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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7)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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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입니다. 세 번째 간구까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와 뜻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을 위한 첫 번째 간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간구 또한 편하게 드릴 수 있는 간구는 아닙니다. 이 기도를 드리기에 우리는 너무 가진 게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라는 뜻은 잘못하면 ‘요즘’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한 날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개역개정판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꼭 필요한 하루분의 양식을 말합니다. 다시 번역하면 “오늘 하루 우리에게 필요한 하루분의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쌓아두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기도가 마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는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옵소서’하는 절제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이 기도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본문은 출애굽 당시의 만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광야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한 먹 거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아침마다 이슬처럼 내리는 작고 둥근 서리 같은 것으로 희고 꿀 섞은 과자 같은 맛을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딱 하루 분량치만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출16:17-18)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었더니 냄새가 나고 벌레가 나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꺼번에 만나를 주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매일의 만나를 주심으로 하나님은 세 가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는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 먹을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노력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서 했던 일은 바가지만 들고 가서 만나를 퍼오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일은 없지만 이 사건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생명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곡식의 씨앗과 땅이라는 환경을 만든 분이 누구십니까? 적절한 때에 햇빛과 비를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각종 지혜와 재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시장이라는 시스템을 만드신 것도 우리의 노력은 아닙니다. 우리가 배불리 먹기까지는 우리 노력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수고와 사회라는 제도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만나 사건을 통해서 우리로 먹는 것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 이 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하는 기도는 이런 우리의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식사 기도만 제대로 해도 우리 신앙은 깊어질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매일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일의 만나로 먹이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우리는 떡에 매여 살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물질의 논리에 굴복하기 쉬운 것이 우리들입니다. 먹는 문제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분명히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문제는 물질을 얻는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에게 절해야 풍요로울 수 있으며, 비록 노예처럼 살지만 애굽에 살 때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자본주의 논리를 좇아 서로 속이고, 남과 악착같이 경쟁해서 이기고 딛고 올라가야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의 방식을 좇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가 풍요로울 수 있음을 만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물질의 방식을 좇아 살면 더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 삶이 여유가 없고 각박해집니다. 결국은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을 끊임없이 탐하거나, 없으며 불안해하고, 있으면 교만해지고 맙니다. 물질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편에서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라”(시2:8)고 약속하십니다. “온유한 자, 주의 복을 받은 자, 의인이 땅을 차지한다”(시37:11,22,29)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사는 자,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자, 말씀의 원리대로 기업이나 일을 운영하는 자, 충성된 청지기처럼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이처럼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자가 누구신지를 생각하게 하고 그분의 뜻을 좇아서 살고자 하는 결단을 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는 일용할 양식으로만 만족하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너무 많이 쌓아두는 데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필요한데 자꾸 쌓아둡니다. 세상은 먹을 것이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가 쌓아두기 때문에 실상 다른 사람은 굶주리게 됩니다. 부와 양식의 축적의 더 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는 삶을 산다는 점입니다. 곡간에 곡식이 가득하면 안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물질의존적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물질로 평가하며 삶의 행복의 기준이 물질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지향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하나님과의 교제나 이웃과의 교제에 더 힘쓰는 관계 지향적 삶을 살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단순성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물질에 있어서 소박한 삶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2002)에 나왔던 책 중에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전세계 인구 63억 명을 100명의 마을로 축소했을 때의 경제적, 문화적 상태를 비교한 것입니다. 그 중 부와 관련된 부분을 읽으며 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20명은 영양실조요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15명은 비만입니다.
80명은 적정수준 이하의 주거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부 가운데 6명이 59%를 가졌습니다.
74명이 나머지 39%를 차지하고
나머지 겨우 2%를 20명이 나눠 가졌습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중 7명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겨우 단 한 명만 대학교육을 받았고
컴퓨터를 가진 사람은 2명입니다.
14명은 글도 읽지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 집에 살고 먹을 게 충분하고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거기다 컴퓨터까지 가지고 있다면 굉장한 엘리트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어 잠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의 사람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도 물질적으로는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오히려 옛날보다 더 각박해지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써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한 인생이 되시길 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의 물질에 대한 태도는 본받을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사도 바울은 가난할 때는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가난할 때 우리는 불평하며 남을 원망하거나 또는 비굴해 지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이때는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놀라운 시간입니다. 부요할 때는 또한 그 부에 감사합니다. 그 부를 이웃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합니다. 나에게 넘치도록 채워준 일용할 양식은 실상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던 릭 워렌 목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로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2천3백만 부가 팔렸고 한국에서만도 1백만 부 가까이 팔린 대현 베스트셀러입니다. 그가 담임하는 새들백교회는 미국에서 2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렇게 성공한 목회자를 모셔다가 제3의 부흥을 꿈꾸었지만, 저는 그의 성공보다 그 개인의 삶이 더 가치 있게 보여서 관심이 갔습니다. 릭 워렌은 물질에 대한 자기 삶의 원칙을 이렇게 설정하였다고 합니다.

“첫째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한다. 둘째 더 큰 집이나 새 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셋째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넷째 지난 25년 동안 교회가 자신에게 지불한 사례비를 모두 돌려준다. 다섯째 목회자 훈련을 위한 재단, P.E.A.C.E 사역을 위한 재단, 아프리카의 AIDS 퇴치를 위한 재단 등 세 가지 사역을 위해 재단을 세운다. 여섯째 자신이 벌어들이는 재정의 10분의 1만 가지고 생활 한다” 릭 워렌은 2004년도에만  1300만 불을 기부금으로 내었다고 합니다.

부유한 사람의 한 경우지만 우리 삶에서 어떻게 하면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살기 위해 나름대로의 원칙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자기 삶에서 소비 수준을 정하고 그 이상의 돈은 다 밖으로 내어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철저히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자기는 관리자라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언젠가는 요한 웨슬리의 집이 불이 났습니다. 그때 웨슬리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집이 붙타버렸구나. 나는 한 가지 책임을 덜었다”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이 ‘우리에게’라는 단어는 이 간구를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배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기도는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 내 이웃이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기까지는 우리 기도가 다 응답된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증언하는 초대교회는 일용할 양식을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4:34-35) 주기도문대로 살았던 초대교회는 많이 가진 자가 자기의 것을 내어 놓았고, 없는 자는 그것을 먹음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나눔의 정신만 회복한다면 세상에 굶주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2005년도 현재 세계 곡물생산량은 19억 9,989만 톤이고 소비량은 19억 8,186만 톤, 재고량은 3억 4,591만 톤으로 이론적으로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쌀이 남아돈다고 하여 버리며, 너무 살이 쪄서 다이어트 한다며 헬스장에서 비지땀을 을립니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아선상에 해매는 사람도 약 12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형제인 북한이 그렇습니다. 북한군의 평균 신장은 162cm, 체중은 48kg에 불과 합니다. 한국군은 이에 비해 약 10cm 더 크고 몸무게도 15kg 이상 차이가 납니다. 북한 어린 아이들은 약 40%가 발육부진 상태입니다. 북한은 항상적으로 식량이 부족합니다. 곡류를 비롯한 식량이 최소권장량으로는 100만 톤 표준권장량으로는 200만 톤이 모자랍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쌀이 남아돌아가고 있습니다. 쌀 재고량만 100만 톤 가까이 됩니다. 지금 북한은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고 남한은 일용할 양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남북한의 이념문제를 떠나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할까요? 주님께서는 주기도문의 이 네 번째 간구를 통해 우리가 부지런히 이웃을 살피도록 요청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꾸지 않고 꾸어줄 수 있는 인생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 영광일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예화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어느 곳을 가나 복음 설교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지겨워진 청중들이 하나씩 떠났습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다음 주에는 부자에 대한 설교를 하겠다고 공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앞에서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첫째, 여러분 되는 대로 많이 벌어서 큰 부자 되십시오.” 그러자 청중들이 ‘아멘’ 합니다. “둘째,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자 교인들이 웨슬레의 설교가 달라졌다고 하며 여기저기서 ‘아멘 아멘’ 합니다. 이 때 웨슬레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더합니다. “셋째, 그 돈을 다 남을 위해서 쓰십시오.” 하니 성도들이 다 도망가더랍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을 먹여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복의 근원되는 인생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벌고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쓰십시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 나오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모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일용할 양식의 은혜를 곧잘 체험하는 사람들은 아마 선교사님들이나 복음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분들입니다. 당장 하루 먹을 끼니가 부족하거나 또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재원이 부족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부족한 분량만큼 정확히 채워주시는 은혜입니다.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죠지 뮬러는 수천명의 고아들을 길렀지만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채워주셨습니다. 이런 유사한 사례는 20세기 성녀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인도인들을 먹일 때도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어린이들을 포함해서 7천 명의 사람을 먹여야 하는 데 식량이 바닥이 났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각 9시가 되자 빵 바구니들이 여기저기서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빵은 학교 급식용 빵이었습니다. 정부에서 갑자기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바람에 빵이 남았고 이 빵을 어떻게 할 수 없어 수도원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가 응답되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저축해 놓고 있으며, 모든 인간적인 계획이 완벽히 준비된 가운데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광야라는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은 실상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합니다.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맛보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작은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먹이는 더 큰 인생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런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이종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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