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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이란 무엇인가?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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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복음(福音)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을 번역한 것입니다.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가스펠(gospel) 또는 ‘the Good News’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이요 복된 소식일까요?

이 주제를 다루려면 먼저, 인류가 처한 비참한 운명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인류는 다양한 인종과 수많은 족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이든 간에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피부색갈이 다르다고 슬퍼할 때 기뻐하고, 기뻐할 때 슬퍼하는 법이 없습니다. 인종이 다르고 말이 달라도 생각하고 느끼는 바가 같습니다. 이는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태어났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류가 한 사람 아담에게서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맨 나중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다 말씀으로 창조하셨으나,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손수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해 하와를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상함도 없고 해됨도 없는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대화를 나누셨으며,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보시면서 즐거워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아니더라도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지고 아담과 계약을 맺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는 선악의 구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피조물인 아담에게 이 영역을 넘보지 말라고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계약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의 타락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하루는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말에 하와는 귀가 솔깃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마음에 욕심을 품고 그 나무를 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하와는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더니 그도 먹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이 기뻤는데 이제는 두려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이 가로 막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죄는 범죄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단절시키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가리켜 영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아담에게 임한 형벌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는 벌을 받았고,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판결을 받아 죽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아담의 범죄는 그 혼자의 문제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죄가 온 인류에게 동일한 영향을 끼쳐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함께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무슨 복잡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테러, 폭력과 살인, 거짓과 불의, 미움과 분쟁 등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수천, 수만 명이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이해타산만 따집니다. 법을 공정히 지켜야 할 정치가와 법조인이 부정한 돈을 받고 불의를 눈감아 주니 사회가 점점 더 불의해져 갑니다. 재화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갖고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부자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모든 사람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날 때부터 타락한 본성을 타고 납니다. 본성은 감출 수 없습니다.

혹 “나는 지금까지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인간들은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인간들은 스스로 죽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죽을 운명에 처한 인간들을 위해 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와를 꾄 뱀을 저주하시면서 이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뱀은 마귀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마귀를 멸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왜 메시야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메시야는 아담의 죄성과 상관없는 무죄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대속할 수 없으므로 메시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들었을 때 아담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하신 이사야 9장 2절 말씀과 같이, 절망 가운데서 다시 살 소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이 약속을 원 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날 이후로, 아담은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에 대한 신앙은 아담에게서 그의 후손들에게 대물림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메시야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첫아들 가인은 메시야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아벨은 메시야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 역시 메시야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홍수 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도 메시야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 신앙을 비웃다가 홍수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짓 메시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홍수 후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니므롯이라는 영걸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이끌고 시날 평지로 가서 거대한 성과 대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창 9:7)고 명하셨는데, 니므롯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바벨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살려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대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 니므롯은 거짓 메시야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무산되었고, 인류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모여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니므롯 외에도 바벨론이나 이집트나 로마와 같은 제국의 제왕들 가운데는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면서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와 꿈을 갖게 했던 자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거짓 메시야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종교를 빙자해서 자칭 메시야 노릇을 한 자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일종의 거짓 메시야 운동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뒤집어 놓은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과 유물론에 근거한 메시야 운동입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김일성은 인민을 해방시킨 메시야로 숭상 받았습니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 역시 독일인들에게 메시야 노릇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어느 드라마에 보면,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합니다. 미륵은 불교의  메시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메시야를 자처하던 자들은 하나같이 지상 낙원을 건설한다는 미명 아래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수많은 인민을 죽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서 언급한 거짓 메시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사실은 성경이 증거합니다. 성도님들도 아시는 대로, 성경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한 것이고, 신약성경은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책입니다. 이는 성경의 핵심이 복음인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가하면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신구약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하심으로써 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7장 12절 이하에 보면,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는데, 모친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혼인하였으므로 요셉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므로 실질적인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5절에 보니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소경을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질병은 의술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메시야만이 행하실 수 있는 기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놀라운 기적만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대할 때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과연 메시야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성품은 짐짓 꾸민 것이 아니라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실 때 저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아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바쁘게 일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가를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거저 주셨습니다.

자칭 메시야들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십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가 누은 침상을 달아내렸을 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이르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중풍병자가 즉시 일어나 걸어 나갔습니다.

또 한번은 사람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에게 묻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자 저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한 사람씩 물러갔습니다.

저들이 다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두려워 떠는 여자에게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그러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똑같이 죄인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들에게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여 상종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도 멀리하지 않으시고 저들에게도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셔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비난하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는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죄인들의 대속물로 희생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십자가 처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진해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장)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53장에 예언한 대로,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의 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처럼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라고 예언한 대로,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의인 되었습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데 무슨 자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홍 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정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사람이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받는 사람보다는 배척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 53:1) 탄식했던 이사야처럼 너무나 많은 사람이 복음에 귀를 막고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있습니다. 저들에게는 복음이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마귀에게 종 되었던 자를 해방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며, 죄책에서 자유케 하며, 세상 욕심을 따라 살던 사람을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복음의 내용을 알았으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자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된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복음을 믿게 하신 결과입니다. 복음을 소유했다면 물질이나 명예가 없어도 마음 쓸 것이 없습니다. 이는 복음보다 더 귀한 보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이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십시오.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웃 사람들에게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지런히 전할 때 복음의 능력이 듣는 사람들의 속에서 역사하여 저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복음의 증인 된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능력이 힘차게 역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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