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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자는 교회를 깨우는 주님의 음성 (계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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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간에 저는 강원도 평창, 고향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만은, 이전에는 동해안 바닷가 쪽으로 갈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속초에 가면 대포항이라고 있는데 그 곳은 오징어가 많이 나는 곳입니다. 6, 7월에 가면 오징어가 풍년인데 돈 만원 내면 열 마리에서 많게는 스무 마리는 너끈히 살 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오징어가 많이 잡힐 때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인가 갔더니 태풍이 불어 오징어 배가 출하를 못 해서 오징어를 잡을 수 없어 흉년이 들었습니다. 오징어 한 마리에 만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먹나 가격 때문에 엄두가 안 나 혹시 싼 것이 없나 하고 이 곳 저 곳을 둘러보았더니 시장 한 곳이 오징어 열 마리에 만원이랍니다. 여기는 왜 이렇게 싼가했더니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죽은 오징어였습니다. 많이 잡혔을 때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이렇게 희귀했을 때 내 놓는 것인데 그것은 값이 아주 쌌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있는 오징어를 비싼 값을 주고 사먹으려고 합니다. 살아있는 오징어와 죽은 오징어는 근본 맛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성도와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봅니다. 죽은 성도와 살아있는 성도의 차이, 죽은 교회와 살아있는 교회의 차이는 주님 앞에 실로 대단할 것입니다.

  찰스 알렌이라는 교회 성장학자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자신을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20%는 전혀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교인들 중에 25%는 거의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며, 교인들 중에 35%는 가정에서 성경을 읽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신문은 읽고 텔레비전은 켤지언정 집에서 성경을 펴서 읽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들 중 40%는 일정한 헌금을 결정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얼마나 할 지, 감사헌금을 할지 전혀 결정을 안 하고 기분 나면 하고, 아니면 안하고의 헌금생활을 합니다. 교인들 중 75%는 교회에서 어떤 책임도 지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내가 오늘 교회 안 나간다고 교회가 안 될 일이 없거든요. 성가대를 하고 있다면 내가 빠지면 성가대석이 비겠지만 아무 책임이 없으니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75%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교인 중 85%는 불신자를 한 명이라도 교회에 인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전도를 해 본 적이 평생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교인들 중에 100% 전부가 천국에 가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몇 점짜리 성도라고 자신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옆의 성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교인입니까? 죽은 교인입니까?”
  남한테 안 물어봐도 나 자신이 내가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성경에서는 죽은 교회, 죽은 성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이어 오늘은 다섯 번째로 사데 교회에 대해 살펴 볼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너는 죽은 자!”라고 사형선고를 받은 교회입니다. 이 사데 교회가 있었던 사데라는 지역을 먼저 살펴 본다면,  두아디라 남동쪽 약 48키로를 내려가면 지금의 터키의 옛 지명인 리디아가 있는데 거기의 수도가 바로 사데였습니다.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매우 번성한 도시였고,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들은 염직공업으로, 양털 염색으로, 금모래로, 아주 부강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금을 채취해서 내다 팔았고 무역을 했고 넉넉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사데라는 도시는 사치와 부의 도시로 상징되었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의 전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사데 도시는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남쪽만 제외하고 삼면은 다 절벽으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성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가리켜 난공불락의 요새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보초병이 필요 없고, 군사도 필요 없습니다. 왜 입니까? 왜적이 쉽게 침입해 들어 올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더욱 그들은 자만과 안일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난공불락의 요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 속에 두 번이나 정복당한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B.C 6세기에 바벨론의 고레스의 공격을 받아 완전 정복을 당했고, 200년 후 안티오쿠스의 공격을 받아 또 정복당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도시 안에 속한 사데 교회도 역시 자만과 안일에 빠졌고 서서히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1절 말씀 읽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아멘.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는 죽은 성도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데 교회의 심장에 청진기를 대고 그들을 진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고는 네가 죽은 자로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훌륭해 보이지만 사실은 유명무실한 교회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가 왜 죽은 교회가 되었을까요? 왜 죽은 성도가 되었을까요?

  첫째는 극도의 형식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인 형식주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껍데기 신앙입니다. 껍데기는 화려하고 그럴싸했지만 그들의 속은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형식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형식이었습니다. 형식만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외형만 중요합니다. 내 속 사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내 중심을 드리느냐가 예배의 성공여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얼마나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봐 주느냐 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의 형식주의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말하는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실까가 중요합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어린 아이가 자꾸 손가락을 빱니다. 더러운 손가락을 자꾸 빠니 안되겠다 싶어 너 자꾸 손가락 빨면 배가 풍선처럼 불러질거라고 엄마가 엄포를 놓았습니다. 아이는 무서워서 그 후로 안 빨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옆 집 아줌마가 놀러 왔는데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배가 이만큼 불러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달려가서 뭐라고 했을까요? “난 아줌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아요.”^^ 이 아이 보기엔 아줌마가 손가락 빤 거 다 안다 그런 얘기지요.

  주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우린 형식주의를 제일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칭찬도 하시지만 책망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예외 없는 책망의 대상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사씨와 바씨를 미워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거짓된 행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전체를 봐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 비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여, 언제까지 외식과 불법을 일삼겠느냐고 경고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신앙이 우리가 볼 때는 훌륭합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십일조를 다 드리고,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구제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왜 비판하실까요? 바로, 그들이 형식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안보다 밖을 더 생각하는데 문제,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삶이 외식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회칠한 무덤이 무엇 입니? 흔히 유대인은 그 무덤 앞에 하얀 회칠을 해 놓습니다. 안에서는 송장이 썩어가는 무덤인데 회칠을 한들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형식주의를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주의에 빠질 때 우리 신앙의 생명력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사데 교회가 사망 선고를 받은 이유는 실천과 행위가 없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아멘. 

  2절 후반부에 보니, 네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못 찾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봐도 너에게서 온전한 행위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행함이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말만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말은 많은데 행동과 실천이 없는 것, 이것이 우리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려고 하는 진지한 몸부림과 노력과 기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식으로 알 뿐이지, 전혀 실천하려고 하는 노력이 엿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외형은 화려했지만 행함이 없는 교회 말입니다.

  계시록 1장 3절에 보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아멘. 즉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키는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사데 교회가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일과 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들은 물질적인 풍요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우리에게 늘 안일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견고한 요새는 그들에게 자만을 가져왔습니다. 누구든지 한번 와 바라 우리를 칠 수 있는지... 그들은 자만에 빠졌습니다. 물질적인 부의 부요함이 그들을 안일과 안락에 빠지게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너무 물질적으로 곤핍해서 어려움 당하고 또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때로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거기서부터 우리 신앙의 생명력은 서서히 죽어갈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목사님 왜 기도합니까? 나는 부족한 게 없는데... 집이 없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차가 없습니까? 뭘 달라고 기도합니까? 귀찮게시리...” 기도할 필요를 못 느끼는 신앙이라면 심각한 위기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데 교회가 그렇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기도의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한두가지 걱정거리가 있는 게 좋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게 됩니다. 걱정 근심 없으면 기도의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마음이 한껏 교만해져서 사람들 우습게 압니다. 자신보다 못 한 사람 깔보기 쉽습니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에는 약간의 핍박과 고난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세교회를 보십시오. 중세 교회가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외부의 핍박이나 공격이 없을 때 한껏 병들어 가지 않습니까? 교황이 왕을 임명할 정도니 교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교회는 물질을 얼마든지 쌓았고 많은 땅을 소유한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 때 중세교회는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교회를 보십시오. 모택동이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그것을 문화대혁명이라고 부릅니다. 홍위병이라고 젊은 아이들을 시켜서 마음껏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다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고 교회는 문을 닫고 교인들은 지하로 스며들었습니다. 모택동이 20년 동안 집권하는 동안 이제는 중국의 교회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택동이 집권할 때 500만의 교인이었는데 놀랍게도 20년 지나고 나서 중국에 종교의 자유가 와서 뚜껑을 열어보니 무려 5천만 명의 크리스찬이 생겨났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없지만 그들은 지하에서, 들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선교하며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더 강한 종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너무 안락, 안일,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너무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핍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내가 〇〇교회 집사입니다. 권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인사하면  “얼굴이 장로님같이 보입니다... 집사님 얼굴 같이 훌륭해 보이네요.” 하고 좋은 소리 듣지, 집사라고 권사라고 뺨맞고 좇아내는데 봤습니까? 없습니다. 교인이라고 핍박 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거기에 신앙의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내 생명을 걸 만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내 생활을 빼앗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태해집니다. 안일해집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밥 먹듯이 주일을 빼 먹는 것입니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좀 고난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평신도 신학자 C.S 루이스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밋밋하고 평탄하고 전혀 장애가 없다고 말하며,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가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삶이, 신앙고백적인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도지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지옥에 가는 방법? 뒤를 보세요!” 해서 봤더니 “아무 것도 안 하면 지옥 간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너무 안일과 안락에 빠져있을 때 문제가 됩니다.

  유명한 교회 성장학자인 조지 바너는 현대 교회와 현대 성도의 위기를 가리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 교회는 마치 냄비 속에 넣어 놓은 개구리와 같다.” 냄비 속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개구리를 담아 놓았습니다. 개구리는 미지근한 물이 기분 좋다고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처음엔 미지근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물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는 온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서서히 자기 살이 익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좋게 죽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 교회, 현대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질병으로 내 심령이 망가져가고 있지만, 세상의 물질주의에 내 마음이 오염되어 가고 있지만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물질을 내 주인으로 삼고, 돈 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될까 우린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안일과 자만에 빠진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였습니다.

  자 그러나, 사데 교회에도 약간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도 살아있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아멘.

  이런 가운데서도 생명력을 가진 교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은 자요 나와 함께 다니는 자요 합당한 연고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속에 옷을 더럽히지 아니했습니다. 죄악에 물들지 아니했습니다. 욕심에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가지고 말씀을 읽고 봉사하며 전도하는 살아있는 영혼들이었습니다. 소수의 크리스찬들, 그들은 생명력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사데 교회에 불씨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하고 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은 좀 별나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뭐 저렇게 별나게 기도하나? 별나게 예수 믿어야 되나? 저렇게 별나게 예배에 참석해야 되나? 그럽니다. 좀 나처럼 적당히 믿으면 좋겠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열심히 믿습니다. 가끔 어떤 분이 그럽니다. 전도를 열심히 했더니 같은 기관에서 눈을 자꾸 흘깃하더랍니다. 너만 전도하냐? 너만 산 교인이고 우린 죽은 교인이냐? 가끔 교회에서도 너무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왕따 당하는 분들도 있더라구요.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살아있는 성도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논다고 같이 논다고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양심을 가지고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느냐 내가 정말 봉사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주님은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하고 조금 유별나게 행동하면 왕따를 당하지요. 그런데 신앙적으로는 그 왕따란 말이 괜찮은 말이랍니다. 어떤 목사님 설교하시는데 왕따란 무엇이냐? 했더니 왕을 따르는 사람이 왕따랍니다. 여러분, 좀 왕따 당하셔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니까요. 열심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난 받을 수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갖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오늘 4절에 보니, 너희가 끝까지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고, 생명책에 그 이름이 흐려지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아버지 앞에서 내가 너를 안다고 시인 할 것이라고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생명력을 가진 교인은 흰옷을 입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가 씻음 받고 그리스도의의 의의 옷을 입고 구원의 대열에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왕들은 백성의 명부를 자기 가까이에 다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반역했다, 죽었다 하면 이름을 지워버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명부 책을 결코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아버지 앞에서 내가 너를 안다고 시인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 저 사람 알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어디 가서 범인으로 몰리고 간첩으로 몰릴 때 누군가 증인이 되어, 저 사람 안다고, 옆 집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너의 이름을 안다고 말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안다고 시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니까? 신앙고백적인 삶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고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데교회에 주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라, 깨어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3절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아멘.

  2절에 보니, ‘너는 일깨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너는 깨어나라, 죽은 자들에서 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3절 중반에 보면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깨어나지 아니하면’이란 말입니다.
  사데 교회는 오늘 영적으로 잠든 자리에서 깨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막 죽어가고 있는 그것을 굳게 하라, 그리고 너희가 어디서 복음을 들었는지 그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돌이켜서 회개하고 네가 지금 잡고 있는 그 믿음을 온전히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옆에 계신 분들께 얘기해주십시오. “주무시지 말고 깨어나세요.”

  깨어나셔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나셔야 합니다. 잠자는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왜?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이 도적같이 내게 임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도적은 예고 없이 오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에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2절에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라고 기록하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1절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깰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서 주님을 기다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늘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삶이고,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 있었지요. 그리스와 트로이가 10년 동안 아주 기나길고 지루한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트로이가 워낙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그리스가 어떻게 침공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가 마지막에 꾀를 냈습니다. 큰 목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가서는 지는 척 하고 퇴각해 버렸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전쟁에 이겼다고 좋아하는데 목마를 보니 신기해서 그것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목마 안에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한 밤이 되어 그들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그 목마를 열고 나와 성문을 열고 불을 지르고 성 안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견고한 트로이 성도 10년 만에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의 방심이 10년의 전쟁에서 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트로이 전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됩니다. 늘 조심하지 않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언제 어려움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 가운데서 좋은 특권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8.15 광복절 기념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에 의해 30년 동안 주권을 빼앗기고 수탈당하고 억압당해 왔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까?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너무 방심하고 살았기 때문에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서 주권과 이름과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린 이런 비극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려면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깨어있는 교회가 민족을 깨울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깨어있는 성도가 있을 때 그 교회가 살아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고 눈물 흘릴 때 이 민족의 미래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우리 가정에 놀라운 축복이 준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9월 첫째 주간부터 두 주간 동안 특별 새벽집회로 모이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름에 헤이해진 신앙을 다시 긴장감을 가지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도 대행진에 동참함으로 새벽을 깨우고 교회를 깨우고 역사를 깨우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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