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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균형잡힌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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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할 때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가야할 때 조종사들은 어떻게 앞도 보이지 않는데 비행기를 조종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비행기 안에 있는 계기판 때문에 가능합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이 계기판이 없으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비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 계기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상승하고 있는지 하강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비행기 조종사들은 비행훈련을 받는 동안 자신이 공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 아닌 기계를 신뢰할 것을 교육받는다고 합니다.
그 비행기 계기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비행기의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종사는 계기판을 통해서 비행기의 균형을 잡고 목적지까지 비행기를 조종해 갈 수 있습니다. 계기판이 고장 나 비행기가 균형을 잃게 되면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차 바퀴의 공기압력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편안할 수 없습니다. 공기압력이 서로 맞지 않는 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해보세요. 아마 얼마 못가서 몸이 뻐근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균형이 깨지면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남보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 아파트 . . 남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알아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일에 얽매이게 되고 바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일하느라 바빠서 아이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용돈 달라고 하면, 시간을 함께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어 용돈을 많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려합니다. 돈을 많이 주면 다 해결 됩니까? 이렇게 돈을 많이 주다보니 황금만능주의가 되고 인생이, 가정이, 사회가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신앙도 균형이 중요합니다. 균형 잡힌 신앙에는 두 개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이라는 축이고 또 하나는 체험이라는 축입니다. 신학은 지식을 통해서 주어지고, 체험은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체험은 없고 신학만 있으면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고집 피우는 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는 것이 많으니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반대로 체험은 있는데 신학이 부족하면 신비주의가 되어 이상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체험했다고 지식은 완전히 무시합니다. 체험은 지식을 통해 체계화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신학(지식)과 체험의 두 개의 축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성령의 체험과 올바른 성경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새의 두 날개가 있어야 날아가듯이 이 세상 모든 일에는 조화와 균형(balance)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가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가? ‘믿음’ 히브리어로 ‘에문’인데 이 말은 ‘아멘’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 ‘참, 진실, 확신, 과연 그러하다는 응답, 안정, 견고’등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헬라말로 ‘피스티스’인데 ‘신실, 충실, 안정, 견고’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는 마음’입니다. 친구사이에도, 부부사이에도 믿는 마음이 기본입니다. 인간관계속에 믿음은 기초입니다. 이 믿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사회도 국가도 .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소망, 사랑과 함께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믿음은 능력의 원천입니다.(막9:23),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1. 신앙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원리에도 균형은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막 한 복판 메마를 대로 메마른 곳에 펌프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펌프 손잡이에 깡통이 하나 매달려 있었고, 그 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이 편지는 그 메마른 사막 한복판을 헤맬 목마른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을 공급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이 펌프는 1932년 6월 현재로 물을 낼 수 있는 완전품입니다. 지하의 물도 충분합니다. 기계는 금후 5년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용하려면 바짝 말라있는 펌프를 먼저 적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펌프를 가동할 수 있을 만큼의 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펌프 곁 흰 바위 돌 밑을 들치면 물이 들어있는 병이 있을 것입니다.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마개를 잘 해 놓았습니다. 그 물은 겨우 이 펌프를 적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먼저 1/4만 부어 안에 있는 가죽을 적시도록 하십시오. 그 후 나머지 물을 다 부어 넣으며 힘 있게 펌프질을 하십시오. 내 말을 믿고 이대로만 하면 당신이 필요한대로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을 다 얻은 후에는 내가 했던 것과 같이 다시 병에 물을 채워 잘 봉한 뒤, 처음 놓였던 바위 밑에 넣고 편지와 깡통도 다시 손잡이에 달아 놓으십시오.”
<추신> 만일 목마르다고 병의 물을 먼저 마셔버리면 펌프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막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 펌프를 통하여 생수를 얻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이 편지의 내용을 쓴 사람이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의심 없이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펌프에 붓고 펌프질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고 행동할 때 생수를 마음껏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으려면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주님이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임을 의심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은 그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서는 믿는 자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균형잡힌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14-17).

믿음에는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은 어찌보면 다 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죽은 믿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는 삶의 방향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나며 그 결과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겨자씨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똑같이 교회생활 하면서 똑같은 시간에 설교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어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하여 발전하고 성장하지만,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런 발전이 없고 언제나 정지상태이며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합니다.

먼저 행치 않은 믿음이란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성경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행동하는 믿음, 행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며 자신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 사랑으로 행하며, 사랑을 말하고, 훗날에 심판받을 것을 기억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말로만 하고 구체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도와 주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백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고백도 필요하지만, 그에 따르는 행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만 가지고는 안 되고, 행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한 여행자가 그랜드 캐년 가장 자리에 다가갔다가 길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매달렸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나를 좀 구해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하나님이야.”
“하나님, 당신이 거기 계셨다니 정말 기쁩니다.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물어 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착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에도 나갑니다. 또 성경도 읽고 매일 기도 시간도 가칩니다. 헌금도 많이 냅니다.”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아니 네가 정말로 나를 믿는냐고?”
“제가 얼마나 당신을 믿는지 모르실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좋아. 그렇다면 이제 그 나무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그렇지만 주님 . . . ”
“정말 날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한참 동안 그는 조용히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다른 누구 없습니까?”

산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항상 등장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을 향하여 3일길을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3일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망설임 . . .그러다가 결단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도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므로 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학자 반하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현대에 너무 자폐증 크리스챤(autistic christian)이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자폐증이란 표현하지 않는 증세입니다. 현대 교인은 설교를 잘 듣습니다. 성경공부를 잘 합니다. 기도 많이 합니다.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리고 설교와 성경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표현하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2. 편중된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은 사람이 이미 사람이 아닌 것처럼 죽은 믿음도 이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믿음을 아무리 오래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15-17에 보면 예를 들어 헐벗고 굶주린 형제자매를 바라보고 몹시 불쌍하다는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세요? 얼마나 추우세요?”걱정을 했습니다. ‘도와주었으면 참 좋으련만 . . . ’하고 생각은 했습니다. 마음으로 동정하고 말로만 한 위로는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감정에만 치우치거나 말로만 하는 신앙고백의 차원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예배, 집회를 많이 모이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목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 기도원 특별집회. . . . 등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만약 교회에서만 뜨겁고 가정이나 일터에 가서는 식어버리는 믿음에 대해서 야고보는 “그런 믿음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기서는 아는 것, 즉 지식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성경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탄의 무리들은 성경에 대하여 사람보다 더 수준 높은 지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주님께서 성경말씀으로 답변을 하시자 즉시로 성경을 인용해서 두 번째 시험을 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할 때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합니다.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기 않게 하리로다.”(시91:11,12)

사단이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잘 알고는 있지만 그 권세를 두려워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지식수준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지식 수준의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한다면 귀신들도 그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결코 그 수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는 지식수준을 높이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경건의 경력을 쌓자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이 여러분의 생활 방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말씀앞에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따르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말씀, 유명한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이라도 능력이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3. 살아있는 믿음은 보여집니다.

18절에 “행함이 없는 네 믿음으로 보이라 나는 행함이 있는 내 믿음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이든 죽어있는 믿음이든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숨겨질 수 없습니다.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숨기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기를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 너희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마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쓰고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세상도 숨는 그리스도인, 마음만의 그리스도인을 찾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 믿는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고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빛은 숨길 수가 없다. 즉 숨은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숨겨진 신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빛은 반드시 드러나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풍겨나야 합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지 않아도 ‘집사님이시지요’, 십자가 배지를 달지 않아도 ‘목사님이시지요’라고 . . .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보여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교육은 모방입니다. 사람들은 모방심리가 가득합니다. 현대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TV연속극에서 탈랜트가 입은 옷은 금방 불티나듯 팔려버립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탈랜트가 된양, 당당히 입고 다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마음이 생기도록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현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세련되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좋아하는, 닮고 싶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세상 앞에서 흠없는 존재로 살아간 사람을 고르라면 다니엘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전적으로 이교적인 환경속에서 살며 일하면서도 자신들의 신앙원칙을 어기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민첩(敏捷)하며 . . . 뛰어나므로”(단6:3)
다니엘은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요, 비판자들 앞에서 흠잡힐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총리들과 방백들은 다니엘에게서 허물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흠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다니엘은 자신의 원칙에 철저하면서도 사랑을 받는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마음으로 믿는 믿음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신앙은 철저히 지키면서도 민첩함이 있었습니다. 세련됨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즉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에게 전도를 보내면서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 처럼 슬기롭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10:16)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지혜로와야 합니다. 민첩해야 합니다.
균형잡힘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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