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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의 갈림길에서(2) :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왕하 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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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의 배경

본문말씀은 선지자 엘리사의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의 북방에는 아람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다메섹’, 혹은 ‘갈대아’라고도 불리는 나라인데, 그들은 수시로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스라엘에 적지 않은 피해를 끼쳤습니다. 이때, 북 이스라엘 왕국의 선지자가 엘리사였습니다. 아람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였는데, 이에 대해 아람 왕은 생각하기를, 자기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내응하는 자가 있어 사전에 그 계략이 새어나가 공격을 할 때마다 패배하게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왕의 신복 중 하나가 직언한 바와 같이 이는 선지자 엘리사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잡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오늘 본문 말씀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아람 왕은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는 도단이라는 성에 군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도단 성에 도착한 아람 군대는 말과 병거로 그 성을 철저히 에워쌌는데, 이 일이 일어난 때는 바로 ‘밤’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러한 밤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인생의 밤을 만났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그 진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밤에 일어난 일

인생의 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고, 또 하나는 육체적 삶의 어두운 밤입니다. 육체적 삶의 어두운 밤은 큰 고난과 위기를 만난 때를 일컫습니다. 이것은 일반 섭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혼의 어두운 밤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삶의 다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게 되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영적 위험, 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환경의 위험 등을 올바로 감지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영혼의 어두운 밤은 육체적 삶의 밤 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게 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다고 해서 우리의 사업장이 갑자기 도산하고, 가정이 산산조각 나며,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흘러가는 것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오는 동안, 악한 세력들은 서서히 군대를 보내어 우리 주변을 둘러싼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 파괴적 기도(企圖)들이 삶 가운데 현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 아람 왕이 수많은 군사들을 보내는 동안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십시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물의 질서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III. 생의 위기를 바라봄

도단 성이 처한 위기에 대해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위기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살펴보겠습니다.

A. 믿음 없는 시각
첫째는 믿음 없는 시각입니다. 이는 엘리사의 수종들던 종의 시각으로서, 그러한 위기에 대해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게 한 시각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불신앙과 완고함으로 가득 찼던 간악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두 선지자를 보내어 주셨는데, 그들이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였습니다. 시대가 어둡고 캄캄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강력한 당신의 종들을 파송하셔서 당신의 임재의 능력과 말씀의 권세를 보여주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종 옆에서 수종들던 그 사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보인 행동은 그가 모시던 사람의 영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름없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생의 위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의 신앙은 어떠한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올곧음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생의 위기들을 허락하심은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참으로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를 알게 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 속에 있는 믿음을 보지 못하셔서 그리 명령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잔인한 과정을 그에게 주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이를 확인하셨으며, 아브라함도 자신 속에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책망하는 말씀도 -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저들에게 없는 그것을 보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따라 다니면서 그는 얼마나 많은 기적과 신령한 일을 경험했겠습니까? 그러나 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의 그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똑같은 시각으로 이에 반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만나 변화를 받았고, 말씀을 깨달은 자들이긴 하나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에는 이와 동일한 모습을 취하지 않습니까? 평안할 때에는 신앙으로 사는 것 같은데, 위기를 만나게 되면 절망하며 형편없는 사람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없는 불신앙의 시각입니다.

B. 절대 의존의 시각

둘째는 절대 의존의 시각입니다. 이는 엘리사가 소유한 시각으로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절대 의존의 시각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들어온 광경은 그의 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의 종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시각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그 가운데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신령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의 군병들이 보였지만, 영안의 눈으로는 하늘의 불 말과 불 경거, 천군 천사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 군대들이 보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위기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도움이 끊어졌다고 자포자기하는 ‘절망’입니다. 이러한 절망이 밀려오게 될 때에 믿음이라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면 이는 두려움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절망에 직면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근신하며 올바른 삶으로 돌아갈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이야기 했듯이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 부패와 타락을 더 부추기게 됩니다. 1000년을 앞둔 10세기 말에는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이라는 속설이 팽배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기 말 현상으로 인해 유럽은 공황상태(panic)에 빠지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찾거나 회개하는 일보다는 약탈, 살인, 강간, 방화를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절망의 위험입니다. 선지자는 그런 시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절대의존의 시각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안으로 현실을 바라 볼 수 있었고, 상황이 절망적이긴 하나 그 절망보다 더 큰 희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곧 천군 천사들이 자기를 돕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수많은 아람 군사들이 자신을 공격해 온다 할지라도 저들은 하늘 군대에 의해 에워싸여 전멸할 것이라는 것을 엘리사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였는데도, 종에게는 절망적인 아침이요, 엘리사에게는 희망의 아침이 되었던 것은 어디서 비롯된 차이일까요?

IV. 희망의 아침을 맞으라

종에게 절망의 아침은 비단 그 날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수없이 지나 간 많이 날들 가운데 언제나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에게는 늘 희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A. 하나님과의 평화

첫째로,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었기에 희망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회심하는 순간 원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앞에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평화는 가변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종하고 사는 가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이 평화를 상실하였을 때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면 이 종과 동일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위기 상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처럼 태연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오히려 희망의 아침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위기라 함은 자신의 자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상황을 말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가운데 맞게 되는 인생의 절망적 위기는 우리 자신의 자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과의 평화를 통해서 이 땅의 자원과 하늘 자원을 풍성히 내려 주십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 절망 가운데 빠져 있습니까? 사실, 이것은 인생의 위기가 아니라 영혼의 위기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순간인 것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절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희망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B. 위기 중에 기도하라

둘째로, 선지자는 위기 중에 기도한 사람이었기에 희망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종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자기가 보는 것을 종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의 기도는 종에게도 절망의 아침이 변하여 희망의 아침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사람은 인생의 위기를 만나더라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는 놀라운 영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과 은혜를 발견하고 그 평화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절망적인 위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보고, 희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여호와의 도움이 믿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하나님 안에 어떠한 약속들이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과 위로를 발견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구속의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해 외로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도 조금도 고독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고, 그 약속을 붙드셨습니다. 또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의 영광이 잠시 당하는 십자가 고난의 부끄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삶 가운데 우리는 수많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해석해 낼 수 있는 영적 지각작용이 영혼 안에 죽어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 눈에 맺힌 수많은 표상들로 인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종처럼 절망적 아침을 맞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로써 하나님과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청산해야 합니다. 눈물로 이를 씻어 내면 우리의 마음의 거울은 깨끗이 닦여 모든 사물을 명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위대한 능력을 바라보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삶의 모든 위기들을 능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인생의 위기와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절망 가운데 주저앉아 침륜에 빠져 있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그분을 향한 절대의존의 신앙을 회복할 것인지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그분 앞에서의 기도 가운데 그 아침을 절망이 아닌 희망의 아침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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