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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신앙인 (마 1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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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은 마태복음의 4번째 가르침 단락에 속하며, 주님께서 세우실 교회 곧 성도간의 관계를 다룹니다. 14절까지는 큰 자와 작은 자에 대해서, 15절 이후에는 용서에 대해서 교훈했습니다.

“그 때에”, 곧 예수께서 세상의 왕들이 관세나 주민세를 아들들에게는 면제하고 타인에게서 거둔다는 말씀을 하셨던 그 무렵에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들이 권세와 힘을 가진 자들이 큰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온갖 특권을 누리는 로마제국은 큰 나라였습니다. 반면 착취당하는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였습니다.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도 권세와 힘으로 군림하는 자들을 큰 자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고 대답하셨습니다(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3-4).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은 확정된 사실로 생각하고, 그 천국에서 어떻게 큰 자가 될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상태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를 높이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부패한 왕이나 압제하는 로마제국보다 높은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기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를 꿈꿨습니다. 높은 자가 되는 것이 언제나 제자들의 관심사였지만,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자 감추어 두었던 욕망들이 서서히 표면화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늘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면 한 번 떵떵거리며 군림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은 그들을 결코 높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입니다. 그들도 큰 고난에 직면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의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아무리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셔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라 말씀하셨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그동안 겪었던 못 가진 자의 서러움을 한 방에 날려줄 만큼 ‘높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상태, 주님의 말씀과 전혀 반대로 해석하는 상태, 주께서 ‘아니라’ 말씀하신 것을 간절히 기대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참으로 제자들은 돌이키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큰 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1:11절에,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작은 자와 큰 자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큰 자가 되려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큰 자’의 자체를 잘못이라고 정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방법입니다. 베드로전서 5:6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는 것’은 자기 욕망입니다. 그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루어져도 금방 깨어져버립니다. 열왕기상 1:5절을 보면, 다윗 왕의 아들 중에 아도니아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멸망했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따라 솔로몬을 높여주셨습니다. 이처럼 ‘높아지려는 것’은 자기 욕망이지만, ‘높여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교회의 사도로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대단한 권위와 권세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증거 했던 말과 글 중의 일부는 성경이 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자세를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지를 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2)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각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자 그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부르시면 부르심에 순종하고 세우시면 세우심에 순종할 뿐 스스로 높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욕망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부담스러워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신뢰하고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가 꼭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불신자와 똑같이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은 스스로 자기를 높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한 없이 낮추지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는 자기를 낮추셨고,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제자의 삶을 살면서도 이 땅에서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다면, 그러한 마음의 태도를 단호하게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님께서 귀하고 크게 여기신 자들을 실족케 하는 문제를 다루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고 세우신 어린 아이는 제자의 무리에 섞여 있는 작은 자요 약한 자로 대부분 무시당하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큰 자’가 되려는 제자들의 경합에 끼일 수조차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5-6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한 어린아이를 당신님과 동등할 만큼이나 귀한 자요 큰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영접함을 당신님을 영접함으로, 그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대단한 중죄로 다루셨음을 보게 됩니다. 

소자들을 실족케 하는 이유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 속에서 본다면, 그들을 천하고 작은 자로 여기고 함부로 취급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낮추는 자를 오히려 짓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이용해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수하게 순종하는 자는 불이익과 손해를 당하게 합니다. 세상 공동체에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귀하고 크게 여긴 자들을 실족케 하는 일이 많을수록 화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죄인들끼리 모여 있는 사회가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용서는 받고 의인이라 칭함은 받았으나, 여전히 죄악 된 본성이 남아 있어서 완전치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공동체라 할지라도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한 순간 높아지려고 경쟁하다보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깎아내리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7).

그러므로 어느 정도까지 조심해야 합니까?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8-9). 만일 내 손이 연약한 자를 함부로 취급하여 상처를 준다면 차라리 잘라 버리는 것이 낫고, 내 눈이 비천한 자를 깔보고 무시하여 모멸감을 느끼게 한다면 빼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소자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는 태도를 간직한 채 영생에 들어갈 수 없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처럼 힘과 세력을 가지고 군림하는 자를 크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스스로 낮추고 사는 자는 힘과 세력이 없으므로 오히려 무시당합니다. 계급과 서열에 대한 관심과 알력으로 기독교계는 당회나 노회나 총회가 정치단체처럼 권모술수를 사용합니다. 이제는 그 모습을 감추려 해도 불신자들 앞에까지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는 화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산에 두고 가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분, 그리고 찾으면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시는 분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12-14).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순종하려는 태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은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꼴을 먹지 않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 스스로 높아지려했습니다. 이런 욕망으로 인한 서로 무시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참으로 큰 자,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은 스스로를 낮추며 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자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그들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소자를 귀히 여기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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