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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이는 자와 살리는 자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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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초반의 한 부인이 건강 진단 결과, 암 선고를 받았다. 암 말기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행한 소식을 들었다. 그분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의사는 그분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하나는 고통스럽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조금이나마 이 땅에서 더 오래 생존하는 것이요, 하나는 너무 늦었으니, 집에서 편안히 요양하면서, 죽음을 대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무엇을 선택해야 최선일까 기도하다가,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감동적인 편지 1통을 썼다. “엄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단다. 엄마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에, 더 이상 이 땅의 삶에 미련이 없다. 그렇지만 엄마는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선택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너희들 때문이란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너희가 엄마를 필요로 할 때, 그곳에 있어 주기 위해서다.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말 너희가 필요했던 시간에, 엄마가 너희 곁에 있음을 기억하도록, 이 질병과 싸우기로 결심했단다”

  이 분은 자기 자녀들에게 축복을 남겨 주기 위해, 고통스런 삶의 연장을 선택하였다. 이 땅에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살기 위해, 이웃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선택을 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4절에는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님께서 질문하시자, 잠잠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1. 생명을 죽이는 자들(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모의를 시작했다.

  바리새인들은 중간시대에 이스라엘이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 그들의 자랑스런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하시딤’이라는 경건한 자들의 후예였는데,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들로 변화되었다.

  우리들도 잘못된 생각과 의식 구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웃들을 죽이는 살인자의 행렬에 가담할 수 있다. 본문은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살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자랑스런 전통을 지닌 자들이, 죽이는 자가 되었을까요?

(1) 마음의 완악함 때문이다(5).

“저희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완악하다(πώρωσις)는 말은, 돌과 같이 되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자기 외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웃들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 우리 사회가 이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된 이유는,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한 철저한 이기주의 때문이다.

  어떤 청년이 은혜를 받고 나니까, 자신만을 위해서 늘 기도한다는 게 송구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 이제부터는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제는, 제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부모님에게 훌륭한 사위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좋은 사위감을 허락하여 주세요. 또 제 여동생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제 여동생에게, 좋은 형부를 만나면 얼마나 기쁨이 되겠습니까?”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공동체이다. 서로 돌봐주고 서로 세워주는 교회,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교회, 이런 교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다. 우리의 몸집이 커졌는데, 그 안에 진정한 가족의식이 없다면, 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공룡체다.

  교회는 나 홀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 나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면 조용한 방에서 혼자 기도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길을 걸어가다가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도를 만나기 위해서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모임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곳에 함께 임재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성도가 성도를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다.

  현대인은 좋은 환경 속에 살면서도, 마냥 공허해 하는 이유가, 바로 소속감의 결여, 공동체 경험의 부족에서 온다. 저희들이 어릴 때 자란 동네에는, 나름대로의 공동체가 존재했다. 한 가정의 문제는 마을 전체의 문제였고, 한 사람의 기쁨은 마을 전체의 경사였다.

  제가 어렸을 땐, 아이들이 모여서 축구도 하며, 구슬치기도 하며 하루종일 어울려 살았다. 거기엔 왕따도 없었고, 빈부의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요즘아이들은, 저마다 홀로 TV앞에서,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도 모자라 귀에는 이어폰까지 꼽고, 귀를 막고 혼자 산다.

  철저히 혼자 사는 세상이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한 때를 살고 있다. 우리 자녀들에게 회복하고 물려주어야 할 교회의 유산이 있다면, 아름다운 공동체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일이다. 오늘 교회의 지상과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마냥 커지는 공룡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신다.

(2) 종교적 독단주의의 위험

그들을 살인자로 내몰았던 또 하나의 원인은, 독단적 신앙구조라고 할 수 있다. 독단적 신앙구조는, 내가 어떤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면,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경험한 신앙체험을 절대화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함을 말한다. 나에게 편리하고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어야 만족함을 말한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2가지 독단적인 오류를 범했다. 금식과 안식일에 대한 생각이었다.

① 참된 금식(막2:18).

세리 마태가 구원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우리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과 제자들은 먹고만 있습니까”하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다.

  제자들만 먹는 게 아니꼬웠는지, 금식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 금식은 필요하며 좋은 전통이다. 굶어보면 먹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또한 먹지 않고 시간을 아껴서, 기도에 깊이 몰두해 보는 일도 필요하지만, 금식에 대한 자신의 선호를 절대화시켜, 이웃들을 정죄하면 문제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속죄일에 금식을 했다. 물론 비상 사태가 벌어질 때도 금식을 했지만, 종교 규례상 금식은 일년에 한번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년에 한번만 해서 되겠느냐? 한 달에 한번은 해야지’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니야, 그것 가지고 되겠는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해야지…”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심지어, 일주일에 두 번까지 금식하면서 스스로 경건한 척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니까 그렇게 하지 않기에,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2:19)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금식을 부인하지 않았다. 금식은 좋고 필요하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에는 저희들도 금식할 것이다. 그러나 죄인 마태가 회개하고 돌아와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지금은 즐겁게 잔치를 벌어야 할 시간이 아니냐고 하셨다.

② 안식일의 정신(막2:23).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었다. 그러면 좇아와서 “아이고 그 동안 너무 시장하셨던 모양이네요?”하면서 대접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한다는 말은, 안식일에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일을, 왜 하느냐고 하였다.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셨는가? 안식일의 핵심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보다, 하나님께서 안식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종교의식을 절대화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안식일을 안 지킨다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다니자, 예수님께서 2:27-28절에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안식일을 너희에게 주었는데, 너희를 위해서 주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함이 아니라, 바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39가지 규례로 만들고, 거기다가 각 계명마다 세칙을 6개씩 만들어, 234개로 만들었다. 우리 유익을 위해 주셨는데, 많은 규례를 만들어, 스스로 얽매였으니, 축복이 아니라, 부담이 되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첫째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을 통해 무거운 짐을 지움으로써 죽였다. 그들의 날카롭고 부정적인 언어를 통해, 사람들을 찌르고 죽였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독단주의에 빠지게 되면, 이웃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기 쉽다.

  저는 새벽 기도가 좋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 성도들이 모두 다 새벽기도에 참석하면 좋겠다. 철야 기도회에도 참석하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정죄하면, 제가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다.  새벽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 교인이냐고 말한다면, 내 신앙으로 남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 빠졌다고, 주일 성수도 안 하는 당신이 무슨 집사냐고 다그치지 말고, 집사님 어디 아프세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하고 안부를 물으면 얼마나 좋은가? 우리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가시 돋친 말을 해서, 상처받고 죽어 가는 이들이 많다. 언어를 조심해야 한다.

  오죽하면 시편 기자가 “하나님!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라고 기도했겠는가? 잠언을 보면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했다. 지혜롭고, 선하고, 아름답고, 세워주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말 대신에,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음을 기억하라!

(3) 편파적인 행동은 사람을 죽인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죄인, 세리들과 함께 먹느냐고 비난했다. 노골적으로 헐뜯지 않아도 사람을 무시함으로써 죽일 수가 있다. 무시하는 말, 눈빛, 말투, 태도,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다.

  옆 사람을 흘겨보지 말고, 사랑의 눈길로 봐 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무시하면, 그들은 죽어나간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독사 같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았던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

  저마다 내가 중심이 되고 있다. 사랑이 그리워진다. 신앙생활의 적은 고독이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전쟁터에서 혼자 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실패하게 된다. 나 혼자 살아가면, 예배만 드리고 혼자 살아가면, 승리할 것처럼 보이지만, 나도 모르게 속물이 된다.

  썩을 세상 줄만 붙들고 살아가는, 못난 미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여서 서로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공동체가 연습이 안되어, 갈등을 느낀다. 문제를 일으킨다. 문제를 극복할 줄 모른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받고, 너는 나에게 상처를 받아서 흩어져간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마지막 날에, 교회 문을 열고 보았더니, 절반은 얼어죽고 절반은 찔려 죽었다. 독불장군 신앙, 상처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적인 교회, 공동체의 교회를 이루지 못하면, 얼어죽고 찔려죽고 만다.

  서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찔러서 상처를 내지 않는, 따뜻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때에 이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세상을 정복하는 교회가 되고, 이 교회를 통하여 사탄의 견고한 진은 파괴되며, 이 도시를 정복하게 된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2.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생명을 살리는 분의 대표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서자마자, 예배드리는 자들 가운데 손 마른 사람이 있음을 보셨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심정과 특유의 자비로 보셨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석수장이였다고 한다. 돌을 깎아 일하는 사람의 손이 마르면,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직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폐인이니, 얼마나 깊은 좌절과 낙망 속에 빠져 있었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보셨다. 바리새인들도 그를 보았다.

  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를 고치나 안 고치나에 관심을 가졌다. 이 불쌍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태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세상의 의식구조와 율법주의적인 의식구조를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한다. 이는 복음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에게 생명이 되고, 복음이 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2가지가 필요하다. 사람들을 중요시 여기고,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진지하게 모색하는 2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 특히 약한 사람들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어떤 구약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구약의 하나님은 편애하신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요? 구약을 가만히 보니, 하나님은 특별히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편애하신다. 우리는 약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무시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도 내 자녀도 약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리를 도우셨는가? 세리의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세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를 인격적으로 상대해 줄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소외된 세리의 인생에 찾아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잔치 자리에 앉으셨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사회에 큰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다. 그러나 세리를 공개적으로 상대해 주셨다. 그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손 마른 사람에게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나요? 손을 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손을 회복시켜 주셨다(5).

  여기서 단지, 손만 회복되었을까요? 좌절과 낙심 속에 미래를 포기했던 이 사람은, 손이 치유됨과 동시에 인생에 대한 자존감과 희망이 회복되었고 믿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돕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주님은 안식일을 범한 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가셨다.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살렸던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이웃을 행해 나아가고 있나요? 묻겠다.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죽이는 자인가? 살리는 자인가?

  결론입니다. 중학교 1학년생을 가르치는 어느 크리스천 선생님 반에, 아주 우수한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와서,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반항아가 되더니, 급기야 불량학생이 되었다. 왕따가 되었고, 선생님도 문제아로 취급했다. 나중에는 학교 수업도 거부하였다.

  선생님은 분명히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학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보다가, 그의 부모가 별거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도한 후에, 어느 날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부모들은 이미 따로 살고 있었다. 아들 성적 문제로 좀 의논하고 싶으니, 학교와 와 달라고 했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 양쪽 부모를 모셨다. 와서 보고는 서로 깜짝 놀랐다. 자기 혼자 부른 줄 알았는데, 아내가 와 있고, 남편이 와 있으니, 아주 불쾌해서 선생님께 좋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선생님은 아들이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으려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불렀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충격적으로, 이 학생의 시험 답안지를 보여 드렸다. 그 학생이 답안지에 답은 하나도 쓰지 않고, 반항적으로 낙서를 했다. 그런데 휘갈겨 쓴 낙서 맨 마지막 부분에, 이 학생 마음 속에 있는 진실을 선생님께 보였다. 선생님은 거기에다 빨간 줄을 그어 놓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 아빠, 나 누구하고 살아요? 이혼하면 누구하고 사느냐구요? 엄마 아빠, 난 둘 다 필요해요, 엄마 아빠, 우리를 사랑해 주세요” 이것을 보여 주는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엄마도 고개를 떨구었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은 “두 분이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데,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같이 기도해요, 선생님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하여, 그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깨어졌던 가정이 회복되었다. 부부는 다시 합쳤고, 아이는 회복되었다.

  우리 생애에서 이웃을 살리는 축복,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는가? 저와 여러분은 살리는 자인가요? 죽이는 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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