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서... (눅 15:11~24)

  • 잡초 잡초
  • 184
  • 0

첨부 1


I. 본문 해설

본문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더불어 본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비유를 드신 것은, 지인들과 교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바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에는 한 부유한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둘째 아들이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눠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받은 유업을 모두 정리하여 먼 나라로 떠나서 그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허비하여, 곧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본문은 그 궁핍의 길에서 아버지께로 다시금 돌아오게 되는 전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II.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서

이 탕자처럼, 우리도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죽음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항들을 살펴보겠습니다.

A. 자유를 갈망함

무엇보다 우리가 제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탕자 안에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 아들은 유산을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마음껏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정욕’(情欲, concupiscentia)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즐거움의 대상이자 우주의 중심으로 삼아서, 우리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욕망 자체를 우리 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마음껏 분출하며 살려고 하는 자유에 대한 갈구가 바로 정욕의 정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만약 이 아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와의 관계를 즐거워하는 기쁨이 있었더라면, 먼 나라에서 끝없는 향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평범한 복음의 이치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정욕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즐거움과 만족,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살고자 하는 정욕을 가진 사람은 끝없는 자유를 갈망하며 하나님 밖에서의 자유를 꿈꾸는데, 사실은 그 자체가 인간 영혼에는 속박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을 미리 아는 것이 바로 영혼의 총명이며 지혜입니다.

B. 궁핍을 경험함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실천은 항상 인간을 죽음 같은 궁핍으로 데려 갑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더욱이 때맞춰 그 지방에 불어 닥친 커다란 흉년으로 인하여 죽음 같은 궁핍의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자원은 반드시 동이 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원은 항상 유한합니다. 끝없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것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인 경우에는 더욱 유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자원의 무한한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잇대인 삶을 살아야 하며, 그분의 끊임없는 공급 속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생의 삶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내려주시면,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부요해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탕자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원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자신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하는 날이 불현듯 찾아오게 됩니다. 고난 중에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을 의지하던 착한 마음은 사라지고 세상 사랑에 분요(紛繞)한 마음이 되어 정욕을 따라 방종스러운 자유를 갈망합니다. 한 때, 우리는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간절히 회개하고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은총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물질의 복을 받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들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데 사용하라고 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죽음 같은 궁핍의 때를 지나는 탕자는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을 수단인 물질과 바꿔버린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찌 이런 일들이 물질에 관해서만 이겠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정신과 영혼의 궁핍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탕자인 그는 재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국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는데, 돼지는 히브리 사람들이 가장 경멸하는 짐승이니 그것을 치는 목부가 된 것은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지녀야 할 자존감마저 박탈된 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로 인한 궁핍 그 이상의 궁핍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아무도 불쌍히 여기는 자 없이 홀몸으로 죽음 같은 궁핍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육신이 돼지우리에 던져졌을 때, 그의 정신과 영혼도 또한 돼지우리와 방불한 죽음 같은 궁핍에 던져졌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우리는 단지 육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어서 매달린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굶주림 때문에 눈물로 간구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우리를 채워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은혜의 생수로 적셔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은혜 없이 살던 때의 비참함과 고통스러운 영혼의 궁핍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적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이란, 신자가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조차도 우리가 의지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한 분만을 의지하기 원하십니다. 말씀, 설교, 예배, 묵상, 간절한 기도 등의 이 모든 은혜의 도구들은 우리를 은혜로 이끄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 모든 위에 계셔서 우리의 전 존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할 모든 자원의 근원되시고, 우리의 생명의 원천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아주 혹독한 궁핍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부주의함과 하나님 없이 넉넉히 살려고 하는 우리의 못된 본성을 고치십니다. 여러분들 중 자신의 영혼이 돼지우리에 던져진 것처럼, 아무 희망 없이 궁핍하게 되어서 ‘내 영혼이 여기서 이렇게 굶주려 죽는구나’하고 절망하던 이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 죽음과 방불한 절대 궁핍 속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전에 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소중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새 생명을 간직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총명의 빛 아래 거하도록 마음을 지키며 말씀의 은혜를 갈망했습니까? 그리고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이 그것을 따라갈 때에나 그렇지 못할 때에나 상관없이 거룩한 의무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지고 자신의 온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하여 진력했습니까?

C. 마음을 돌이킴

탕자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 같은 궁핍에 직면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안에서 타오르듯 갈망하던 자유가 사실은 속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허기를 채울 쥐엄 열매조차 주는 자가 없을 때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말합니다. 생각을 돌이키고 뜻을 바꾸고 의지를 새롭게 하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과 같은 궁핍으로 들어가게 하는 자유를 버리고 모든 자원이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긍휼을 갈구하는 낮아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에는 자기의 생명이신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찾은 것에 대한 뼈저린 후회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한 허물이 부끄러워 어찌 아버지께 돌아가나? 집안의 품꾼들과 형의 시선을 부끄러워 어찌 감당하나?” 이 모든 고민보다 더 단호한 결단이 섰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자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보다도 제일 먼저 생겨난, 뚜렷이 인식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18).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죽음과 같은 궁핍의 궁극적인 원인이 단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살아가는 의무를 예전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것이 자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겸비하여 졌습니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해도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대우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품꾼 중 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합니다(19). 아들로 대우 받지는 않아도 먼발치에서라도 아버지를 바라보며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싶다는 절실한 소원을 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오기 전에 마음에 일어났던 깊은 변화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란, 자기 마음속에 있는 타락의 경향을 미리 읽어내어, 일어나지 않은 결말을 미리 알아서 그것이 현재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아파하며 하나님께 속하여 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있는 죄와 드러나는 죄 사이에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주는 초시간의 경험 안에서 본성과 그 본성의 열매인 행동을 한꺼번에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렇게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하는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짓겠습니까. 이는 모두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이미 드러난 것처럼 아파하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십니까?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탕자와 같이 궁핍한 상태라면, 그것이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기억하며, 그분께로 돌아오십시오. 우리가 돌이킬 때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III. 기다리시는 아버지

이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주로 ‘돌아오는 아들’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셨던 것은 그 아들이 아닌, ‘기다리시는 아버지’입니다. 불순종하고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그 고단한 인생의 여정의 끝에서 죽음과 같은 궁핍을 끝내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에 앞서 먼저 살펴볼 것이 있으니 그것은, 집을 떠난 탕자의 귀향을 위한 결단입니다.

A. 귀향의 결단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죽음과 같은 궁핍을 경험하며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돌이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돌이킴은 마음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20). 이러한 귀향을 위한 돌이킴은 탕자의 결단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이 돌이킴, 혹은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매우 신비한 작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돌이켰을 때, 그 행동의 관점에 따라 자기가 결단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고 말하거나, 혹은 자신이 저항할 수 없이 하나님이 돌이키게 하셨다고 고백을 하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인간 의지 사이에 있는 신비입니다.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하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감화시키셔서 돌아가게 하시고, 거룩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은혜로 채우셔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결코 물리적으로 강제하지 않으시며 또한 인간의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감화하시는 은혜 없이는 선한 방향으로 불러일으켜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꾼이 나무의 결을 따라 장작을 쪼개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은혜와 우리의 의지 사이에 신비한 작용을 가지고 그렇게 결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은 이렇게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이키시지 않는 한 나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 이렇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 도움 없이도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탕자에게는 아버지께로 돌이키고자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귀향을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 결단을 실행해 옮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원리는 계속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로 돌이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그 결단을 실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동시에 그분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을 의존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실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돌이키고자 마음을 먹었다 할지라도 그로 하여금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제약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밀치고 그는 하나의 목표에 전념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와 관계를 누릴 수 있다면, 그 아버지의 집의 한 식구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용기 있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과 결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러한 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길로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벗어나, 풍족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B.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단하였지만, 그의 귀향의 길이 얼마나 쓸쓸하였겠습니까. 그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수치와 많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염려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리움과 사랑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참한 생활로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먼저 그를 알아보고 달려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를 보자 끌어안은 것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날을 알고 그날만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날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탕한 날들 동안 아들은 아버지를 잊어버렸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아들이 잊혀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자기의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여러분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래 참으시며,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을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탕자는 죄를 뉘우치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21). 그러나 아버지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이 잔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3-24).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사실상 죽은 사람이라고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 돌이키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에게 다시 당신의 아들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여기서 가락지를 끼어주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당시에 도장으로 사용되던 반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탕자에게 또 다시 유업을 잇게 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죄인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두 개의 갈림길을 만납니다. 한 길은 그렇게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고, 또 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IV. 결론과 적용

우리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우리 자신에게 있는 자원만으로는 살 수 없도록 그렇게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을 떠나서 물질을 잃어버리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주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을 잃어버리고, 죽음과 같은 영혼의 궁핍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이 돌이키신다면, 이미 거기서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용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