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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눅 15: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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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까지 본문에서 두 아들의 차이가 뭘까? 를 생각하며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번을 생각하면서 어느 날, “두 아들이 같다”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같은 이유는 아버지 재산(물질의 축복)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과 생활은 온통 아버지 재산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산 받을 재산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고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는데도 자기고집을 부려 결국은 재산을 앞서 받아 다 탕진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집 앞에서 매일 기다리시던 아버지 앞으로 돌아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동생처럼 고집부리지 않고 아버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굳이 두 아들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면 아버지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기다리지 못한 차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의 현주소에서 신자들은 오늘 이야기의 주체와 이야기가 주는 교훈을 생각할 때 성령께서 감동해주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1. 이야기의 교훈은,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만 산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두 아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보이게 아버지 재산을 탐했고 행동으로 표현을 하였지만 큰 아들은 속마음은 같은데 다만 표현을 감추고 내색하지 않은 채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차이는 사람입장에서 보면 차이가 있다고 여길지 모르나 하나님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분 앞에서 우리의 중심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여전히 모두가 죄인입니다. 다만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죄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도 항상 당당하고 주님 예수와 항상 동등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은 주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유대인은 예수님을 제거하므로 문제를 해결하려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재산을 갖고 탕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면서 아들에게 재산을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는 음모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 유대인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기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 구원받는데 더군다나 자신들은 율법까지 다 지켰으므로 구원과 칭찬은 이미 보장되었다 생각돼서 저들은 오직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였습니다. 
사람이 제일 듣기 싫은 말이 있다면 “네가 잘못했다. 용서를 빌어라” “너는 죄인이다. 회개하라”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평생 칭찬만 듣고 산다는 저들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셨으니 저들이 수긍하고 받아드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큰 아들처럼 이제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눈치껏 하면서 기다리기만 하면 다 내 것이다. 라는 마음 자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을 인해서 저들이 가슴을 치며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혹 우리 중에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나 은혜와 구원을 받는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문을 통과해야만 하여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의 아버지가 기뻐하셨던 일은 아들이 잘못을 느끼고 즉시 아버지께 돌아와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날마다 회개하며 용서를 받는 일을 제일 기뻐하시고 주님과 성령께서도 보람을 가지십니다.

2. 이야기의 주체와 주권은 아버지라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아들은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누구입니까? 
아들이 돌아오게 된 원인이 있는데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와 기다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아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확신은 누가 주었습니까?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러기에 이야기의 주체는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한국교회사에 보면 이기풍목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망나니요 깡패였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야단치려고 좇아가면 이기풍은 얼른 땅에 금을 긋고 ‘이 금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다.’ 하고 아버지를 놀리고 도망가던 아들이었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때려 부순 사람으로 골치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중병에 들어 선교사님의 희생적인 간호를 받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최초 한인목사 7인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고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된 것은 분명 이기풍입니다. 그러나 배후에서 믿을 수 있도록 목사가 되게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고 사랑해주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가 깨닫지 못했다면 그 망나니가 돌아왔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해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저 살려고 아내를 동생이라고 하는 비열하기도 하고, 야곱처럼 인간적 야망과  열심 갖고 하나님께 내 고집을 부렸었고, 사울처럼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도 했던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문도 그렇고 성경 전체가 사람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역사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가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일을 희생적으로 충성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묵상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용서해주시고 신자다운 신자가 되게 해주셨나를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분명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아버지의 주권을 피해 갔던 아들은 결국 의지하던 재물이 다 허비되고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하지 마라” “하라”는 하나님의 주권이 껄끄러워 못 견디는 사람들이  간섭받는다는 생각에 간섭을 안 받는 큰 교회를 찾습니다.

간섭이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바로 알려주고 순종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면 우리 사람이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들으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4;13-15) 
작은 아들은 자기 인생 자기가 주관하는 줄 알았습니다. 돈이면 다되는 줄 알았습니다.
돈이 자기의 꿈과 행복을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떻게 돈을 늘리고 어떻게 금의환양하겠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불행은 바로 “주의 뜻이면..” 이라는 단서를 항상 생략하므로 발생되었습니다.
(1902년 영국 애드워드 왕자가 64년 만에 웨스터민스터사원에서 즉위식 - 공고문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라는 단서가 없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세상만물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나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두 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또는 우리의 신앙이나 생활의 차이가 나는 우리들로 두 아들은 결국 같은 종류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기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과 같은 우리들의 신앙은 아버지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 같습니다.
그러기에 좀 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늘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은총을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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