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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리다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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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나라의 성령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목회자 가운데 조용기 목사님과 하용조 목사님이 한 자리에 앉아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목회자로 또 제가 닮고 싶은 분들이라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사실 이 분들의 목회는 개인적 고통을 빼놓으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을 달고 살아왔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목회를 시작할 당시부터 폐결핵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목회에 헌신해오고 있고 하 목사님 역시 간암 수술을 6번이나 받고 최근에는 일주일에 3번씩 혈액투석을 받는 등 최악의 건강 상태에서도 목회와 선교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서로의 연약함을 끌어 앉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생은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줄을 잡으면 살고, 놓치면 죽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과 같지요. 평지를 걷는 게 아니라 벼랑 끝에서 주님과 만나는 것이 믿음이란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지금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여러분 번지점프가 어떤 것인 지는 잘 알 것입니다. 몸에 줄 하나를 의지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일종의 스포츠가 아닙니까? 또 자신들이 지금 있는 자리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이 솔직한 고백 앞에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한 시대를 움직이는 그들 역시, 오늘도 하나님의 만져 주심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지만,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입니까?

오늘 옆에 앉은 분들을 한번 보십시오."깨지기 쉬운 존재들"임을 서로 확인해 보시고 조심스럽게 만져 보시기 바랍니다. 참 우리의 겉모습을 가지고는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도 강단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니까 피서를 다녀들 왔는지 얼굴들이 다 건강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겉모습일 뿐, 조금만 그 속을 드려다 보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입니까? 말 한마디에 우리가 누리던 평안이 깨지잖습니까? 관계도 부서집니다. 주님을 향했던 믿음도 조그마한 일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회당장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당 그러니까 단순한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한복판에, 중심에 있었던 그런 기관입니다. 이것은 물론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더 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수행됩니다. 회당은 학교역할도 했고, 심지어 재판소 역할도 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비슷한 역할까지 회당 장은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명예가 있었고, 사회적 존경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회당마다 적어도 10명쯤의 관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큰 회당의 경우에는 회당 장이 3사람씩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런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자가 예수님에게 나와 고백합니다. 본문과 포함된 22절과 23절을 보시겠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의 12살 먹은 어린 딸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더욱이 병행구절인 눅8:42보면 '무남독녀 외딸'이었으니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자기 앞에 사랑하는 자식이 병들어 죽어 가는데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을 아십니까? 뭐 여러분도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기라도 하면, 또 그 병이 좀 심각한 것이라고 진단이 나면 어떻습니까? 별 별 노력을 다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소설로 그려내서 화제가 된 책이 있습니다. 소설가 조창현씨가 쓴 "가시고기"라는 책입니다. 다움이라는 아이는 백혈병을 앓고 있습니다. 다움이를 낳고 난 후 다른 남자를 만나 프랑스로 떠나버린 아내를 대신해서 아들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은 아빠였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오직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아들의 백혈병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한 아빠는 결국 자기의 신장을 팔기로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장을 팔기 위해 장기 검사를 하던 중, 아빠가 간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 결국 신장을 팔 수 없는 아빠는 자신의 각막을 팔아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간암을 더욱 깊어져 아빠가 죽음을 맞아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빠는 자신의 병과 죽음 때문에 아들이 슬퍼하는 게 싫어서, 아들 다움이를 프랑스에 있는 엄마에게로 보내고, 자신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들을 살려내기 위한 아빠의 희생이 아들은 살렸지만, 자신의 몸은 산산이 부셔져 죽어가야 했던 그 모습은, 새끼를 위해서 자신의 몸뚱이까지 먹이가 된 가시고기를 연상시켜 부모의 심정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 회당장은 자기의 명예와 신분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자, 이런 정도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당시 예수는 젊은 예언자,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사람, 어떤 이단의 교주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던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앞에 와서 회당장이 엎드립니다. 그냥 나와서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늘22절에 보시면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그 다음에 보시면 '발아래 엎드렸다'고 그랬습니다. 발 아래에 엎드렸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 정도의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 앞에 엎드리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별 별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 마지막 소망을 예수께 걸고 그는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예요. 이 회당장에게 사랑하는 딸로 말미암은 고통의 아픔, 그것이 없었다면 이 회당장이 예수 앞에 나 왔겠습니까? 우리 중에서도 고통 받지 않는다면,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 참 많을 거예요. 그래서 옛날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변장된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허하게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어떻게 합니까? 23절에 보시면 '많이 간구하여' 한번만 호소한 것이 아니예요. '선생님 살려주세요. 내 딸 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 소리치고 부르짖는 이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의 체면도 자신의 명성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그 상황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지금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작년에도 하용조 목사님과 만나 식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때 막 간암 수술 6번째를 마치고 한국에 와 있던 때입니다. 그 때 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 암 수술을 받을 때, 사실 죽음보다는 교인들을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미국에서 수술 받으러 들어가는 순간, 아들이 "수술 잘 받으세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수술을 잘 받을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없고 의사가 수술을 하더라도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사는 것이구나"라고요. 바로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사실을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살아지는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참 숙연해 지는 자리였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갈등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 속에 내가 할 수 없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와 주 앞에 엎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 마지막 희망, 최후의 희망을 걸고 주 앞에 엎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이에 그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 가며 에워싸 밀더라" 자, 어떤 일이 생겼어요? 자! 여기 보면 '그와 함께 가실 새...' 회당 장은 드디어 예수와 함께 걷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이제 예수와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집으로 갑니다. 아직 이 시점에서 그의 문제는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는 이제 주님 만나고 주님과 함께 걷게 되었으니까 그 주님을 통하여 해결의 소망을 안고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 집에 가시면,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우리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해결의 희망을 안고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해결 된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그가 걷고 있었던 도상,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던 도상에서 문제가,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합니다. 자, 25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이 사건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치료받는 사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사실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가다가 한 여인이 주님 앞에 와서 또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물론 이 여인을 치료를 받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좋은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장 야이로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지금, 자기의 사랑하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일분이 아쉬운 때입니다. 한 순간이 새로운 때인데 사랑하는 딸의 문제의 해결이 열 두 해를 혈루증을로 앓는 여인 때문에 지연 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 회당장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방해거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자, 왜 주님이 이런 사건을 허용하셨을까요? 저는 한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이것은 이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강화시켜주시려는 의도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내 문제가 급합니다. 그런데 내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기도해서 빨리 빨리 응답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응답을 받는데 나만 응답 받지 않는 것 같아요. 여러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 해결되는데 나만 해결되지 않아요. 자,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기도응답 받고, 다른 사람들이 문제해결을 경험하는 그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하나님!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다 들어주는데 왜 내 기도만 안 들어주세요? 이렇게 접근하지 마시고요, 내 친구의 기도를 응답하신 주님! 그렇다, 그 주님은 내 기도도 응답해 주신다. 이렇게 접근하시길 바랍니다.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주님! 그 주님은 나에게도 동일한 자비와 동일한 긍휼을 베풀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체하고 있습니다. 자, 성질 급한 사람은 여기서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돌아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었던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네가 기다릴 수가 있느냐?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수가 있느냐?" 바로 이러한 시험이 또한 이 사건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8장을 보시면 억울한 일을 경험한 과부 한 사람이 재판관에게 와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달 라고 호소하는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가르치면서 누가복음 18장 1절은 어떤 말씀으로 시작됩니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라사대"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 한번의 기도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어요. 어떤 경우에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의 신뢰의 관계가 생기도록, 문제의 해결을 지연하면서 기다리게 하시고 기도를 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엎드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엎드리시길 바랍니다. 계속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예수를 붙잡아야한다는 것입니다. 35절을 봅니다."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한 마디로 청천벽력입니다. 딸이 그 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다는 비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비보를 전하면서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히지 말고 보내드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예의바른 것 같지만 사실은 불 신앙의 소치입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병은 고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그 능력에 한계가 있겠습니까? 주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다만 섭리 가운데 원하실 수도 있고 원치 않으실 수도 있을 뿐이지 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36절에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여기서 '곁에서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옆에서 들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무시했다(ignore)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말을 무시해 버리시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무슨 뜻입니까? 문제가 커졌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처음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안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 앞에 쉽게 두려워하고 체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그 분이 어떤 분입니까? 인생이 두려워하는 풍랑도 꾸짖어 잔잔케 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 분이 어떤 분입니까?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어 무덤에다 착고를 채워 놓았던 귀신들린 거라사의 광인 속에 있는 귀신 떼를 바다 속에 수장시킨 분이 아닙니까? 그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 모두가 죽음 앞에 절망 할 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 아닙니까? 그 분은 자연계와 영적인 세계와 영원한 세계를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그 엄청난 희생의 대가인 십자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셨습니다. 그런 그 분이 어찌 내 인생을 붙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울은 롬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지 않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야이로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믿음을 추스릅니다. 그리고 집으로 갑니다. 갔더니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 슬퍼하며 애곡합니다. 예수님은 소녀가 자는 것이니까 울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 그 말씀을 죽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살려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40절에 보면 조문객 중에는 비웃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자들을 다 물리치고, 그래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 즉 야이로 부부와 세 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소녀에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 일으키며 외칩니다. '달리다 굼!'

'달리다굼' 본래 아람어인데 이것은 그 당시에 상당히 많이 쓰이던 보편적인 말이었다고 합니다. 언제 쓰느냐 하면 우리가 아이들이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죠? 그래서 부모가 아침이 되면, 날이 밝아 오면 자녀들을 깨웁니다."야, 학교 갈 시간이야! 너 일어나." 그럴 때 쓰는 말이예요. '달리다'는 말은 달려간다라는 뜻이 아니라 달리다는 아주 작은 것, 미천한 것, 불쌍한 것, 연약한 것 그런 것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은 손을 잡아 일으키며 외칩니다. "달리다 굼!" 그 말씀을 듣고 시체가 움직입니다. 살아난 겁니다. 이 말씀과 함께 이 소녀는 벌떡 일어납니다. 새로운 삶이 그에게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일어 날 수 없는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라도 지금 직면한 문제가 너무 큽니까? 상황이 너무 나쁩니까? 그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전능자이십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히13:8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아무리 우리의 문제가 크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 문제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조건, 그리고 문제를 보면서 부정적인 생각이나 두려움과 의심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아침! 우리의 '달리다 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다시 일어나야 할 자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어려운 상황, 큰 문제 앞에 있습니까? 비록 내가 벼랑 끝을 다닌다 할지라도, 마치 번지 점프하는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음의 줄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 분명히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달리다굼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고,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놀라운 일들도 생겨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말씀 붙잡고 믿음을 굳게 지킴으로 용기를 얻고 영력을 얻어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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