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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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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
누가복음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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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성가대에 음치집사가 있었는데 화음도 안 맞고 소리가 튀는데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급기야 성가대원들이 전부 시험에 들 지경인지라 몇몇 집사님들이 목사님께 찾아가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도 그분에게 말씀드리기가 곤란한데, 매주 집사님들이 찾아와 하도 그러니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 집사님을 불렀습니다. "집사님! 한두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섯 분이나 오셔서 집사님 음성이 화음이 잘 안되어 성가대를 그만두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자 집사님 가라사대 "목사님! 다섯 명 가지고 무얼 그러세요? 저는요, 오십 명도 넘게 들었는데요. 목사님이 설교를 못하신다고요. 그래도 저는 목사님께 말씀 안 드리고 참고 있는데 그깟 다섯 번 가지고 왜 그러세요."

어느 목사님께서 쓰신 이런 간증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담임하던 교회에 어느 여 집사님이 오래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 임종 예배를 드리려고 가셨는데 초등학교 5학년 된 여자 아이가 목사님에게 막 떼를 쓰면서 울부짖는 것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엄마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신다고 하셨지 않아요?" 그러면서 이 아이가 목사님을 붙잡고 막 웁니다. 목사님은 울부짖는 아이에게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할 지 너무 암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임종예배가 끝나고 난 다음에 엄마의 시신을 붙잡고 그러더랍니다. "엄마! 나도 이제 엄마한테 곧 갈 거야!" 그러자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자기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인가?' 장례를 준비하면서도 내내 마음이 힘들었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이 아이가 목사님 바로 앞에 앉아서 두 눈을 아주 초롱초롱 뜨고는 '도대체 목사님이 설교 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나?'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데 준비한 설교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아이에게 이야기를 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를 일단 접고, 그 아이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얘야, 너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이 세상에 나올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뭔지 아니?"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합니다. 「울어요.」

"그래, 맞아. 아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면서 울어. 왜 우는지 아니?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편안하고 안전했는데, 막상 이 세상에 나와 보니까 엄마 뱃속에 있을 때와 온도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우는 거야. 그런데 그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 뱃속에 계속 있는 것이 좋겠니, 아니면 그냥 세상에 나오는 것이 좋겠니?"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좋겠어요.」

"엄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지금 돌아가셨지만 사실은 영원한 세상에서 오늘 다시 태어난 거야. 마치 엄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너무너무 당황하고 울었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그 아이에게 복이고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일로 다 기뻐하지 않니? 마찬가지로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그것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야. 엄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신 분이기 때문에 여기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신 거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엄마는 다시 태어나셨단다. 천국에 있는 하나님과 거기에 있는 분들이 오늘 얼마나 기뻐하는지 아니? 엄마도 천국에서 틀림없이 기뻐하고 계실 거야. 그런데 네가 슬퍼하면 엄마의 마음이 어떨까?" 「슬퍼하시겠지요.」

"그래 엄마도 네가 슬퍼하면 속상하고 힘드실 거야. 어떻게 하면 좋겠니?" 그랬더니 그렇게 반항적이고 원망이 가득차 있던 그 아이의 얼굴에 순간 편안함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 엄마는 아주 헤어진 것이 아니야. 언젠가는 엄마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다 같이 만나게 될 거야." 그 아이의 변화를 보면서 그 장례 때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여섯 분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이 많은 사람이나 어린 아이에게나 다 인생에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내 인생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답을 얻은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첫째로, 삭개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거의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최선의 이름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참 좋은 이름입니다. '순결하다, 깨끗하다' 이런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아마 그의 부모는 세상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내 자식이 청결하고, 의롭게 살기를 원했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를 볼 때마다 더러운 사람, 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키가 매우 작았습니다. 삭개오의 신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키가 작은 것을 보상하고 싶어서 자기의 키 작은 것만큼 돈을 높이 쌓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돈의 디딤돌 위에 다른 사람을 위압하고자 자기 민족이 그처럼 싫어하는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도 모릅니다.

삭개오가 살던 여리고는 당시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는 모든 육상 통로는 반드시 여리고를 지나서 유럽이나 중동 지방으로 갑니다. 또 유럽의 문물들이나 북쪽 바빌로니아의 모든 문물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그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또한 여리고는 물이 참 좋았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수많은 녹음이 우거져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에게 쉼터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중동지방 최대의 오아시스입니다. 당시 로마가 12만의 인구를 자랑하면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할 때 이 여리고는 군락을 이루어서 5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돈이 몰려오니까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몰려와서 살았습니다. 자연히 돈이 굴러다니는 곳에서 세리장으로 일했으니까 그는 수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모았습니다. 그 모은 돈 위에 로마의 권력까지 뒷받침한 채 그는 부요와 세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이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누려보면서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음의 깊은 공백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져보니까 별 것 아닌 내 모습, 그 마음 속 공백을 어찌할 수 없는 그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께서 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자기 상실, 자아 상실은 참 비극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돈이다 출세다 해서 그저 밤낮으로 뛰다가 덜컥 병원에 입원해 놓고는 건강이 이렇게 소중한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부터 건강을 돌보았을 것인데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마음이 영혼이 썩어 가고 있는 것과 특별히 자기를 잃어 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중대한 문제란 말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잃어진 상태에 있다가 그 언젠가 가서 큰 사건으로 터지면서 노출될 때에 이상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된 일입니까? 있었던 일이 이제 나타난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가졌으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나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가졌으나 존경받는 사람이 못 되었고 모든 이로부터 미움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멸시를 받았습니다. 자기 양심도 자기를 정죄했습니다. 결코 평안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항상 평안치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사는 동네로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겹겹이 싸여 있어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작은 키를 가졌기에 더욱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옆에 있던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키 작은 자신이 나무에 오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조롱할 것을 알면서도 기어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느 젊은 목사님이 설교 중 너무 긴장하다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신분이 세리였고 키가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몹시 보고 싶었습니다."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가 은혜가 있어 그런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니고데모가 사는 동네에 오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고 싶어 나아갔으나 키가 작아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쯤 되자 성도들이 "와" 하고 웃어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목사님은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순간 재치를 발휘했습니다. "그때 삭개오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그 자리는 내 자리야, 빨리 내려와."

삭개오는 키가 작다는 장애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장애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적은 장애를 만나도 그 장애 때문에 주저앉아버리곤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과 구원의 감격을 맛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앞에 조그만 손해나 장애가 오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의롭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왜냐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키 작은 장애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십니다. 찾는 자를 만나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 앞에 그 열심으로 삭개오는 나아갔던 것입니다. 구하고 찾는 자를 주님은 만나 주시고 가까이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을 바에는 잘 믿고 싶지 않으십니까? 온전하게 믿고 싶지 않으십니까? 인생을 살면서 내 이름에 새겨진 의미들이 헛되지 않도록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인생을 살면서 참 가치와 보람을 느끼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주님을 사모해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욕구를 가진 인생을 주님께서는 기뻐 받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르심과 삭개오의 영접입니다.

그가 뽕나무에 올라가 있자 예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주님이 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원함을 보십니다. 우리 자신의 원함과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만나서 우리의 생애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만나자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내가 너희 집에 유할 목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기 '하겠다'는 의지적인 단어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4장에도 나옵니다. 수가성에 목마른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 4절에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을 지나가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수가성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냥 우연히 수가성을 지나가신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 가야할 목적이 처음부터 있으셨습니다. 왜냐면 구원받아야 할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목말라하는 한 여인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주님께서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우물가에 나온 여인이 그 영혼의 목마름을 주체할 길 없어 고통 받으며 마음으로 탄원하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들으시고 수가성으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그 주님은 자기를 간절히 만나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역시 아셨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향하여 "삭개오야 내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삭개오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다나엘이 주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전부터 이미, 그를 보고 계셨고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나다나엘을 아셨던 우리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십니다. 내 마음에 있는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내 결점도 아시고 내 연약한 감성도 아십니다. 주님께 은밀히 가리고 싶은 나의 비밀스러운 부분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깊은 밤에 외로이 홀로 흐느끼는 그 슬픔도 주님께서는 아시고 계십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당하는 그 고통과 아픔을 아십니다. 내 근심과 염려를 아십니다. 삭개오를 아시던 주님께서는 여러분도 저도 낱낱이 아십니다. 여러분이 어젯밤에 흘렸던 눈물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깊은 탄식과 한숨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내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성경은 "어찌 젖 먹는 자식을 그 어미가 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당하는 그 고통과 곤고를 아시며, 내 마음 속 깊은 허무함을 아십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나의 빈 공간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를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알아주신다. 내 동족, 유대인 모두 나를 벌레처럼 대했는데 예수님은 직접 내 집에 오신다는 감동 때문에 삭개오는 금방이라도 나무에서 떨어질 것처럼 급히 내려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습니다."

셋째로, 변화된 삭개오의 모습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어린이가 학기말 시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잘하는 착실한 우등생이므로 별 어려움 없이 답안지를 잘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문제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그 문제만을 붙들고 낑낑거리며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감독하시는 선생님은 멀리서 이 모습을 보시고 "저 놈이 고전하고 있구나"하고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는 풀릴 듯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문제로 너무 안타까워했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가 보기 딱해서 자기 답을 보고 쓰라고 살짝 시험지를 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도 있고 끝까지 자기가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며 보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옆구리를 치며 빨리 보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 광경을 보시면서 "저놈이 지금 시험을 당하고 있구나"하며 그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십니다. 드디어 끝나는 시간이 되자 그는 견디다 못해 친구의 답을 보고 얼른 써 버렸습니다. 선생님은 "결국 넘어갔구나"하고 생각하셨지만 모르는 척하고 시험지를 다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등생은 맨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내지 않고 미적거리더니 무거운 발걸음으로 선생님께 와서 답안지를 내놓으며 "선생님, 빵점 주세요"라고 힘없이 말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감격해서 "네가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내가 보았단다. 너는 이제 고백함으로써 승리했다. 너는 정말 훌륭한 학생이구나"하시며 그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일생을 통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까, 아니면 출세하는 일이었습니까? 가장 어려운 일은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회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로서는 정말이지 회개하기가 어려운 일 중의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모름지기 세상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없어서 인격도 나라도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가장 어려운 일이요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자 프란체스코의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제자 한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으로 천국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서 유달리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다고 합니다.
그는 궁금하여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대답하기를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란체스코가 앉을 보좌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자기 스승이지만 너무 높아지는 것에 시샘이 나서, 어느 날 조용히 프란체스코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세. 가장 큰 죄인이야" 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자는 "선생님,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나쁜 사람들이 많은데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십니까? 그것은 정말 잘못된 거짓말입니다"하고 반박을 했습니다. 이 때 성 프란체스코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가 날 잘 몰라서 그런 걸세. 나는 참 죄인이야. 만일에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일세."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죄인의 괴수이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이고, 교회를 핍박한 자이기에 어떤 핍박을 받아도 자신은 할 말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는 말도 합니다. 그의 말을 좀 쉽게 풀이하면, 자신은 못나고 나쁜 기질이 있어서 늘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회개한 죄인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저것 논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니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가정 문제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수했습니다.

회개는 은혜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회개하지 못하도록 술수를 쓰며, 우리는 그 술수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배를 타고 물놀이를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푹풍우가 몰려오더니 배가 막 뒤집어지려는 것이었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 마귀가 낄낄거리며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자기의 제안을 들어주면 폭풍우를 멈추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워낙 급한 상황인지라 그의 요구조건을 물으니 그들의 이름을 다 <사>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입맛이 썼지만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니기에 그 요구를 수용했고 폭풍우는 잠잠해졌습니다.

살아난 그들은 약속 이행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김남일 : "내 이름은 뭐야? <김사>? 내가 무슨 김장수인가?"
안정환 : "<안사>? 아니 나는 물건은 하나도 못 산다는 말인가?"
황선홍 : "<황사>? 아니 내가 무슨 중국 바람인가?"
유상철 : "<유사>? 내가 무슨 유사품만 만드나?"
이영표 : "<이사>? 나는 맨날 이사만 다니나?"
모두가 기분이 나빠서 투덜거리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설기현이었습니다. 아무리 폭풍우가 와도 마귀와 타협하지 마세요.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사단은 첫째, 우리를 교만하게 하여 회개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지혜입니다.

둘째, 변명하게 하여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만듭니다. "너만 죄인이냐"고 철마든지 변명 거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뿌리 깊은 것으로 태초에 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 하와를 만났을 때 너무 좋아서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가 막힌 사랑의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범죄한 다음에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아담에게 물으시자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라고 변명을 해 버립니다. 그러고 보면 변명이 얼마나 뿌리 깊은 죄입니까?
죄를 정당화하고 남에게 전가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셋째, 사단은 회개의 결과를 위협합니다. 만일 네가 회개하면 이런 망신을 하게 되고, 저런 문제가 생기며, 또 다른 사람에게까지 파급이 되니 회개하지 말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결과와 파급되는 다음 문제를 가지고 협박하니 회개할 자유를 잃게 되고, 또한 두려워서 회개할 용기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를 내일로 미루라고 유혹합니다. 아직 젊었고 아직도 날이 많은데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기회를 가로막아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오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딱 보는 순간 자기 죄스런 모습이 확 드러납니다. 그동안에 그는 변명도 많았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세리 노릇을 한다고 하기로서 내가 어째서 죄인이냐?"는 등등의 말로 스스로를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왜 도둑이냐? 나는 정당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도둑입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고 합니다. 십분의 일이 아닙니다.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쌓고 또 쌓고 모으고 또 모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만족을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새로운 부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다른 것으로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빈 공간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욕심, 자기를 위하던 마음이 그대로 깨져 나갑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1절을 보면 도둑질한 물건에 대해서는 4배를 갚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을 따라서 4배를 갚겠습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8절에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이란 말은 원문대로 하면 "있다"는 말입니다.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삭개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사실은 그에게 예수님을 믿은 증거가 당장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에 삭개오는 그대로 자기 모습이 다 드러났습니다. 이대로 자기 욕심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을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와 고통을 주었지만 이제는 이웃을 도와주고 나눠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주겠습니다. 갚겠습니다. 회개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칼 힐티라는 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세 가지 강력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돈과 명예와 쾌락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그때부터 사람은 비로소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 삭개오가 이런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삭개오는 죄인이요, 부자였으나 고통 중에 살았습니다. 소외감을 가지고 좌절과 두려움 중에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를 풀어주십니다. 삭개오는 새로운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 삭개오의 모습입니다. 자기 이름대로 돌아간 삭개오입니다. 과거 그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생각과 가치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믿음의 걸음을 내걷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 바로 당신, 삭개오를 지적하고 찾으십니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속에서 구원받기로 작정된 선택의 백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삭개오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고 있어야 할 시간에 있지 않고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 돈, 권력이라고 하는 자리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으셨습니다.

오늘 지구촌에 54억의 사람 중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쾌락과 명예와 돈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 아버지께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이라고 하는 절망의 함정에 빠져있고 어떤 사람은 청춘이라고 함정에 빠져 고귀한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 업적, 의지, 성공 등의 함정에 빠져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라고 하는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여러 파도에 밀려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삭개오는 다시 찾은 바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기 이름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렸던 자기의 신분을 찾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가치 있는 생애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번밖에 못사는 소중한 생애인데 진정으로 의미있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중심되는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저는 설교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아픔을 아십니까? 잃어버린 자의 고통을 아십니까? 잃어버림을 당한 사람도 고통이 크지만 사실 잃어버린 사람은 더 큰 고통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멋지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따라 걸작의 생애를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랬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어서 나만 고통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안타깝게 노래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오늘도 내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또 그 속에서 알찬 인생, 행복에 넘치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간절함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간절함이 내 생애를 향해 있으십니다.

삭개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은혜를 목말라하고 사모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주님,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 앞에 마음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내 생애에 찾아오시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삭개오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는 근본적인 가치기준이 바뀌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듯 비참하고 외롭게 언제까지 이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삶을 해석하는 마음도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위해 오신 주님처럼 오늘도 내 삶에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섬기고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돌아보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지금까지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달려와 보니 무엇을 이루고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지난 삶을 살아오는 동안 가진 여러분의 후회는 무엇입니까? 삭개오처럼 교회 중심자리에서 멀어져 있지는 않았습니까? 헛된 것들, 썩어질 것들 얻겠다고 영생의 선물을 소홀히 여기지는 않았습니까? 세상 지위 얻겠다고 하늘 자리를 버리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잡아보니 신기루와 같은 것들 그것 붙들겠다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오지는 않았습니까?

「세계를 정복하고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 목놓아 울었다」고 하는 알렉산더는 그가 죽은 후 관 밖으로 두 손을 펴 내어놓도록 했습니다. 「인생은 공수레공수거야. 빈손으로 왔던 인생, 빈손으로 가는 거야.」역사 속에 교훈을 남겨달라는 그의 지혜가 아니었겠습니까? 내 인생 끝자락에 주님이 나를 반겨줄 수 없다고 하면 내가 얻은 그 자리에 주님을 얻을 수 없다고 하면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게 될 때에 어떤 분이 물 속에 뛰어들어서 극적으로 그 아이를 구했습니다. 의식을 찾은 후 아이는 그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 제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때 이 아저씨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괜찮다. 꼬마야. 다만 너의 생명이 구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증명해 보이거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자신을 버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정말 변화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내가 잘라야 할 것들, 내가 정리해야 할 것들, 내가 끊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가 적극적으로 더 붙들고 추구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디도서 2장 14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가 좋아하는 엘리사벳 노벨의 "조금(A Little)"이라는 시를 읽어 드리면서 오늘 설교를 맺고 싶습니다.

설탕을 조금 가지고도 음식 맛이 달게 되네.
비누를 조금 가지고도 내 몸이 깨끗이 되네.
햇볕을 조금 가지고도 새 싹이 자라네.
조금 남은 몽땅 연필로 책 한 권을 다 쓰네.
조금 남은 양초 하늘하늘 춤추는 불빛 아무리 작더라도 불빛은 귀하지.

우리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 이름대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내 인생이 펼쳐지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 삶이 나아가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작고 귀한 불빛 -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불빛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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