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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고전 13:4 ; 삼상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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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 특징으로 오래 참음과 친절을 들었습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좀더 세분해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노래합니다. 즉 사랑이 하지 않는 8가지를 제시합니다. 이 8가지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많은 슬픔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능력이 우리 자신 안에는 없습니다. 사랑의 위대함이란 바로 우리를 8가지 굴레에서 해방시켜주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8가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발견하고 그 능력을 덧입는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선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생각해봅시다.

1. 시기의 뜻

시기는 두려움과 상실의 고통입니다. 시기는 단순히 부러워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승엽 선수가 최근에 전세계에서 세 번째로 30대 이전에 홈런 400개를 날리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일반 시민들에겐 부러워할 일은 되어도 시기할 일은 못됩니다. 그러나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거나 그를 뛰어 넘고 싶은 동료야구선수들에겐 시기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승엽 선수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가 팬들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제3의 존재가 나타나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나에게서 빼앗아 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때 갖게 되는 상실과 배제의 고통입니다. 이런 시기는 에로스 사랑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에로스는 본질적으로 시기를 동반합니다

에로스란 자신의 필요에서 비롯되는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의 모든 것을 그에게 주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피차 독점적 관계를 누리고 싶어하는 열정입니다. 상대의 어떤 부분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둘이 완벽하게 하나되고 싶은 열망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그 사이에 끼어 들어 상대의 일부분이라도 가져가려고 하면 나는 두려움, 상실과 배제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끼여드는 사람에 대하여 미움과 증오를 갖게 됩니다. 이런 부정적 감정의 총체가 바로 시기입니다. 에로스 사랑을 하려면 언젠가 이런 시기와 맞닥뜨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젊은 남녀들은 종종 환상적인 사랑을 꿈꿉니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결혼하여 언제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다가 무덤까지 그 사랑을 갖고 가는 그런 낭만적인 꿈 말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판 뉴스위크지를 통해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빌리그래함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 흥미 있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부시 전대통령의 부인인 바바라 여사가 빌리 그래함의 부인 루스에 대해 전해주는 일화입니다. 루스가 한 번은 인터뷰를 하다가 '당신은 크리스천 여성으로서 이혼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이 때 루스는 '이혼이요? 아니요! 살인이요? 예!'라고 대답했답니다.

아무리 이상형이라고 해도 살아 보면 약점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조만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고 상대 외에 다른 것에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시기심을 작동시키는 순간입니다. 옛날엔 그 지점에 이르는데 대강 3년은 걸린다는 통설이 통했는데 요즘은 신혼의 유효기간이 아예 없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원한다면 남녀사랑을 아예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시기는 단순히 남녀사이의 애정에만 동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정에도 동반될 수 있습니다. 나와 절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절친하게 지내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친구를 뺐길 것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시기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생길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하나일 때 그 자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죠. 어머니의 사랑이 분산됩니다. 엄마 젖은 동생의 독차지가 됩니다. 아무래도 엄마의 관심과 애정은 어리고 약한 동생에게 더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형, 오빠, 언니, 누나가 느끼는 고통이 바로 시기입니다. 그 시기는 급기야 부모가 보지 않을 때 동생에게 다양한 해코지하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꼬집고 때립니다. 매우 귀찮게 굽니다.

그러면 시기 자체가 죄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에로스는 우리 자신을 계발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창조해나갈 수 있는 에너지와 열정을 제공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합니다. 지나치지만 않으면 시기심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에로스를 피어나게 하는 원천이요 그를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줍니다.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해서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는데 내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혼과 가정은 근본적으로 파산된 것입니다. 건전한 시기는 둘을 하나로 만들어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그런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도 스스로 선언하신 것처럼 '시기하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 20:5).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이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볼 때 깊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느낍니다. 그 점에서 시기는 고맙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적당한 시기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 당한 이들을 위해 열심히 구제헌금을 했는가를 알려줍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바로 그 일에 뛰어나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밝힙니다: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성을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사랑도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  뿐입니다'(고후 8:1-8). 그런가하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일년 전부터 구제헌금을 준비하고 있다고 자랑하여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자극을 받아 분발하게 되었노라고 말합니다(고후 9:2). 건강한 시기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분발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면 시기가 언제 문제가 됩니까? 적절한 수준을 넘어 자신과 남을 파괴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닫을 때입니다. 변심하고 배신한 배우자를 증오하고 그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시기심이 커지면 파괴적이 된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일체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을 허용하지 않고 나에게만 절대적으로 묶어 두려고 한다면 시기심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전한 것이겠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시기도 도가 지나쳤다면 우리들의 삶은 훨씬 가난해지고 비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교제할 때,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시고 슬쩍 우리 곁에 오셔서 축복해주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이 우상을 향할 때마저도 슬퍼하시지만 잘못 나갔다 돌아올 수 있는 자유의 여백과 공간을 허락하십니다. 앞서 예를 들은 고린도교회와 마게도냐 교회의 경우에도 시기심이 지나쳐 상대교회가 은근히 망하기를 바란다거나, 약점을 잡아 비방한다거나, 기분 상한다고 '나 안해' 하고 삐져서 비협조적으로 나간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절제되지 못한 시기의 불행한 말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은 아마도 사울일 것입니다(삼상 16:14-18:11). 처음엔 사울이 다윗을 무척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며 사울에게서 악한 영을 좇아내 주고 상쾌한 기분을 회복시켜주고, 골리앗을 보기 좋게 거꾸러뜨려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 까진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울에게 위기의 순간이 왔습니다. 다윗의 전쟁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 참여했다가 그는 환영의 춤을 추며 노래하는 여인들로부터 충격적인 노래를 듣게 됩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사울은 이를 단지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었습니다. '내 부하가 이렇게 칭찬을 받다니 짐도 흐뭇하구나'라며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든든하게 믿었던 군사령관 다윗이 백성들의 존경과 칭찬을 자기에게서 빼앗아 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다윗이 이제 왕의 자리까지 거머쥐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다윗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사랑에서 시기로 바뀌고 맙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데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소모하다가 정작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자살함으로 비참하게 그 불행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여기에 에로스의 한계가 있습니다. 에로스는 적절한 시기심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나 시기심이 폭발하여 에로스를 파국으로 몰아갈 때, 그것을 스스로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에로스에겐 제한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명령 중에 아주 어려운 것이 있지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우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내 가슴으로 같이 느끼며 같이 울어주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내 코가 석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승리와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 곁에 가서 마음으로부터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인기를 한껏 누리던 미모의 여자아나운서가 굴지의 재벌2세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얼마 전 공개되었습니다. 자기랑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배아픈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경쟁적인 위치와 입장에 있는 사람의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에로스로선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에로스의 한계를 극복하여 시기심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페 사랑으로 귀의하는 것입니다.

3. 아가페는 시기를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아가페는 시기를 무조건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가페는 시기심이 적절한 경계선 안에 머물어 있어 긍정적인 역할만 하도록 통제해줍니다. 아가페는 시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와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가페는 사랑의 대상에 항상 최선을 원합니다. 그가 잘되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나의 행복입니다. 그가 잘됨으로 내가 소외된다고 해도 그 행복이 나의 상실의 고통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 중에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다윗으로부터 더 직접적인 위협을 느껴야 할 사람은 사실 사울보다는 왕위 계승자인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단이 다윗을 싸고도는 것을 보며 사울은 답답해 미칠 듯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 바보야, 다윗이 살아 있으면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설 수 있을 줄 아냐(삼상 21:30-31)?'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요나단은 놀랍게도 왕위경쟁대상자인 다윗을 진실하게 사랑했습니다(삼상 18:1-4).

다윗이 아버지 사울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초기부터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로 묶여졌습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페쉬(vp,n<)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 혹은 생명체가 되었다고 했을 때, '사람' 혹은 '생명체'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창 2:7). 요나단이 다윗을 제 목숨처럼 사랑했다고 했을 때에 사용된 '목숨'이란 단어도 네페쉬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의 전존재와 다윗의 전존재가 하나로 연합되었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란 예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한 셈입니다.

그 사랑의 진정성은 이어지는 행동에서 그대로 반영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굳게 언약을 맺습니다. 그 징표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줍니다. 심지어는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모두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다윗을 자신의 영원한 친구요 동지로서 나라를 지켜낼 용감한 장군으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왕의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다윗에게 넘겨줄 용의가 이미 있음을 넌지시 보여줍니다. 대단한 용단입니다. 요나단도 다윗 못지 않은 신앙과 용기,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청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은 아버지와 함께 전사할 때까지 추호에도 흔들림 없이 지속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너무 고상하고 아름다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은 요나단과 같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몇 세기만에 한번 겨우 탄생할까 말까하는 사랑일까요? 아닙니다. 그 사랑은 요나단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요나단 안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절망이자 놀라운 희망입니다.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그의 사랑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에 초점을 맞춰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철저히 모시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다윗과 기약 없는 이별을 예감하면서 다윗에게 그의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인자함을 자기와 자기 집에 베풀어 줄 것을 부탁한데서도 잘 나타납니다(삼상 20:14-16).

바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변화되기 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실로 차가운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지성인이요, 자신이 악이라고 판단한 바에 대하여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시절 이미 스데반에게 돌을 던진 증인들의 옷을 맡아 지켰습니다. 돌에 맞아 신음하며 죽어 가는 스데반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어 그는 유대교의 이단아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박멸하는데 앞장섭니다. 사랑이라고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이었죠. 그러나 변화된 후, 눈에 눈물이 말을 날이 없는 놀라운 사랑의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바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일까요? 아닙니다. 굳이 특별한 것이 있다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씨름하다 결국 마음을 활짝 열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존재 전체를 사로잡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여기에 아가페 사랑의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하여 그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의 존재 밑바닥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바울이 투옥되자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더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통해서도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너무 기뻤기 때문입니다(빌 1:12-18). 대단한 경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한 우리도 모두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요즘 제 마음에 자주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비행기의 공중급유 모습입니다. 파이프로 연결하여 주유비행기로부터 기름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면 하늘을 계속 날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시는 성령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에로스의 땅으로 추락하지 않고 아가페 사랑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사랑의 떡과 잔을 달라고 항상 기꺼이 졸라대는 '즐거운 거지'가 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존재 가득히 채워지게 합시다. 하여 아가페 사랑의 길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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