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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름대로 열심히 했건만 (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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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사느라고 바쁘고 피곤한 사람들에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번주에는 지난주에 이어 ‘나름대로 열심히 했건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학개서를 통해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것은 곧 산다고 피곤하고 바쁘면 하나님과 신앙생활을 등한시해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된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요, 또한 그렇게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구하면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회복하시리라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도 하나님과 신앙생활을 먼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을 먼저 찾는다는 것은 곧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먹고 살기 힘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성전을 먼저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을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성전을 짓고 난 이후의 상황입니다. 저들은 정말 어렵고 힘든 와중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들이 그토록 힘들게 성전을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전을 다 짓고 난 이후에 저들이 기대하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성전만 완공되고 나면 학개 선지자나 스가랴 선지자가 약속했던 그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저들의 눈앞에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미 성전이 완공된지 5-60년의 세월이 훨씬 지났는데도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은 고사하고 저들의 삶은 경제적으로 더욱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저들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저들이 기대했던 그런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더욱 부요해진 것도 아니고, 정말 성전을 짓기 전이나 성전을 지은 이후나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이 저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는 당연히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과 이에 대한 신학적 답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했건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그래도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되는가?’ 이건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다 겪어보는 고민이며 갈등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도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안 해본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괜찮은데, 열심히 신앙생활하기 전이나 한 이후에나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가 문제입니다. 오히려 더 악화될 때도 있으니까요. 오늘 본문의 사람들이 맞이하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자, 이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래도 우린 하나님을 붙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짜 믿음이고, 산 믿음입니다.

여기서 저는 먼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 예수님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이 가장 초보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강퍅한 사람이 아니라면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힘들고 어려울 때 믿는 믿음도 중요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보다 더 큰 믿음은 잘 나갈 때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일이 성공하고 돈과 지위가 보장되면 교만의 길로 걷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지킨다면 그것은 실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믿음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도 낙심하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내 쪽에서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데 하나님 편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냐는 것입니다. 내가 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뭔가 반응을 보여 주셔야 하는데, 물질의 복을 주시던지 아니면 불신 남편이나 가족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던지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기도를 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그것은 진짜 큰 믿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 바로 그런 믿음이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실 때에도 여전히 인내하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 바로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길 소원합니다.

제가 지난해 에스라에 있을 때에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참 힘든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정말 깊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또 마음을 모아도 정말 안개가 걷히지 않았습니다. 환경에 변화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도 아니고. 내 딴에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비우고 주를 따르겠노라고 헌신도 하는데 여전히 제 앞길은 짙은 안개뿐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찾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참 인내하고 인내하며 믿고 바라던 중에 전혀 뜻하지 않은 방법과 길로 하나님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했건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도 우린 여전히 주님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그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신앙의 동역자들과 함께 그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의 동역자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성전을 짓고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믿음의 길을 택하기 보다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여호와 신앙보다는 시대의 흐름 곧, 세계화의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세계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있지만, 말라기 시대의 큰 이슈 중의 하나도 세계화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 이전에는 정말로 가나안땅 중심으로 살아가는 순진한 백성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좁은 유대 땅에서 자신들의 종교만 옳다고 신봉하며 살아가는 촌놈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서 세상구경을 하게 됩니다. 소위 말해서 국제 정세의 한가운데서 살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아주 넓고 큰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넓고 큰 세상에 비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땅은 정말 초라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체제 속에서 제국의 한마디에 나라의 존재자체가 흔들리는 그런 수준이 바로 저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영광을 기대했는데, 성전 완공 이후에도 저들은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결단해야 했습니다. 계속 성전과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하루속히 세계화의 물결에 동참해서 나라의 중흥을 꾀해야 할지.

결국 여기서 저들은 하나님보다는 세계화를 선택합니다. 기다리고 바라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 하나님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국제화의 정세에 편입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결국 성전 제사를 보잘것없는 구닥다리 전통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13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제사를 번폐스럽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귀찮은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갖다 바칩니다. 제사에 대한 멸시는 곧 하나님에 대한 멸시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6절에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이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어쩌면 이제 세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뒷방에 앉은 늙은 영감님처럼 취급당하고 있습니다. 무시하려니 찝찝하고, 열심히 챙기자니 구닥다리 영감을 통해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 싶고. 빨리 세계화 국제화를 해야 되는데 맨날 제사나 챙기려니 갑갑하다는 것이 저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전에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내겠습니까? 그래서 말라기 3장에는 바로 이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전에 십일조와 헌물을 제대로 내지 않다보니 레위인들이 농사지으려 성전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느13:10)

그리고 저들의 세계화 국제화는 2장에서 국제결혼으로 이어집니다. 이방결혼입니다. 결혼은 곧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기대가 실망으로 변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자신들의 살길을 모색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제사도 형식적으로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은 아까워서 내지도 못하고, 눈에 좋아 보이는 외국의 문화들은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들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아마도 오늘 우리도 동일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믿음을 포기한다면 우리도 결국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본문의 사람들과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구별된 삶을 원하셨건만 이제 하나님을 섬기며 구별되게 사는 것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예배도 대충 드리고, 헌금은 아까워서 아이들 껌 값 주듯이 그렇게 냅니다.

혹시나 내 마음 속에 예배나 신앙생활을 시대정신을 모르는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국제화 세계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세계화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세계화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세계화, 곧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바람과 물결에 의한 세계화입니다. 성도가 추구해야할 세계화는 바로 그런 성령에 의한, 복음에 의한 세계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하지만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과 호소의 말씀입니다.

저들을 돌이키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말라기 성경은 모두 합쳐서 55절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성경이지만 무려 25번이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2절에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4절 중간에도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6절에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8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9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0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1절에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말라기기 끝날 때까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 재건 후 아무런 말씀도 없고, 변화도 없고, 영광도 없다고 불평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이 도대체 우리에게 관심이나 가지고 있냐고 불평하는 저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관심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친히 말하고 있다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혹시나 우리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귀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역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꼭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한번 더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짓고 나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하셨냐는 것입니다. 스가랴 이후에 말라기가 등장하기까지 왜 아무 선지자도 보내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든지 응답하지 않느냐고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대답합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모두 새로운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말라기시대보다 앞에 있는 스가랴 선지자 시대에 이미 저들은 그 이전의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시대였습니다. 예전에는 선지자가 직접 예언하고 말씀했지만 그 시대는 선지자들이 많이 활동한 이후의 시대이기에 이미 저들에게 주어진 선지자의 말씀이 많이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새로운 선지자의 출현을 기다리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있고, 내게 관심이 있다면 왜 나에게는 말씀해 주지 않느냐고 불평하기에 앞서 이미 주어진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직통으로 계시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이미 선지자들에게 의해 주어진 말씀은 더욱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치고 왜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응답하시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도 이미 주어진 말씀에 귀 기울여야 되는 사람들인 것처럼 오늘 우리도 동일합니다.

이제 실망하고 낙심한 사람들의 다음 질문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린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성전을 지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준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기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였고 또한 인도하였노라고 응답하십니다. 그것을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랑하고 미워하였다는 표현은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의 언약적 표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에서가 형이었지만 선택하지 않고, 야곱 즉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냐면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에 야곱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또한 인도했노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4절의 의미입니다.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 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사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때 에돔이 먼저 멸망했습니다. 나라가 멸망한 에돔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을 때 바벨론과 합세해서 예루살렘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집니다. 그런데 그 에돔이 자신들의 땅을 다시 회복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아직 회복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지금 현재 예루살렘과 성전이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입니다. 그들이 에돔처럼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셔서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현재 회복되지 못한 에돔과 그래도 회복된 이스라엘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국제정세, 세계화 등을 논하고 있지만 실제로 국제정세를 주관하고 이스라엘을 그 국제정세 속에서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5절에 표현된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지경 밖에서도 크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왜 다스리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을 위해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이스라엘을 위해 온 세상을 조절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별 자격 없는 나를 택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충만합니다. 단지 내가 잘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위해서 온 세상을 조절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이 똑같이 멸망당하고 고난을 당하지만 에돔의 고난과 이스라엘의 고난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에돔은 회복되지 못하는 고난, 즉 파멸을 위한 고난이었지만 이스라엘은 회복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결국 성도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고 찐한 사랑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그분이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억지입니다. 설령 내가 깨닫지 못해도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오늘도 나를 사랑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도 여전히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이 보다 성숙한 믿음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자신의 사랑을 변호하고 호소하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그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하자고 호소합니다. 그것이 6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시금 제사가 회복되기를 호소합니다. 2장에서는 제사장들이 다시금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이방결혼으로부터 돌아서라고 호소합니다. 다시금 거룩한 성도의 삶을 지키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시금 십일조 생활을 하라고 호소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하는 방편입니다.

그러면서 3:16-17에서 이 어려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유를 삼으시고 아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합니다. 3:16-17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건만 아무런 변화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고 실망하여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방법을 취한 저들에게 다시금 돌아오라고, 돌아와서 언약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관계를 가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 어려운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면 내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고, 너희를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고, 아들같이 아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간절한 하나님의 호소 앞에 다시 한번 더 믿음으로 반응하여, 비록 우리 삶의 주변에서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인내하며 다시 한번 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합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가 세워야 하는 성전을 짓기 위해 나의 작은 돌단을 쌓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박원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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