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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선택하라 (신 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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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신명기 30:19-20)

어느 주일 아침 미국에 이민간지 10여 년 되는 교포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일주일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다른 친구 부부들과 바닷가에 놀러가자는 것이고, 부인은 그래도 명색이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에 안 가고 놀러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주장도 옳았고 부인의 주장도 옳았습니다. 이민 생활이란 그 실상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피곤합니다. 그리고 미국인의 생활자체가 즐기기 위해 돈벌고, 번 돈으로 생을 즐기고, 다시 쓴 돈을 갚기 위해 일하는 생활을 반복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연휴가 끼게 되면 저마다 앞을 다투어 산으로, 바다로 나가곤 합니다. 그런 생활에 젖어버린 교포들 역시 주말이나 휴일을 즐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바닷가를 찾아 친구네와 소풍을 나가자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부인도 남편과 함께 바닷가로 따라 나갔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바닷가, 우거진 나무 숲, 푸른 잔디밭에 다섯 쌍의 부부들이 짐을 풀고 가져간 고기를 굽고 밥을 짓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으레 뒤따르기 마련인 양주를 주거니 받거니 마셨습니다.

온 종일 먹고 마시고 떠드는 사이에 하루해가 저물어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특히 그 집사인 남편은 술이 과한 나머지 취기가 깊었습니다. 친구들이 걱정이 되어서 운전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자, 그는 이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서 일행과 함께 바닷가를 떠났습니다. 30분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컨테이너 트럭과 부딪쳤습니다. 부인은 현장에서 죽었고 남편은 병원으로 옮기던 도중 길에서 죽었습니다. 같은 날 부부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후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남긴 두 마디가 귀에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그 장례식을 집례 했던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두 마디란 "주일날 교회에 갔더라면, 술이 원수야."라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학교를 선택해야 하고, 친구를 선택해야 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고, 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택의 실수를 계속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의 오류를 범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임을 알고 선택했는데 그만 그것이 실패의 길이었습니다. 행복의 길임을 알고 선택했는데 그 길은 불행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안내서를 사람들에게 주셨는데, 그 안내서가 곧 성경 말씀입니다. 이 성경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던 링컨 대통령은 말하기를“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는 성경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본문 19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셨습니다. 선택을 잘 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유하신 선택은 어떠한 것입니까?

一. 생명의 길을 택하라 하셨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에“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명이요, 다른 하나는 영혼의 생명입니다. 짐승에게는 육의 생명만 있을 뿐 영혼의 생명은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이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살아있는 기간이 길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태어나는 순간 햇빛 한번 보지 못하고 생명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수년, 또 어떤 이는 수십 년의 생명을 누리기도 합니다. 혹 100세를 넘기면 장수자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 영혼의 생명은 수십 년, 수백 년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혼이 거하는 처소는 두 곳입니다. 하나님과 천사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누리는 영광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반면 악마와 죄인들이 거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성경은 이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켜 사망이라 하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된 삶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19절) 하셨는데, 생명을 택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택하라 하신 권면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이 지구상에 있습니다. 어느 종교를 선택하든 그것은 인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의 종교인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를 권면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시는 까닭은,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오라 가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주와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의 은총을 비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영국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가는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식사시간만 되면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그는 가진 돈이 없기 때문에 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슬그머니 갑판으로 나와서 싸 가지고온 과자와 치즈를 먹곤 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허기진 상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선장은, 식사시간만 되면 혼자 갑판 위에 앉아있는 그에게 “왜 당신은 식사시간만 되면 여기에서 과자만 먹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선장님, 저에게는 식당에 가서 사먹을 돈이 없습니다.”라고 힘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선장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이 배를 탈 때 지불한 승선비 속에는 이미 식사대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 놓고 가서 잡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식당을 사용하게 됐는데 한 끼의 식사를 하고 나니 곧 미국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은 인류가 지은 모든 죄 값을 대신 하신 것입니다. 이미 죄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 6:51,55) 하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음식에 의해 유지되듯, 영혼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값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며 나라마다 음식문화가 다릅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생명을 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권유를“신앙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거절한다면, 그 결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명기 30:17) 하셨습니다.

二.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택하라 하셨습니다.

본문 20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이는 물질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권세나 명예를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향락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우상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삶의 발자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유일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거나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 사람의 인격은 추한 세상만큼이나 추할 것이며, 그의 발자취 역시 모래 위에 남긴 자취처럼 허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도서 1:2, 2:11)라고 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될 때 그의 인격과 삶은 아름답게 됩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삶의 보람이 있게 됩니다.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이 됩니다.

지난 8월 25일에는 연세대학교 코스모스 졸업식에 축하할 사람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차가 너무 밀려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문으로 들어가서 동문까지 갔습니다. 캠퍼스가 얼마나 넓은지 깊은 산속을 지나가는 것 같이 숲이 울창했습니다. 학생들이 너무 많아 각 단과대학원별로 졸업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더우드 관 앞을 지나면서 이 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26세 된 미국의 젊은 청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미개한 한국인 사랑으로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한 사람의 헌신이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얼마나 많으며, 이들로 인해 이 사회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최신식 병원으로 탈바꿈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한 삶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한일서 5:3) 하셨습니다. 사랑의 성격은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을 사랑하기에 자녀들을 위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처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인 성경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이전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신명기 10:12~13에 말씀 순종의 이유를 밝히시기를“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순종의 이유가“네 행복을 위하여”임을 우리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순종의 이유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일서 3:10,4:20)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증거는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조금 전 드린 말씀처럼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한국민족을 사랑하여 천신만고를 겪으며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뿐입니까?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이 땅과 우리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이겠습니까? 같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한 믿음의 형제 사랑이겠습니까?

셋째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5의 말씀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사명인 성도들을 잘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나 주어진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책임, 사회에서의 책임, 주의 몸 된 교회에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을 잘 감당할 때 이웃에게 본이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기독교 초기에 전해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명을 다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가셨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은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탄했습니다. 천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담당하시던 사명은 이제 누가 감당하며 계속합니까?”
“요한, 베드로, 야곱이 할 것이다.”
“그들이 실패하면 누가 합니까?”
“바울, 바나바, 마태가 할 것이다.”
“그 사도라는 사람들이 불충실하면 어찌합니까?”
이 같은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천사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다른 방법은 없어. 사도들이 불충실하면 다른 길은 없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머리를 흔드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사도들이 이어 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췄습니다. 사도들의 뒤를 이어 속사도들이 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췄습니다. 속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부들이 이어오다가 그만 변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바로잡은 것이 루터와 존칼빈 같은 개혁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이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오늘의 우리들이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머무는 처소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말이 아닌 본이 되는 삶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三.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택하라 하셨습니다.

본문 20절 말씀에“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하셨습니다. 특히 부종이란 뜻은“착 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 힘써 좇아가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밀착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생활의 많은 절제를 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억압이 아니라 복 받는 방법입니다.

그 예로, 병원을 찾아간 환자에게 의사는 많은 행동의 절제를 지시하게 됩니다.“술 마시지 마세요, 담배 피우지 마세요, 음식을 가려 드세요, 무리하지 마세요.”등등의 요구를 합니다. 이것은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건강을 얻는 방법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그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의 영혼과 생활은 죄악과 구습으로 인해 병든 상태에 있었습니다. 잘못된 것 고침을 받아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처방이 곧 성경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부종 속에는 참 자유가 있습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하셨습니다. 육신의 요구를 따라 살아가는 무절제한 생활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방종의 결과는 패망뿐입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을 가득 태운 노예 선이 미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배 밑창에 갇혀 있던 흑인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켜 탈출하기로 결정하고 일제히 갑판위로 뛰어 올라 왔습니다. 백인들을 바다에 던지고, 모든 기물을 파괴했습니다. 선장실에 침입하여 나침반까지 부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유로움에 기뻐 뛰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나침반이 없는 그 배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인생 항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의 나침반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지혜나 지식, 경험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거부한다면 그의 삶은 나침반 없는 배와 같을 것입니다.

선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반면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신앙은 자유이지만 영생은 불신자의 자유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선택의 열매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사람의 자유이지만, 축복은 내 마음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바른 선택의 열매입니다.

기도를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응답의 기적은 사람의 자유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굻고 간구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선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결과에는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중요합니다. 생명과 사망, 저주와 축복이 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면 하셨습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여 섬기라.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부종하라. 하셨습니다.

이 복된 하나님의 권면이 우리들의 마음과 삶 속에 깊이 심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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