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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8) (수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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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은 제가 제 아내와 결혼 한지 29년이 되는 주간이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인천제일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있을 때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개는 ‘그때 연애를 했는가 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와 결혼을 생각한 것은 인천제일교회를 떠나 서울로 온 후였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도 아내에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혼 상대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나와는 전혀 성격과 성향이 다른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극히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인데 아내는 상당히 활발하고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나하고는 안 맞는다고 생각이 되어 내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고 하였습니다. 여름성경학교 때 그 친구를 인천으로 내려오게 하여 교사를 하게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만남을 주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여름성경학교 교사를 할 줄 알았던 아내는 마침 그 때 학교 연수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 친구와 아내와의 만남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상대로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끔 만나 이야기하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대화가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이지만 그때 저는 이런저런 책들을 나름대로 아주 깊이 읽고 있는 때였습니다. 물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 시험 때도 상관하지 않고 시험과 상관없이 그냥 읽던 책을 읽을 정도였습니다.

신학생은 생각처럼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쫓아가야만 할 학업의 양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교회에서 대개 교육전도사일을 병행하여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책 한권을 붙들고 사색을 하면서 꼼꼼히 읽을 여유가 대개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보편적으로 볼 때 신학생들은 이것, 저것 넓게 아는 것은 많은데 정작 깊이 아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좀 싫었습니다.

저는 학교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내 나름대로 몇 권의 책이라도 깊이 생각하며 읽었기 때문에 학교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으나 제 나름대로의 생각은 조금 깊었던 것 같았습니다. 학교 공부를 위주로 하던 친구들은 학교 성적은 좋았으나 자기 나름대로 하는 생각의 깊이는 대신 그렇게 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때문에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 생각처럼 깊은 대화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만나면 뜻밖에 대화가 깊어지곤 하였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말 통하는 여자와 살게 해 주세요’였습니다. 아내와 말이 통하는 것을 느낀 후 서슴없이 아내와 결혼을 결정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성향의 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29년을 함께 산 지금 제 결론은 팔불출 같은 소리이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아내와의 결혼생활에 있어서 정말 축복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아내의 나와 다름’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와 저와의 다름이 위기의 요인이 얼마든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될 때 그것은 반대로 엄청난 축복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회가 있어서 광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목회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감옥 생활을 몇 년씩 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만나기전 이런저런 상상을 하였습니다. 저와는 달리 과격하고 좀 사나운 분들 일 것이라는 식의 상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다 더 내성적이시고 순하신 분들처럼 보였습니다. 그 분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저런 분들이 어떻게 저런 과격해 보이는 민주화 운동의 선봉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였었습니다.

저와는 생각하는 식과 철학이 거의 전혀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추구하는 것과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날 그 분들과의 대화가 매우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서로 말이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그런 감동을 받게 되면 그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 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그 날 이후 제 삶의 철학과 삶의 방향이 바뀌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 제가 저들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제 삶의 폭이 조금 넓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잘 동의가 되지 않는 사고방식과 철학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그렇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에 대한 깊은 감동을 느끼면서 저들이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내 좁은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그런 황홀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쉽게 이야기하자면 나만 옳은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일생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함부로 레프트니 라이트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혹시 한다고 하여도 나와 다른 쪽 사상과 의견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경우 생각의 다름 때문에 열띤 토론을 하면서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매도하는 일은 최소한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말과 기준에 의하면 저는 타고난 성향이 라이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대체적으로 볼 때 라이트처럼 생각하고 라이트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저는 함께 일할 파트너를 정하라면 라이트 보다는 레프트를 택하고 싶습니다. 아주 위험한 발상일는지 모르지만 마음에 맞는 좋은 레프트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정말 확률은 높지 않은 일이지만 서로 충돌하지 아니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낼 수만 있다면 훨씬 더 근사한 진리에 가까운 일들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좌우명처럼 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라는 것일까요? 좌에도 우에도 간여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좌와 우는 다 틀렸다는 말씀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꼼꼼히 생각해 보면 좌도 우도 그 하나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왼 손 잡이가 있고 오른 손 잡이가 있듯 생각과 사상에도 좌와 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우 라고 우로 치우치고, 자기가 좌라고 좌로 치우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다르다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충돌하지 말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생각에 자기의 부족함을 채울 것들이 있으니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 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 찬탁과 신탁으로 갈리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라가 양분되어 깊은 혼란에 빠졌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양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뿌리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지도 모릅니다.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당파를 짓고 서로 죽고 죽이던 당파싸움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요즘도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하게 대두되는 말 중의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어떤 면에서보면 그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물론 아닐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그와 같은 혼란과 갈등의 역사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대개가 이와 같은 것의 문제를 인식하고 후진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이와 같은 이념과 좌우의 갈등을 잘 조화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면으로만 보면 빠른 속도로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념과 좌우의 다름을 갈등으로 풀지 않고 조화로 풀어나가는 면에서 우리나라는 아직도 여전히 후진국입니다.

보수와 진보, 레프트와 라이트는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언어 중에 하나입니다. 보수에는 보수의 문제와 한계가 있고, 진보에는 진보의 문제와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진보에도 일리가 있고 보수에도 일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보수나 진보 그 어느 하나만으로 온전한 진리에 이를 수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보수는 보수만이 옳은 것 같고, 진보는 진보만이 옳은 것 같아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대개 자기만이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삽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살아가는 세상을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척결하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만이 사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저는 그와 같은 생각이 가장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좌와 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사랑하는 진심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진심이 없다면 좌든 우든 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를 주장하고,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좌를 사랑한다면 그 좌와 우는 진리를 사랑하는 진심이라고 하는 면에서 서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우이기 때문에 우를 고집하고 자기가 좌이기 때문에 좌를 고집한다면 통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좋아하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이 아닐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 곧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의 진심이 있다면 좌와 우가 다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자기 고집과 자기 이익을 위하여 좌를 고집할 때 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은퇴를 할 나이는 아니지만 저는 벌써 은퇴를 준비해야만 하는 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를 한 후 교회 일에서 손을 뗀 후 어떤 일을 하였으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그러나 아주 심각하게 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청년들에게 정직과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하고 싶습니다. 학교는 너무 거창하고 서당 같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정직과 평화를 연구하는 연구소를 만들어 어떻게 하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정직과 평화를 보다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교육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가 뭐 그런 것을 가르치려 하는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 저하나 손을 뗀다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정직과 평화를 가르쳐도 성경을 떠나서 가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저는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정직과 평화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무엇보다도 건강한 토론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을 존중할 줄 알고, 나와 다른 의견과 생각도 존중해 줄 줄 아는 것을 훈련시키고 싶습니다. 자기와 다른 성격과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내가 배우고 채워야 할 나의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정말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러나 자신의 소신을 함부로 버리지는 아니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인정하며 사랑하며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과 주관이 분명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충해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저와 전혀 다른 아내와 살면서 느끼는 사랑과 행복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내가 어느 날 광주에서 나와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면 느꼈던 사람에 대한 감동을 느끼게 해 주고 싶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무조건 배격하여 뿌리를 뽑아 버리면 충돌을 없어져 좋을는지 모르나 조화도 함께 없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대상이 화합할 때 나타나는 다이나믹을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사람이 좌든 우든 스스로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타고나는 것만으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타고나지 않은 것은 학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것과 타고나지 않은 것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보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진리는 보수이어야 하지만 진리를 보수하려면 보수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수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진보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진보하지 않으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진리를 보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보수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란 진리를 의미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늘 새로운 포도주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진리는 늘 새롭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수입니다. 그러나 늘 새롭다는 면에서 진보입니다. 보수란 낡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수는 낡은 것을 지킨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진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변하는 것이 싫어서 부담스러워서 보수를 외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보수를 의미합니다. 포도주는 변치 않는 그래서 늘 새로운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힘써 지켜야만 한다는 면에서 포도주는 보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새 부대는 진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진보하지 않으면 보수 할 수 없다. 보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는 진보를 함께 좋아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참 근사한 말씀이 아닙니까?

저는 진보가 좋습니다. 저는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개혁하고 진보하여야만 진리를 보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진보 없이 보수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좌도 진보하여야 하고 우도 진보하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진보주의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 땅에 과연 진정한 의미의 진보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좌든 우든 다 보숩니다. 사람들은 좌를 진보 우를 보수라고 지칭하지만 제가 볼 때 좌도 보수 우도 보수입니다. 좌도 진보하려고 하지 않고 우도 물론 진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꼴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보수꼴통 보수 꼴통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진보도 꼴통들입니다. 진보하는 진보는 우리 세상에서 참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진보없이 보수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진보하여야만 새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보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좌가 진보하면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점점 우가 됩니다. 우가 진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점점 좌가 됩니다. 그러므로 좌와 우가 자기 편견과 아집과 고집을 버리고 새 부대를 준비하는 심정으로 늘 진보하다 보면 어느 한 점에서 서로 만나게 될 겁니다. 좌와 우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머리에 띠를 띠고 ‘좌는 단결하라!’ ‘우는 단결하라!’ 하지 않고 좌와 우가 서로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진심과 끊임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기 부인과 개혁에 충실 한다면 나는 좌와 우의 문제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조화의 문제가 되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우리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우리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지도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지도자가 되라는 말씀의 깊은 뜻과 의미는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좌와 우를 다 품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사는 동안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좌와 우를 충돌케 하지 말고 조화케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진심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입장을 가지되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을 버리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계속 진보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개혁과 진보의 교훈을 자기와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서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좌와 우를 편 가르기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좌와 우를 화합케 하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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