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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의 행복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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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일생동안 눈물을 흘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정말 가치 있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는데 그것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남을 위해 울어 줄 수 있을 때입니다. 나를 위해서 우는 일은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 아니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눈물>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에 찾아보면“눈동자 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나오는 물로 늘 조금씩 눈을 축이지만 정신의 감동이나 자극을 받으면 더 많이 나기도 하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눈물에 대해서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정의가 다릅니다. 생리학자들은 눈물을 이렇게 말합니다. “눈알을 매끄럽게 하며 눈동자의 건조함을 방지해주는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용액이다”화학자들은“수용액 속에 염화나트륨과 칼슘과 다른 화학 원소들이 들어 있는 용액”으로 설명하고, 시인들은 소리 없이 흘러내려 입 가장자리로 스며들면 약간은 시큼한데 짭짤한 맛이 더 하면 슬픔의 눈물로 설명하고, 심리학자들은 인간만이 갖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 표현으로 설명하고, 종교인들은 감사와 정성, 사랑과 순결이 담겨져 있는 영혼의 증류수라고 정의합니다. 어쨌거나 모두가 눈물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 한 것들로 보여 집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악어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사람을 만난 악어가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사람을 위해 울어주고는 잡아먹는다는 데서 유래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우는 악어의 눈물, 이 눈물은 결국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눈물입니다. 더구나 울어주고 잡아먹는 악어의 행위는 자기의 고약한 행위를 정당화 하려는 교활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눈물을 가치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발상, 이것이 곧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있다면 아마<사랑>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빼고 나면 할 말이 없어질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언어이자 행동이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되어 집니다. 먼저, 내 위치에서 더 높이 우러러 위로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곳을 우리는<존경>이라고 하고 때로는<공경>,<경외>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수평적으로 친구를 대하듯이 일대 일로 주고받는 그런 의미의 사랑이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편안한<우정>적인 사랑 그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랑을 언제든지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정말 힘들어 지쳐 피곤할 때에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동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수필가[유안진]씨가 쓴<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히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 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편안하고 우정적인 사랑은 인간관계의 문제요, 성품의 문제요, 인격의 문제입니다. 정말 이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낮은 위치에 있는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하향적 사랑이란 말입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의 형편을 살피는 것입니다. 연장자가 연소자를 사랑하는 것이요, 상급자가 하급자를 용서하는 것, 이 모두가 긍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나 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연장자라고 상급자라고 해서 저절로 이런 사랑을 베풀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바로 긍휼을 배운 자입니다. 긍휼을 배운 자만이 하향적인 사랑을 할 수도 있고, 존경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 이 긍휼을 배워야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가 베풀고 받아야 할<긍휼>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긍휼이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긍휼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사랑하고 용서 뒤에 무언가를 원한다면 이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그것은 단지 자기선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선행이란 정치꾼들에게나 필요한 요식 행위입니다.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자하는 삶들의 미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는 백해무익한 자기의, 자기 공로일 뿐입니다.

그 다음, 긍휼이란 수직적인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에 값을 지불해야 한다면 내 편에서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받은 긍휼에 비해 지금까지 내가 베푼 긍휼이란 약소하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 치루어야 할 긍휼이 많이 남아있고 최대한의 긍휼을 베풀며 살겠다는 이 생각이 진정한 의미의 긍휼입니다. 여기에 무슨 공로가 있고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이 긍휼을 베푸는 마음은 하나님께 향한 신앙의 마음 일뿐 아니라 믿음의 성품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조건적으로 받았기에 나 또한 조건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내가 무조건적으로 긍휼을 입었기에 그 긍휼을 입은 자의 마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진 은혜입니다. 곧 긍휼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긍휼을 입은 자로서의 합당한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의 연속이 우리의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오늘 이 말씀입니다.“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가 긍휼히 여기고 또 그 긍휼로 인해 내가 살고 남을 용서하고.... 이 연속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아들을 둔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너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수 없이 타일렀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니 이제부터는 네 스스로 좋지 못한 일을 했다고 느낄 때마다 저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도록 해라” 아들은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까짓 것 못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기둥에 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더 이상 못을 박을 곳이 없게 될 정도로 기둥에는 못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날 밤 이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못된 짓이라고 한 것만 해도 저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남이 볼 때는 내가 얼마나 많은 못된 짓을 했을까”그리고 밤새도록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아들에게 말했습니다.“이제 그만 눈물을 닦아라. 네가 네 잘못을 뉘우쳤다면 그것으로 됐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하도록 하고 그 때마다 저 기둥의 못을 하나씩 빼도록 해라”아들은 그 날부터 새사람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둥에 꽉 찼던 못이 말끔히 다 빠졌습니다. 그러나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둥에 남아있는 못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못 자국을 볼 때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마음속의 못 자국을 지우기 위해 더욱 선한 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우리의 온전치 못한 행위를 볼 때마다 주님의 못 자국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못된 마음 때문에 남은 못 자국입니다. 나의 교만 때문에 생긴 못 자국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 스스로 아무대가 없이 만드신 흔적입니다. 그리고 그 못 자국난 상처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죄 중에 빠져서 영 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용서받은 자의 용서를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긍휼을 입은 자의 긍휼을 진정으로 베풀고 살아가고 있나요? 오늘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불행한 것입니다.

[버클리]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긍휼한 마음도 있고 선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음으로 미루고 맙니다. “이번만은 안 된다. 다음부터 긍휼을 베풀자”하고 맙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긍휼은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내일로 미뤄도 안 되고 내년으로 미뤄도 안 되고 다음기회로 미뤄도 그건 아닙니다. 긍휼은 그대로 그 시간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 믿는 자격의 하나를 더 가지기를 바랍니다.<긍휼>입니다. 긍휼을 입은 자는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또다시<긍휼히 여김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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