신분이기에 니고데모의 현란한 말솜씨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어서 또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점에 관심이 있습니까?

니고데모의 관심은 예수님의 표적, 즉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물어 볼까요? 여러분들은 교회에 오실 때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오늘 설교에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구요?

내 영혼에 관심을 갖고 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리에 목마르시길 소원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씨에스 루이스는 말하기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편하고 과학과 지식이 발달된 시대를 살면서 구도의 열정,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잊고 살아가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의 관심은 니고데모가 거듭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니고데모의 얘기와는 주제가 전혀 다른 좀 엉뚱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에게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유대인중의 바리새인이요 관원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선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나님 나라를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림자도 밟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굉장히 기분 상하는 얘기일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는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심방 중에 초신자들은 별 문제 없지만 오래된 성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웠습니다.

옛날 모태신앙을 가진 안수집사님이 고등부 교사였는데 제가 거듭남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집사님 얼굴이 굳어지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사실을 이야기해야합니까? 정답을 말해야 합니까?” 라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마음에는 이런 영적 갈급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내놓지 못했을 뿐이지 어쩌면 니고데모의 영혼 깊은 곳에 이런 갈망이 있었기에 주님은 그것을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역시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삽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꺼내지 못한 얘기가 이것일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아시기에 단도직입적으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거듭 나셨습니까? 니고데모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 진리를 여러분들은 얼마나 이해하고 깨달아 확신하고 있습니까? 구원 받은 확신이 있는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 구원이 어떻게 내게 임했는지 아십니까?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닙니다.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인생과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오늘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죠지 휫필드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가였는데 거듭남에 대한 설교가 그의 18번 설교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듭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누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까? 누가 거듭 나야할까요?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서 직분이나 봉사의 직임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듭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전도할 때 우리와는 다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한번만 태어나면 두 번 죽고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어요.” 한번 죽는 것은 이 땅에서 영육간의 분리인 죽음을 말합니다. 두 번째 사망은 무엇일까요? 계20장 14-15절을 읽어 볼까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형벌을 말합니다. 

사람이 왜 이런 문제를 안고 있을까요?

창세기를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먼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청지기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에덴동산이라 불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둘째는 죄인은 천국에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어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 값으로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불행이 찾아 왔다고요? 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고,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집인 천국을 떠나야 했으며 죄의 권세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병이기에 인간은 죽게 되었습니다.

사실 구원이란 인간이 가진 이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늘 불안하고 평안이 없었습니다.

어제도 갓난아이 때 네덜란드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 얘기를 방송하는걸 보았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불안정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영적 부모인 하나님을 만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천국을 늘 사모하며 가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북에서 온 분들이 명절만 되면 휴전선으로 통일전망대를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향이 그리워서 그러는 것이죠. 언제나 가슴에 묻고 삽니다. 북한에서 만든 물건을 백화점에서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금새 다 팔렸습니다. 누가 사 갔을까요? 뻔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늘 영적본향인 천국을 그리워하며 삽니다.

셋째,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고질적인 병을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질병조차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어떻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합니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 합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천국을 갈수 있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네, 죄 사함입니다. 죄를 용서 받는 것입니다. 죄사함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물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물은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내가 과거로부터 죽고 새롭게 산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죄 씻음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죄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 값으로 인해 그저 죽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였습니다. 이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갚아줄 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빚을 대신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4-6을 함께 보실까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사이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 짐을 대신 받아지고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시고 내가 받아야 할 죽음을, 내가 받아야 할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요한복음3장16절을 읽고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약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었다면 벌써 이 세상을 심판해 버렸을텐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다니? 그분은 사랑하기를 마치 나 한사람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 하시는도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그분은 나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는 죽음입니다. 누군가 한번은 죽어야 그 권세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 갈 수 없는 당신을 위해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구약시대의 제사법에는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마다 황소와 염소와 양을 하나님께 속죄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물을 끌고 오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를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죄를 전가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잡아 율례를 따라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제물을 드린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짐승의 고통과 비참함을 눈과 귀, 오감을 통해 그 현장에서 느낍니다. 죄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체험하면서 대속제물을 통해 자신의 죄가 용서 받은 확신을 갖고 돌아갑니다.

이렇게 매번 드려지던 속죄물 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단한번의 제사를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께 올린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죄의 은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 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 이름 속에도 죄 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시기에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쉽게 말해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느냐는 것 입니다. 죄 사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난 확실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죄의 은총을 깊이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개인적으로 통회하고 자복하는 깊은 영적 체험이 따라야 합니다. 

또한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6절을 보면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합니다. 7절과 8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성령의 일은 바람 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으나 내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태어남입니다. 영적인 출산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불 뱀 사건을 들어 설명해 주십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 불 뱀에 물려 죽어 갈 때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한 일이지만 정말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았습니다. 믿고 바라보는 일에 생명이 주어진 것 입니다. 성령의 일은 육체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비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는 순간 내 힘으로 해서는 안 되던 모든 일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내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심도 하고 참선과 노력 등을 해도 우리의 인생은 조금도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거듭나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 받았습니까? 거듭나셨습니까? 이것은 다시 태어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이 거듭남이요 구원의 순간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죽음이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순간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이 나의 것이 됩니다. 사죄함 받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분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서 8장에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거듭남은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태어나는 일은 우리의 공로나 선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문제는 선행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만으로 해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인 은혜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 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죄의 권세가 깨어 졌으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사망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일어나야할 신비입니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구원 받았습니까?   
(최학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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