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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민족을 위하여 기도 할 때 (대하 7: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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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은 슬픔과 비통의 한 주간이었습니다. 두 성도를 천국에 보내면서 육신적으로 심히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기에 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하나님의 품예 계십니다. 유족들과 성도들은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생명, 그것은 한 뼘의 길이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침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세월은 베틀과 같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화살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쇠하여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젊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방금 친 천막같이 팽팽하던 우리의 피부는 헌 옷같이 주름이 잡히고, 시냇물같이 맑던 음성은 조율 풀린 악기같이 흐려질 것입니다. 해같이 밝던 눈은 저녁안개같이 뿌옇게 어두워지고,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백발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흙으로부터 온 육신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은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죽음이 영원한 끝입니까?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것은 시작입니다. 나비에게 허물이 벗겨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듯이 죽음은 새로운 세계 천국으로 가는 관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우리는 다 홀연히 변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살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입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특별한 자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환자나, 노년에게만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고 왕성한자에게는 동떨어진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죽음은 지금도 삼킬 자를 찾고자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같이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가운데 항상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는 잠자는 시간에도, 쉬고 있는 중에도 언제나 사냥꾼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결국 죽습니다. 다윗은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성경은 “인생은 그 날의 들의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는 인생, 값지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의 억압과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된지 61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광복주일입니다.
세상에 나라를 잃고 망국백성이 되는 것처럼 슬프고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 나라는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주권을 일본에 빼앗겼습니다.
우리의 선조들, 당시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내몰려 이름없이 피흘리며 죽었습니다. 꽃다운 여성들은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수모와 아픔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시베리아로 강제 징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농사지으면 공출로 빼앗겼고 논과 밭마저도 뺏겼습니다. 어디에 양식을 숨겨 놓으면 대나무로 만든 창으로 이곳 저곳을 쑤셔 보면서 찾아내면 일본 순사들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들도 신사 참배를 강요당했고, 신사참배하지 아니하면 교회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우리 민족이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을 때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변을 보다가, 일본 항복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래서 똥통에 빠졌는데, 똥통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열광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감격이 무디어졌습니다. 광복절은 형식만 남았습니다. 자유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양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한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홀로코스트 추모관이 있습니다. 저들은 나치에 의해 600만이 대학살당한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이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홀로코스트는 “제물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 대학살 사건을 번제로 드려진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으나 돌려받은 것처럼 대학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졌으나 되돌려 받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에 가면 정말 끔찍한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치가 유대인들의 기름을 짜서 만든 비누며, 가스실, 생체실험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장면들 . . . 거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히틀러도 독일도 다 용서는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또 다시 이런 수치와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종노릇하며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초강대국 애굽으로부터 해방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저들은 꿈에도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저들이 해방의 그 감격스런 날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의 한 주축으로 아시아에서 침략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일본과는 맞설 수 있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중국도, 필리핀도 . .

그러나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그리고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원자폭탄은 당시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신무기였습니다. 아직 한 번도 전쟁에 사용된 일이 없던 폭탄이었습니다. 그 위력도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피해란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아무런 조건 없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때에 갑작스럽게 주어졌습니다. 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는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입고서도 최근 우리 한국 사회는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자살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는 이민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민 광풍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우리 사회가 희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철학자의 지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청소년들의 어른 존경심이 아태지역 17개 국가 중에서 단연 꼴지로 조사되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 죽은지 오래입니다. 이혼율도 드디어 세계 1위를 탈환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암 사망율, 음주 소비량, 양주 수입률, 교통사고 사망률 등 . . 안좋은 일에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부패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남이야 죽던 말던 돈만 벌면 된다’는 양심을 잃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불량식품을 만들고, 가짜 참기름, 석회로 만든 가짜 두부, 가짜 약품, 도랑 물 떠다가 설악산 물이라고 속여 파는 현실입니다. 윤리성을 이미 잃어버렸습니다.

신앙마저 병들었습니다. 신앙을 운운하면서 행함이 없는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단은 세상의 모든 나라, 민족을 종으로 삼기 위해 삼킬자를 찾고 있습니다. 죄의 종이 되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폴 마이어가 쓴 ‘코끼리 훈련법’ 이란 책에 보면 서커스단에서 코끼리를 길들인 후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무거운 물건을 코로 들어 옮기기도 하고, 조그마한 기둥 위에 올라가 앞 발 들고 서기도하고, 사람들이 죽 누워있으면 코키리는 사람을 밟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만 밟고 지나가는 묘기도 부립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어릴 때부터의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단단한 밧줄로 묶어 놓습니다. 코끼리는 그 말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끼리의 머리 속에 “나는 말뚝에 매인 줄로 꼼짝 못한다. 아무리 몸부림 쳐보아야 소용이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조련사는 계속해서 말뚝을 작게 하고 밧줄을 가늘게 합니다.
나중에는 성냥개비 만한 말뚝에 실오라기 같은 줄로 바꾸어 놓아도 코끼리는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자신의 코로 1톤 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물건들을 쉽게 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뚝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단은 자기 종을 만들기 위해서 훈련합니다. 이 훈련에 조련되면 사단의 종이 됩니다. 죄의식 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사단은 사람이건 국가이건 민족이건 할 것없이 다 자기 종을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민족은 이 사단의 마술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 . . 어쩌면 많은 교인들도 . . .

문제는 이런 고질병을 우리가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을 또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증입니다. 우리자신들의 문제들입니다. 남의 이야기처럼들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살려면, 다시 일어날려면 이 병을 고침받아야 합니다.
이 고질적인 우리의 병을 누가 고쳐줄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 역대하 7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치유받을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악은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천재지변, 환난을 당하면 빨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회개하며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전도서3:1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놓치면, 반드시 땅을 치며 후회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무한정 주시지는 않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무시하는 자는 마귀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회개가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회개를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회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죄는 죄를 낳고 악은 악을 낳습니다. 작은 죄는 큰 죄로 성장해 갑니다. 죄는 생산성이 있다. 암이 퍼져가듯 . . 핵이 분열하듯 . .
처음부터 간음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하려고 의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다 보니까,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수는 두 번의 실수로 연결되고, 두 번의 실수는 결정적인 실수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끊어 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자 AD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00년 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하며,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600만 명이나 학살당하는 엄청난 사건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부터 끊어야 합니다. 죄가 커지면, 점점 더 회개하기 어려워집니다. 끊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주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가 회개 할 때 그 자리에서 용서해 주시고, 과거에 지은 죄를 묻지 않으시고 낙원을 약속해 주심과 같습니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다(계2:4-5).

2.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회복과 소생의 근본이 됩니다. 겸비한 마음이란 첫째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진정한 회개를 동반하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교만하면 어려움을 당합니다. 교만하면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 .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께 매맞고 돌아오는 것보다 스스로 겸손해지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유와 겸손’하라고 명령하셔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한 짝으로 온유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 원어는 ‘파남’입니다. 이 말은 ‘맞대어 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맞대어 서고, 하나님과 교제할 때,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보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한점 부끄러움없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세운 약속들을 지킵니다. 자기의 편리에 따라 수시로 바꿔가며 헛된 맹세나 하는 자가 아닙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얼굴을 맞대고 산 사람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다니며 적당하게 산 사람은 그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습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잡으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얼굴을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며, 회개기도 할 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했습니다.
악을 버리고 겸손히 기도할 때 민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사회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가정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개인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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