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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마나 엎드려야 주실까?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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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때는 금방 응답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물론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내 욕심으로 구하면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 뜻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다급해지면 누구 뜻인지, 누구 욕심인지를 떠나서 우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의사가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낫기를 구하고 봐야 합니다. 암에 걸렸는데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그냥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병 걸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나아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도 더 낫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고 죽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방법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혼자 표류해 무인도에 도착했습니다.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우선 움막을 지어야 했습니다. 맨손으로 나무와 풀잎을 엮어 움막을 만들었습니다. 부드러운 손이 그만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며칠이나 걸려 간신히 완성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먹을 것을 구해야 했습니다. 꼬챙이를 만들어 물고기를 어렵게 잡았습니다. 불이 필요했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을 만드는 일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몇 시간을 비벼대며 간신히 불을 얻었습니다. 덤불을 태우면서 불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불씨가 날렸습니다. 하필 불씨가 어렵게 만든 움막에 붙었습니다. 순식간에 움막이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까요. 그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살아 보겠다고 이렇게 힘겨워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힘들여 집을 지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렇게 소리를 치고 있는데 저쪽에서 커다란 배가 섬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배는 섬 뒤쪽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방향을 돌려 왔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던 것이 멋쩍어집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무응답도 그런 점에서 최선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다급할 때 하나님의 무응답은 정말 답답합니다.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무응답에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인지 알면 믿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정이 절박한데도 주님의 응답은 의외로 냉소적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여인은 주님의 무응답과 냉소를 이겨냅니다. 결국 응답을 받아 냅니다. 큰 칭찬까지 받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 기도가 막힐 때, 거절당할 때, 어찌해야 하는지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을 나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에서 서북쪽에 있는 해안도시입니다. 직선거리로 50 Km 정도 됩니다. 시돈은 그보다 36 Km 정도 더 위에 있는 도시입니다. 이 두로와 시돈 지역은 이스라엘을 벗어난 이방지역입니다.

예수님이 그 먼 곳까지 여행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려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선교 목적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쪽의 이방지역으로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역에서는 조용히 쉴 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지중해 바다를 끼고 경관이 좋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역을 잠시 쉬면서 피정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은 성경에 가나안 여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이름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이방인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이름입니다. 마태는 일부러 이 여인을 가나안 여자로 소개하면서 이방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새 두로와 시돈 지역에까지 퍼졌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당장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소리를 치며 다가왔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는 예수님에 대한 호감을 표하는 것입니다. 주란 호칭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에 대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런 호칭과 큰 소리는 충분히 예수님의 관심을 끌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딸이 귀신들렸다는 절박한 호소를 못들은 척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귀신들림에 대해서 아주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고통을 느끼게 해 주는 단어가 흉악히 귀신들렸다는 것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귀신들림도 여러 가지 증세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딸이 어떤 증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현상이 흉악하다는 것입니다. 고운 딸이 귀신들려 흉악하게 변했습니다. 어미 된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이 귀신들림은 고질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학적인 방법으로 낫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귀신을 내쫓는 능력자를 통해서만 나을 수 있습니다. 흉악한 귀신이란 그 피해 정도가 심한 것입니다. 쉽게 나가는 귀신이 아닙니다. 동네 무당이 쫓을 수 있는 허접한 귀신이 아닙니다.

치료를 위해서 안 해본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예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소리를 질렀건만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오히려 청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여인이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아주 끈질기게 청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리를 지른 것은 악착같음을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듣기에 그 소리가 성가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내자고 한 것은 그냥 내쫓자는 것이 아닙니다. 소원을 들어주기 전까지 떨어지지 않을 여자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고 보내자는 청입니다.

이 제자들의 청에는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이 여인의 청에 대꾸를 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은혜를 베풀 사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방지역에 머물긴 하지만 사역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선 은혜 베푸는 일을 중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휴가중’이므로 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는 의외입니다. 평소 인정이 많으신 예수님답지 않습니다. 남의 안타까운 사정을 외면한 적이 없으십니다. 또 규칙과 법에도 그다지 얽매이는 분이 아닙니다. 규칙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여인의 청을 거절하고 계실까요?

그 거절 이유도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이 여인이 이방여자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부터 인종 차별을 하셨습니까? 언제부터 유대인들에게만 은혜를 베풀었습니까? 모두 억지로 보입니다.

여인은 분명하고 명백한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더 적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예수님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뒤에서 소리만 질러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었나 봅니다. 그녀는 엎드려 애절하게 애원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더 냉정해지고 말았습니다. 애원하는 그녀에게 하신 대답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녀는 유대인을 말합니다. 개들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유대인에게 베풀 떡 즉 은혜를 이방인에게 던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을 개로 여기는 것은 보수적인 유대인들의 편견입니다. 그래도 이방인에게 직접 개란 표현은 하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수군대며 이방인들을 깔볼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직접 개란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것도 평소 예수님의 이미지를 구기는 일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런 과격한 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눈을 의심할 지경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태도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소리 질러도 안 되고, 엎드려 절을 해도 안 되고, 애원해도 안 됐습니다.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노골적인 모욕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엎드렸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을 이렇게 받아쳤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대답으로 예수님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아주 크게 기뻐하면서 이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마지막 칭찬과 허락의 말씀이 이제까지의 모든 의혹을 씻어줍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이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믿음의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기도 응답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절박한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더딘 까닭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못하심이 아닙니다. 기도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끈기 있게 기도하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기도에 공을 들이거나, 횟수를 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력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분량을 채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기도의 분량이 찰 때까지란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보지 못하는 말입니다. 기도는 그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 목적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면 바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간구는 다릅니다. 간구는 주로 삶속에서 절박한 문제를 놓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라고 하기에 부족한 면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간구는 응답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테스트 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포기합니다. 여러분! 응답이 없어도 기도를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르짖어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끈기를 보십니다. 한 두 번 기도하고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나쁜 조건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무응답은 기도의 최고의 적입니다. 허공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 같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못들은 척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계속 듣고 계시니까 염려 말고 계속 기도하십시오.

다음은 거절까지도 이겨야 합니다. 기도하는데 거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거절도 명백한 기도 응답입니다. 기도하는데 거절이란 응답을 받았다면 그것보다 확실한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가 간구하다가 거절당하면 어찌합니까? 당연히 기도를 중단합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서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하는데 거절당해도 중단합니까?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거절하셨다고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이시란 뜻에는 인간적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라 법도 상황 앞에서는 예외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일이 없겠습니까?

비록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애원하는 간구는 다시 재고하십니다. 그러니 거절당해도 포기하지 맙시다. 기도가 비윤리적이고, 비신학적이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하고 간구하는 것이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거절뿐만 아니라 모욕까지도 이겨냈습니다. 보통 사람의 간구의 한계를 넘는 정말 거룩한 기도입니다. 여인은 딸의 절박한 문제를 놓고 이런 끈기 있는 기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또 엎드리면 어떤 문제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기를 즐겨 하십니다. 믿음의 테스트가 있을 뿐입니다. 끝가지 엎드려 기도로 형편을 아뢰십시오. 엎드려 간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응답이 될 줄 믿습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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