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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립] 신령한 교회로 만듭시다.(벧전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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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령한 교회로 만듭시다.(벧전 2:1-6)- 창립기념주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여 부르셨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3년 동안 같이 훈련하시며 계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셨고, 자신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되심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려 주셨고, 택한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계속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어보시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신앙고백 할 때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자에게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축복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처음 만났을 때 사용했던 이름 대신에 신앙고백한 후에는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고(요1:42), 3년이 되던 해에 베드로의 '이름 위에(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들을 통해) 예수님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난 뒤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애 되심을 담대히 증거하며, 전도 사역을 잘 감당하여 마침내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인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존재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기준하여 마치 사업을 경영하는 것처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즉, 육적인 기준을 가지고 교회의 성공여부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크게 올려 교회당을 세웠다고 해서 훌륭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봉사하고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시적인 어떤 외형적인 보이는 결과만으로 교회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자선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셨으나 그렇다고 의사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나 교육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밀 부르너'는 [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 교회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룹별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리를 배운다고 해서 학교와 같은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본다고 해서 자선 단체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를 비판합니다. 교회를 사업 단체로 오해하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구제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본질은 신령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며, 맛 볼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신비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요, 이 귀한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보십시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함께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이 대 믿는 자들에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고(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인 행 1 : 4절을 따라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하며, 날마다 전도하였고, 배운 말씀을 실천하며 구제하였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예수그리스도게서 메시야 되심을 믿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의 모임을 신령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미스바교회가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르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 신령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만 교회 존재의 가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건물보다 성도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몸이요. 지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핍박과 환란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고, 자신들도 부활한다는 분명한 믿음이 굳건했고, 동시에 재림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믿음의 공동체'였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 날을 사모하며, 받든바 은혜를 가지고, 서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미스바교회도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명을 감당하여야 신령한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1. 신령한 젖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갓난 아들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갓난아이들 같이"에서 '갓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티겐네타'(* ) 는 '아르티'(* , '방금')와 '겐나오'(* , '되다', '나다')의 합성어로 방금 태어난 상태를 묘사해 줍니다(Lenski, Robertson).

이 '갓난아이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자에 대한 비유로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간절히 찾듯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마 18:3; 막 10:14,15).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생명력이 있고, 살아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하며, 영적인 양식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젖과 같고, 순수한 젖과 같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혹자는 '말씀의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AV, Calvin, Bigg, Caffin, Bengel, Keil, Lenski).

2) 또 다른 해석은 '사리에 맞는 젖'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RSV, Vincent, Hort). 그러나 두 가지 해석 중 '말씀의 젖'이 타당하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도 '말씀'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1:23-35) 본 절 후반부에서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수하고 신령한 젖'은 가감이 없는 순수 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말씀의 젖으로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말씀의 젓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를 나타냅니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성장하는 것은 일생동안 이루어야 하는 과제입니다. 성장하고 성숙해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가능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히 5:11-14).

'온전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으로 진리를 성령의 역사로 깨닫고, 회개하여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영적'으로는 죽은 영혼이 거듭나며, '법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는 '칭의'와 '가족적'으로는 하나의 자녀가 되며, '소속적'으로는 천국시민이 되어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며, 영화롭게 하시는 영생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합니다.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방금 태어난 어린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며, 더운 여름철에 시원한 냇가나 그늘이나 바람을 찾아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떠나는 것처럼 우리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젖은 태어난 어린 아이가 먹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젖을 먹으므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합니다. 저항력이 우유를 먹은 아이들 보다 모유를 먹으면 더 강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들도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신령한 젖을 먹고, 영혼이 건강하고 신령한 모습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미국 감리교 '알렌'목사는 자기 교인을 대상으로 조사했답니다. "교인 중 등록은 했지만 20%는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며, 25%는 기도하지 않으며, 35%는 성경을 읽지도 않으며, 40%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고 있고, 75%는 봉사를 하지 않고 있으며, 85%는 한 사람도 전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통계를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 100%가 모두가 천당을 가는 것은 희망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신령한 것입니까? 세속적인 것입니까? 세속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살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어느 것을 더욱 더 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우선순위를 바로 정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라나기를 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위치가, 경제적으로 사업이 자라나고, 재산도 불어나기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신령한 것도 자라나기를 갈망합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받은 자가 맛보는 은혜의 단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용서를 맛보아야 합니다. 죄의 용서를 맛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젖을 처음으로 맛보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는 신령한 은사를 맛본 사람은 이 세상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3) 성령의 능력을 맛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권세가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4) 내세의 능력을 맛보아야 합니다. 나사로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부자의 밥상'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로는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는 현재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단계로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암 부스'는 앞으로 다가 올 교회의 위험은 성령이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이 없는 천국을 선포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더욱이 본문에서 '구원'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의 최종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화의 완성(完成)을 시사를 한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계속적인 성장으로 나타내 보여야 할 미래의 목표이기도 합니다(1:5,9; 고전 3:1-4, Stibbs, Caffin).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어 성령의 능력,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며, 참된 소망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반드시 구원을 받되, 충성된 헌신 자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교회가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4-5절을 봅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라고 하였습니다. '신령한 집'은 저자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을 '제사 직'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아 성전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시 69:9;사 56:7; 막 11:17, Blum).

한편 '세워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메이스데'(* )는 예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동사와 동일하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올 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돌'이 되며,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 교회를 이루게 됨을 강조합니다(롬 12:1; 15:16; 고전 3:16: 엡 2:21-22; 3:6, Alford, Vincent, Stibbs, Leighton, Selwyn,Mi- chaels).

여기의 집은 건물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를 의미 합니다. 구약의 신령한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앞 절에서 그리스도를 산돌에 비유하였으나 본 절에서는 '산돌'을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산 돌'에 해당하는 헬라어 '리도이 존테스'(* )는 복수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산돌이 되며, 생명의 근원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가되어야 할 존재임을 시사합니다(Lenski, Leighton, Robertson).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성전으로 오셨고 이제는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젖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신령한 집은 그리스도의 성숙된 인격을 나타내는 성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은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시몬은 아담의 후손인 흙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반석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인간은 그 때부터 흙으로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 비바람이 불고 죽음의 홍수가 넘쳐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세워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얼마나 큰 집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산돌 같은 신자가 몇이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말없이 충성하는 교인)?그러므로 이 귀한 반석과 같은 신앙으로 우리 미스바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5절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령한 산돌이 되는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산에 있는 반석으로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반석에서 깨어져 나와야 집을 지을 수 있게 됩니다. 땅에 붙은 반석은 집 지을 수 있는 반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름의 뜻이 반석이었으나 땅과 같이 함께 있는 반석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녔으나 땅의 속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마16:23)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역사로 육의 사람이 깨어지면서 신령한 신앙의 집을 세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신령한 돌이 된 성도들의 심령 속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심령에 자신이 거하실 신령한 집을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 신령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헌신 자가 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3. 신령한 예배(제사)가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제사장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헬라어 '히에라튜마'(* )는 '제사장의 직분'이나 '제사장의 단체'를 의미합니다(눅 1:8, Hort, Meyer).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가진 '산돌'이라는 사실에서 진일보하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제사 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이 되었음(만인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제사장적 역할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를 합니다(Blum, caffin, Alford, Selwyn, Reicke).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고 제물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가지고 선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그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친히 피 흘리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한 산제사 , 즉 신령한 제사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몸으로 구약의 제사 신약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는 입술로 드리는 찬양의 제사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드리는 눈물의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의 사업에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헌신과 선행과 나누어 줌으로 드리는 '행위의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미스바교회에는 많은 분들이 신령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충성했기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기도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와 사명을 떠나지 않고 충성해 온 장로님들 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지금도 열심히 하난을 섬기고, 미스바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고 헌신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귀한 상급을 받으시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물을 준비하지 못한 제사장은 구약시대 당시에 하나님의 성전(성소, 법막, 회막, 증거막)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제물은 미스바교회 성도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함께 하나님게 드려질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양들의 털을 깍고, 젖을 짜는 목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양들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린 거룩한 제사장 이셨듯이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우리의 몸을 신령한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요, 짐승을 잡는 칼잡이요, 다른 말로 하면 칼 들고 짐승 잡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의 사명은 말씀의 칼을 들고 교인들에게 내재해 있는 짐승의 근성을 잘라내어야 합니다. 칼로 육적인 것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 구약의 제사장이요, 신약의 목사요.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지자가 모두 제사장들인데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양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습니다. 그는 양을 치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길러서 털을 깍거나 젖을 짜지 않았습니다. 제물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불로 태워 제사를 드리는 일(번제)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신령한 제사장이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 제물이 되어??거룩하신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당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쫒아내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서 커다란 고민을 같고 있습니다. '양들을 살찌우고 젖 짜고 털을 잘라서 목장을 번영케 하는 사업가 목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물이 될 양들을 기르는 신령한 제사장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어떤 마음 같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예수님처럼 참된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미스바교회가 부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분이라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제물이 될 사람이 없으면 그 목장은 하나님 앞에 설 때 교회의 존재목적,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실패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털을 자르고, 젖을 짜고 새끼 낳고 그래서 번창하기 위한 목장이 아니라 제물 삼을 양을 기르기 위하여 우리는 제사장적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한 최후 목적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여 자라게 해서 신령한 집이 되게 하고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성도들이 신령해 지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신령한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신령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까?

지난 금요일 구약의 언약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배웠습니까? 우리가 선택함을 받았으면 의무와 본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해 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신령한 성도와 교회는 모이기를 힘쓸 때 가능해 지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배우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입술의 제사인 찬송하는 성도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이다. 천국 백성을 만드는 전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하기위해 기도하는 성도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고, 지금까지 충성한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제물이 되는 성도가 되어 신령한 교회와 신자가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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