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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3) (사 49:6,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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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땅끝을 바라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고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마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땅끝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 복음이 전해졌고 우리 조선에까지 복음이 전해졌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토마스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땅끝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고귀하고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토마스 선교사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조선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셀라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 조선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깊이 참여한 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1885년 4월 5일 아펜셀라 선교사 부부와 함께 인천항에 착륙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였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도 1882년에 조미 수호 통상조약의 결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결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오묘하고 신기하게 흐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떻게 조선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조선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조선 선교 행전’의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합니다.

  첫째, 미국 동부에 살던 청년 언더우드가 조선에 가기로 선교에 헌신을 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부모 아래서 자란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뉴우브런스위크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가서 선교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선교하던 알버트 올트만스 박사가 1883년에 신학교에 와서 선교 지망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조선은 지난 해인 1882년에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나라에 선교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구 1천 3백만이나 되는 이 나라는 아직 방치된 상태에 있습니다. 미국 교회는 이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 때 언더우드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인도에 가고 누군가가 조선에 가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는 동안 아무도 조선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인도에 가려고 신학과 함께 의학 공부도 1년 동안 했는데, 나는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스스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언더우드에게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왜 너는 못 가느냐? 왜 너는 못 가느냐?” 결국 언더우드는 인도에 가는 대신 조선에 가서 선교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언더우드가 25살 되던 1884년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는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부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습니다. 조선 선교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조선 선교에 대한 예산도 없었습니다.

  실의에 차 있던 언더우드에게 뉴욕의 어느 한 교회로부터 목회를 해 달라는 초빙이 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많이 망설이다가 그 교회의 초빙을 수락하는 편지를 써서 우체통으로 부치러 갔습니다. 우체통에 그 편지를 막 집어 넣으려는 순간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조선에 갈 사람은 없느냐? 조선은 어찌할 터이냐?’ 그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언더우드의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나는 이렇게 머뭇거리다가 결국 뉴욕 한 교회의 초빙을 수락하는 편지를 쓰고 말았다. 편지를 봉하고 막 우체통에 집어 넣으려는 찰라 ‘조선에 갈 사람은 없느냐? (No one for Korea?) 조선은 어찌할 터이냐? (How about Korea?)’ 라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에 쥐었던 편지를 도루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조선에 가는 노력을 다시 하기로 작정하고 센터 스트리트 23번지에 있는 장로교 본부를 향해서 또 한 번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안면이 있던 총무는 외출하여 없고 초면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엘린우두 박사였다. 그는 자기도 조선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 며칠 후에 기별을 받았는데 다음 본부 회의 때에는 내가 임명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언더우드가 쓴 글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때 왜 조선에 가려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조선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 본부는 종래의 관망 정책을 적극 정책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선교부 이사 한 사람이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 선교를 위해서 1천 불을 보내왔습니다. 결국 장로교 선교부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임명을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1884년 11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5일 아펜셀라 부부와 함께 인천항에 착륙했습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아펜셀라보다 한 살 아래인 26살이었습니다.

  둘째, 언더우드는 조선 학생들에게 신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하자 조선 선교의 ‘세례 요한’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렌 의사를 만나 그에게서 많은 조언을 들으며 많은 지도를 받았습니다. 알렌 의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선교사의 신분을 드러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습니다. 선교를 위한 준비 작업부터 하여야 한다고 타 일렀습니다. 언더우드는 알렌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언더우드는 알렌 의사의 제의에 따라 알렌 의사가 세운 광혜원에서 조선 학생들에게 의학과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후일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전에 인도에 선교하러 가기 위해서 공부했던 의학이 조선에 와서 이렇게 요긴하게 쓰여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언더우드는 학생들에게 서양의 학문들을 가르치면서 간접적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더우드가 국왕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감이 불길하여 언더우드가 알렌과 함께 입궐하여 고종 앞에 부복하자 고종은 엄하게 다그치며 물었습니다. “언더우드 교수! 그대는 우리 나라에 어떤 사명을 띠고 왔는지 말해 보시오.” 언더우드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알렌이 대신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 그것은 신 알렌이 이미 말씀 드린 줄 아옵니다.” 사실 알렌은 언더우드가 잠시 일본에 머무는 동안 입국에 관한 문의를 해 왔을 때 고종에게 품의를 해서 윤허를 얻은 일이 있었습니다. 알렌은 고종에게 조선에 가장 요긴한 것은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며 의학 물리학 화학 등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일인데 언더우드란 마땅한 사람이 있으니 입국을 허락해 달라고 품의를 했고 그래서 고종이 윤허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하! 언더우드 교수는 조선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건 과인이 잘 알고 있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 본래의 사명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야소교를 전하는 것이요? 과인은 야소교의 선교를 허락한 기억이 없소. 야소교는 우리 국법으로 금하는 종교인데 한양 한 복판에서 야소교를 전한다는 것은 국법을 도외시하는 오만 불손한 행동이 아니오? 과인이 이 보고를 받고 금부에 명하여 모조리 체포하려 했으나 알렌 참판이 이 나라에 끼친 공이 크기에 자중하고 오늘 이처럼 불러들인 것이오” “황은이 망극할 뿐이옵니다.” 알렌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때 언더우드가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 사실은 소인이 야소교를 전한 것이 아니고, 1882년에 맺은 조미통상조약에 따라서 외국인 거주지에서 본인의 신앙 생활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 언더우드는 인천에 상륙 한지 2달 후인 1885년 6얼 28일 주일 저녁에 정동에 있는 알렌의 집에서 알렌 부부를 비롯한 여섯 명이 함께 모여서 감격적인 첫 예배를 눈물로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조선인에게 야소교를 전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이제는 알렌이 입을 열었습니다. "전하! 그것은 언더우드 교수의 신앙 생활을 보고 백성들이 와전한 것입니다. 굽어 살피소서!” “음! 그렇게 되었나…?” 고종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언더우드와 알렌은 일단 위기를 벗어나 어전에서 물러났습니다. 선교 초기에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셋째, 언더우드는 고아들을 가르치는 일과 노방 전도와 연희대학교를 세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광혜원에서 조선 학생들에게 신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동시에 거리를 떠 돌아다니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아펜셀라가 한 일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1886년 봄에 자기 집에서 고아원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예수학당이라고 부르는 고아원 학당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886년 같은 해에 아펜셀라는 배제학당을, 언더우드는 예수학당을, 그리고 스크랜턴 선교사는 이화학당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학당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의 신학문의 시작이었습니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예수학당에 처음에는 10여명이 모였는데 곧 20여명이 모였고 다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언더우드는 고아 아이들에게 예수 정신과 근로 정신을 길러주었고 영어와 간단한 기술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학당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의 돌봄과 가르침을 받은 고아들 중에는 후에 이 나라의 큰 지도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부주석이고 입법의원의 의장 등을 역임한 김규식도 있었습니다. 김규식은 6살 때 중한 병에 걸려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는데 언더우드가 그를 광혜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해 주었고 예수학당에 입학시켜 다른 고아들과 함께 교육을 시켰습니다. 예수학당 출신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도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 개신교 교육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다음 본격적인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에는 14명의 신자들을 모아놓고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새문안교회가 되었습니다. 아직 공중 집회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나무 밑이나 시장이나 약수터 등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찾아가서 조용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1889년 3월에는 조선에 여의사로 와 있던 릴리어스 호오튼 양과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이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신혼 여행을 의료 봉사와 전도 여행으로 대치했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 곳곳을 찾아 다니며 의료 봉사와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백수 십 명에 이르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서 문답을 한 후 합격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조선 안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912년부터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와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분 서주하며 52,000불을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15년 3월 5일 경성 YMCA 방 한 칸을 빌려서 60명 학생들을 모아놓고 대학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연희전문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동안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면서도 연희전문학교 설립을 위해서 모든 정력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이때 미국 LA에 거주하는 어느 독지가가 25,000불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지금 연세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연희동의 땅 30만평의 대지를 구입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좀 돈 사람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의 인재들을 양육하기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연희동의 30만평 땅을 매입하기로 결정을 해 놓고 더 이상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의사의 강력한 권유로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조선에서 사역 한지 31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유명하다는 병원들을 찾아 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1916년 10월 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미국 뉴저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57세 되던 해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죽어가면서도 조선을 걱정했고 연희전문학교를 걱정했습니다. "여보, 내가 기력을 회복해야 거기 갈텐데." “거기라니요? 조선 말씀이에요?" "물론 조선이지요." "조선을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지금까지 기도해왔는데 모든 뜻이 이루어져서 하늘 나라에 가면 환하게 연희동에 완공된 캠퍼스를 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비록 내가 조선은 못 가지만 하늘 나라에서 다 볼 수 있지, 맞아." 그는 마지막까지 조선을 사랑하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브루클린에 있는 누이 집으로 옮겨져 라파엘장로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장례식을 집례하는 목사는 언더우드에 대해서 회고하면서 그가 조선을 자기의 고향으로 알고 살아왔고 그의 마음이나 생각은 조선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큰 슬픔에 싸였습니다. 새문안 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의 신도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슬퍼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오순절」(Korean Pentecost) 이란 유명한 책을 저술한 윌리암 블래어 선교사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언더우드 선교사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보고 놀랐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에 대해서 그리고 조선에 대한 그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을 끝까지 사랑하던 사랑의 사도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늘에서 그가 모든 사랑을 쏟아 부어 세웠던 연세대학교와 조선 땅을 아니 대한민국 땅을 내려다 보고 있을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장로교를 세운 창시자였고 조선 개신교 교육의 개척자였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 박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교육 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치다가 조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손자 원일한 박사도 조선에서 태어나 평생 교육 사역에 헌신하다가 조선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1999년 5월 20일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이송되어 지금 양화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가의 삼대는 모두 조선 땅에서 살다가 조선 땅에서 죽었는데 그들의 시신이 지금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부인 릴리어스 호오튼과 함께 묻혀 있고 그들의 자녀손들이 모두 함께 묻혀있습니다.

  지금 450여 명의 선교사들의 시신이 양화진에 묻혀있는데 이들을 향한 작가 정연희 씨의 시 한 편이 안내판 곁에 적혀 있습니다. 그 시를 읽어드립니다. “양화진, 영혼의 고향, 하늘 나라로 가는 길목. 백 년 전에 이 땅을 예수께서 지적하신 땅끝으로 믿고 아비의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그 생애를 기꺼이 바치고 주 안에서 잠든 곳. 가난과 질병과 무지와 억압 속에서 신음하던 이 땅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고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질병을 함께 지고 가다가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그 육신을 묻은 언덕. 강물은 세월의 매듭을 풀어 끝없이 흐르는데 이 땅의 역사와 개화의 진통은 뭇 형제의 목숨을 이 언덕에 심었으니 그 사랑의 텃밭에서 열매 맺은 믿음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 사랑의 승리어라”

  흑암의 땅끝에 살던 우리 조선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 듣게 된 데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땅끝을 찾아와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과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은 오묘하고 신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의 한 생애를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길고도 깊은 영향을 미치는 진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허무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일 제가 새가족 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인 김혜원 이승일 부부와 그의 자녀들이 좀 어려운 곳에 가서 좀 어려운 사역을 하다가 일찍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행복한 삶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깊이 참여하는 고귀한 삶을 살수 있기를 소원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저 자신을 향한 간절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한 마디를 읽으므로 조선에 복음이 전해진 이야기를 모두 마무리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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