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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자유적 선택 (롬 9: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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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살다보면 본국에서 살 때보다도 훨씬 더 애국자가 됩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미국에서 집회를 했는데, 야구 때문에 이민 100년 역사에 교포들이 그렇게 좋아한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 살면서 미국 꺾은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다. 누구까지 흥분했느냐? 우리 원로 목사님까지 흥분하셔서 야구장에 가셨습니다. 5만장 티켓 모두 매진됐는데 어떻게 구하셨는지 “나는 가야 된다!” 하셔서 가시고 저는 비행기 탈 시간 때문에 할 수 없이 못보고 왔는데 오늘 12시에 또 한다지요? 어쨌든 우리 한국이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위상이 높아질 때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하고, 또 지금은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선교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로 되어진 것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많이 당하셨다고 판단되는 기간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지내자고 정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하나님의 종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공의성에 대해 많은 질문과 갈등을 가졌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일찍이 구약 성경 가운데 예레미야와 하나님과의 대화에 나타난 것을 바울이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말씀인데, 하나님과 나의 관계 이해를 통해 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야 하는지 사순절 의미의 발견을 오늘 말씀에서 하고자 합니다. 바벨론 제국에 잡혀간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벨론 제국은 본래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우상숭배의 나라요 이 나라의 느브갓네살이란 왕은 폭군 중에 폭군으로 소문이 나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귀적 바벨론은 제국을 이루고 또 하나님을 모르는 애굽은 역시 전쟁 없는 번영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이 선택하신 우리 민족은 왜 바벨론 제국의 식민지 포로가 되어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갈등으로 예레미야가 질문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설사 죄가 있다한들 바벨론 사람이나 애굽사람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의 별명은 울보입니다. 고상하게 말해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눈물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성에 대한 회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게 슬퍼서 울었고, 다른 하나는 그토록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백성들이 냉담하게 말을 듣지 않는데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그의 눈에서 끝없는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시는 말씀이 예레미야 18장에 나오는데, 바로 오늘 로마서의 말씀인 토기장이의 비유로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토기장이 비유에는 하나님의 고유 자유권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자유권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받은 백성이란 택자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렇게 예수를 믿게 되고 장차 영생을 약속받은 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선택권의 자유가 있음이 성경에 그리고 예수께서 증거하셨습니다.

바울 선생의 말씀 에베소서 1장 4절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렇게 말을 하고 그 뜻은 비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선택의 철학을 우리가 우리 실생활에서 한번 비유해보면, 여러분이 기업을 운영한다고 합시다. 기업 발전에 필요한 일꾼을 선택할 때 선택의 권한은 기업주가 가집니다. 대통령이 정치를 하기 위해서 국무위원을 선택할 때 그것을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고유 권한 임명자에게 항의할 권한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여보쇼! 나를 임명할 것이지 왜 나만도 못한 그 사람을 그런 자리에 임명하시오?” 한다든지 채용되지 아니한 사람이 기업주에게 불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신학은 수없이 비판을 받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아무 상관없이 성경이 대립하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선택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쁘신 뜻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아니한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성이란 그 은혜 안에 있는 자는 공정하게 판단되고 은혜 속에 있지 아니할 때는 불공정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불평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의 불평입니다. 작은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환영하는 아버지의 처사가 못마땅해서 큰 아들이 불평을 했습니다. 그 불평의 근거는 아버지의 불공정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충실하게 받든 나는 잔치 한번 해준 일이 없는데, 책망을 받아야 할 작은 아들은 잔치를 베풀었나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불공정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너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찌 그런 불평을 하느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세대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 세대는 하나님 자녀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고 있는가라고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은 적어도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일생을 통해서 수백 번, 수천 번 전도하는 말을 합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많은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고 노력해서 정성스럽게 전도 프로그램을 열심히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 가운데서 전도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좀 민망스럽게 전도하는 분도 많습니다. 지하철이라든가 거리에서, 시장에서 바쁜데 막 전도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할 만큼의 많은 전도의 분량을 요즘에는 하고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셨을 겁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면서 천국으로 행진해 가는데 그토록 초대를 해도 오지 않던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지옥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잔칫집 비유를 보면,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손님을 청하였습니다. 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대고 잔칫집은 텅 비어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도다.” 기독교의 택자 구원설은 얼마든지 열어놓은 이 구원의 문을 피하여 간 자들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놓고 정리한 신학적 말입니다.

또 하나의 불평의 사건을 보면,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을 품꾼으로 데리고 올 때 그 당시의 하루 노동 삯을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줄 테니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놀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생긴 것을 기뻐하면서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11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각각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일의 분량을 따진다면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했고 일한 사람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다고 그랬습니다. 일을 적게 한 노동자들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주인의 불공정을 원망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했고 우리는 하루 종일이 더위와 노동력을 지불했는데 어찌 똑같이 주시나이까?”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내가 잘못한 것이 없노라. 본래 너와 나와의 약속은 하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느냐? 내가 그대로 실행했노라. 그러면 무엇이 공의에서 벗어난 일이냐? 일을 적게 한 사람들은 이 정도의 돈을 가지고 들어가야 오늘 저녁 가족들과 함께 기쁜 저녁 식사를 할 것 같아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자비를 베풀었노라. 내가 이렇게 선한 일을 했는데 어찌 네가 나를 악하게 보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자유요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악하게 된 우리 문화의 기준에만 의존하여 사건을 보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의 자유와 선택은 인간을 기준을 초월해서 주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토기장이의 그릇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예쁜 장식용 그릇을 제게 선물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그릇 만드는 사람의 고유 권한은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거룩하게 사용되는 성전 기구들도 만들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그것이 만들고 싶으면 만드는 것입니다. 임금님 밥상에 오르는 존귀한 그릇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꽃병, 반찬 그릇, 장독대, 항아리 등 얼마든지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고유 권한입니다. 어떤 때는 매우 지저분한 일을 하는 그릇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옛날의 화장실은 모두 그릇에 그것을 받아내지 않았습니까? 그 그릇은 그런 일만 계속 하다가 삭아 없어지고 맙니다. 토기장이 마음의 선택이 그 그릇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유대 히브리 민족을 택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보다도 더 좋은 민족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그 민족을 택한 민족으로 선택하셨는가? 이런 말을 우리들이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은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던지 아니면, 정몽주나 성삼문 같은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셨다면 그분들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이랬을 것 아닙니까? 아무렴 가룟 유다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한국 사람들이 만약 택한 백성이 되었다면 유대 민족보다는 훨씬 훌륭했던 점이 많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 배반하는 일을 떡 먹듯이 한 것이 성경의 역사로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섰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저런 지독스러운 종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단 말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니라. 나의 깊은 뜻대로 이렇게 했느니라.” 이것이 성경의 답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늘 바울 선생의 토기장이 비유는 로마서 8장에 언급한 양자에 대한 교회의 후속 조치가 있게 됩니다.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상식적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양자란 본래 그 집 자녀가 아닙니다. 중간에 그 집 아들이 되는 제도를 말합니다. 양자가 되는 사람은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일단 양자로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면 그 집의 아들과 똑같은 권리와 자격을 가집니다. 만약에 그 집에 재산이 많다면 모든 상속권이 양자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면 무슨 심사를 해야 합니까? 시험을 치른다든지 신체검사를 한다든지 기한을 정한다든지 그런 것을 합니까? 그런 복잡한 수속 절차가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한가지면 됩니다. 양자할 부모가 될 사람이 허락하면 끝납니다. 어떤 때는 고아원 같은 곳에 가서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올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될 사람이 가서 여러 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내가 이 아이를 내 아들로 데려다 키우겠소.” 하면 그것으로 수속은 끝납니다. 양자란 본래 일방적 결정입니다. 그때 그 아이가 지혜가 있든 없든, 신체적 결함이 있는 없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가 될 사람이 정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면 행운이 주어집니다. 그때 만약 거기 있는 다른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여보쇼! 그 얘보다는 내가 더 나을 것입니다. 왜 나를 안 데려가십니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의 내용은 하나님도 그러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의 선택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자격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정이 중요할 뿐입니다. 어떤 때는 목사가 꽤나 귀찮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온 세상 사람을 다 선택할 것이지 왜 부분적 선택을 하시는 것입니까?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가고 싶은데 하나님의 선택 바깥에 있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대답합니다. “당신은 왜 하나님의 선택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 특권 안에 있다고 내가 고백하는 믿음에 의해 구원이 주어지는 진리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온 세상 백성을 다 선택하셨는지 부분적 선택을 하셨는지 모르고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 바깥에 있는 사람인지 안에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택 바깥에, 아니면 그 안에 있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고민은 당신의 몫입니다.”

보통 양자를 데리고 갈 때는 형편이 좋은 집에서 조금은 불행한 처지의 사람을 데려가는 제도입니다. 옛날에는 모두 그런 문화로 양자를 들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양자의 제도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소 불행스러운 환경에서 별안간 좋은 집으로 양자가 되어온 사람은 큰 행운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그 집의 모든 권리를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별안간 먹는 음식의 내용이 달라졌고, 입고 다니는 옷이 좋아졌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격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그의 과거가 깡패였든 마귀의 종이었든 도깨비 소굴에서 살았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 속에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제부터 과거의 집과는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새로운 집의 법도와 관습을 쫓아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을 오늘부터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어머니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양자된 자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하나님을 이제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옛 가정의 의무에서 벗어나서 새 가정의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만약 양자로 온 사람이 좋은 것을 누리다가 그 집이 어려워지고 망하였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 양자는 “아, 이제 별 볼일 없어졌으니 나는 파양하고 옛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그 집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 집이 영광스러워지면 나도 그 영광에 참예하고, 그 집이 고난스러워지면 나도 함께 고난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유에 의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권 안에 들어온 양자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제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 집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운명적 삶이 결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다닐 때 영광스러운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떡을 나눠주면서 돋보이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스라엘 군중집회가 열릴 때마다 그들은 제자로서 예수님 주변에서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큰 출세의 빛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생기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볼일은 끝났다.’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도망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자의 삶이 무엇이냐? 고난이 왔다고 했을 때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부터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 내가 가는 길을 너희들도 올 수 있느냐?” 사순절이란 무엇인가?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마음의 결정을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갖는 기간입니다. 주님이 고난스러워지면 나도 고난을 당해야 되고, 주님이 영광을 얻으실 때 나도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 선택받은 자의 삶의 기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그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정하신 하나님의 고유적 선택 권한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크신 우주적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관심 속에 들어있었다는 큰 조물주의 사랑에 대해 무한한 감격의 마음을 열어 “주님! 주님이 당하실 수 있는 어떤 고난도 제가 당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각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의 결정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오직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선택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은혜의 백성이 된 그 기쁨을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순절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은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영광만 취하고 고난은 피하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도 동참하는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 기간을 매우 거룩하게 주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아버지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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