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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고전 13:4; 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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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자랑과 교만은 아주 가까운 사촌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둘 다 자기가 삶의 무대 중심에 서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자기자랑은 자신의 이미지 강화에 목적이 있다면 교만은 힘과 권력 장악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교만 역시 자기자랑 못지 않게 인간의 심성 깊은 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입니다. 교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남보다 탁월하다는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우월감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한 구체적 행동들입니다.

교만엔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 안에 있는 강력한 열망의 표현이지만 교만은 우리의 삶을 매우 불행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암을 자각하지 못하듯이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답답한 것은 그 딜레마를 발견한 다음에도 우리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실로 교만은 최고의 명의에게 치료받아야할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아가페 사랑엔 바로 그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만의 정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사랑이 어떻게 교만의 질병을 치료해주는지 배울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1. 교만의 정체

교만은 건강한 자존감과는 구별됩니다. 건강한 자존감이란 자기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여 받아들이고 진솔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필요이상으로 폄하하거나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할 때도 평정심을 잃거나, 상처받거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소위 자존심과 구별됩니다. 자존심은 다른 사람이 나를 내가 생각하는 바보다 낮게 평가할 때 상처를 입고 분개심을 느끼기 때문에 공격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교만과 구별되지만 자존심은 교만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감은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해 피조물을 창조하시면서 모두에게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7번이나 피조물을 바라보시곤 좋다며 흐뭇해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모든 만물을 바라보시면서는 심히 좋다고 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우리 자신과 서로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선한 작품으로서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존재의 가치에 있어서 인간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은 타락하면서 건강한 자존감을 잃고 대신 자존심 즉 교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은 그 과정을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게 보여줍니다.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본회퍼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와 '하나님처럼 된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란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과 닮게 창조된 피조물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 사실로 인해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뱀의 형태로 찾아와 최초의 인간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된 존재'로 살아가라고 꼬드겼습니다. '선악과만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피조물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된다. 선과 악을 스스로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고 속삭였습니다.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영역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전혀 의존할 필요가 없는 독립적인 존재 그러니까 스스로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하와에 이어 아담도 이 유혹에 넘어갑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풀리려는 것이 교만의 가장 근원적 출발점입니다. '교만하다'라는 동사(fusiovw: 휘시오)의 원 뜻을 살펴보면 '부풀리다, 불어넣다, 부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근원적 교만의 비극은 인간이 하나님인양 폼은 잡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하나님은 될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에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 쳇바퀴를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다람쥐와 아주 흡사합니다. 인간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드디어 하나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유혹과 착각에 늘 빠집니다. 최근 인간복제의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인간의 마음은 다시 한번 한껏 부풀어오르고 있습니다. 아니면 니체가 그랬듯이 인간의 결정적 한계들을 정면으로 대면하여 영웅적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철학적으로나마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초인 즉 하나님이 되보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지성, 깊은 감성 그리고 영웅적 의지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자리로 전진해봅니다. 그러나 결국 제자리 즉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고 맙니다.

그래서 근원적 교만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공허와 불안의 노예로 만듭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큰 소리는 쳤는데 여전히 인간이니 공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자기가 조만간 힘없는 인간으로 드러날 것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풀린 인간은 그 공허와 불안을 감추기 위해 이제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를 구체적으로 부풀리기 시작합니다. 근원적 교만이 구체적 교만으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남보다 탁월하다는 확신 그리고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고 싶은 충동과 욕망에 사로잡혀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잘 밝힌 것처럼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입니다. 교만의 저변에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훌륭하다는 확신, 그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자리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논쟁거리가 무엇인지 잘 아시죠? '누가 더 크냐?'는 것입니다(눅 22:24). 아리따운 여성들이 사울의 용맹보다 다윗의 용맹을 더 칭송할 때, 사울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교만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다윗이 자신보다 더 탁월한 장군으로 인정받는 것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비록 일국의 왕이었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교만한 사람은 절대적 차원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상대적 결여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칭송과 인기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자신의 아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최고 절정에 이른 사람들이 종종 자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저런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이유는 인간의 교만과 치열한 경쟁심을 바탕으로 한 경제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 번 말씀드린 것처럼 적절한 경쟁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는 그 안에 경쟁을 무한대로 확장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FTA보다 한미 FTA가 더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지구상의 어떤 자본주의보다도 더 강력하게 경쟁과 승자독식, 효율의 극대화에 다른 중요한 가치를 종속시켜 왔습니다. 자본주의는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교만과 경쟁심을 끝없이 자극하여 결국 파국에 이르게 합니다.

교만과 끝없는 경쟁은 인간을 결국 적대적인 존재로 만들 수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나 외의 모든 사람을 잠재적 경쟁대상으로 둔갑시킵니다. 다른 사람과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 고독에 시달립니다. 교만한 사람은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다는 확신에 금이 가지 않도록 자기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호수에 품위 있게 떠 있는 백조 같을 때가 많지요. 물위에 유유자적 떠 있는 것 같은 데 사실은 물 속에서 발을 쉼 없이 움직이고 있지요. 자기 스스로를 망가트릴 정도로 지나치게 바쁜 사람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동기가 성실과 충성에 있는가 아니면 경쟁심인가?

교만의 교묘함은 스스로 인지하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교만은 좋은 일들을 가능하게 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탁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일에 자신의 눈이 멀어 그만 그 배후에 작용하고 있는 교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맹장염 치료를 받고 대장암을 얻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고 좋은 일을 할 때, 교만이 틈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만이 교묘한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교만은 쉽게 발견하고 아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은 무척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아주 흥미로운 자가진단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쓸데없이 내 일에 참견하거나 은인행세를 할 때 얼마만큼이나 싫은 마음이 드는가?' 싫은 마음이 강한 만큼, 꼭 그 만큼 나의 교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아, 정말 정확한 진단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모임에서 거물급 인사로 행세를 하는 것이 불쾌하고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바로 그 거물급 인사인데 라는 자기 확신에 상처가 갖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증명하고자하는 욕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교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아가페 사랑은 교만을 이기게 하는 능력

아가페 사랑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그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을 극복하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만이 사랑 앞에서 결정적으로 부서지는 경험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우리 겉을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은 죽여도 죽여도 마치 불사조인양 변형된 모양으로 다시 살아 돌아옵니다. 일생동안 교만과 싸울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 싸움의 첫 걸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깨닫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여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3절에 있는 것처럼 주님의 일을 할 때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교만에 대한 근본적 치료책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의 진수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는 인간을 도울 수도 살릴 수도 없으셨습니다. 그 간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갈등이 일어나는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도 부모가 부모의 모습을 고집스럽게 끝까지 고수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모는 아무리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평행선만 그을 뿐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접촉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그 권리를 자신이 꽉 거머쥐어야 할 바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버리고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습니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됨을 포기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양식을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연약한 인간과 종의 옷을 덫 입는 매우 불편한 존재양식을 택하셨습니다. 대통령이 어느 날 청와대를 떠나서 농촌에 들러 농부와 똑 같은 복장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논일을 한다고 대통령의 신분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우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종 된 인간의 모습을 입는다는 것은 그런 불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것일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를 살리려는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하셨기 때문입니다. 온 몸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유대교와 빌라도 법정은 예수님을 칼로 위협했습니다. 예수님은 칼의 폭력에 사랑의 죽음으로 대응하십니다. 자신을 마음대로 채찍질하고 조롱하고 장난질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박도록 기꺼이 내어 주십니다. 마치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온 몸으로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내심으로 죄인들이 용서받고 살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교만은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분명히 하셨고 하나님으로서의 당연한 자존감은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자존심은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한 종 의식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힘과 권력을 지키고 증명하기 위하여 남을 누르거나 군림하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기꺼이 짓밟히는 패배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교만을 치료합니까? 첫째, 그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교만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게 될 때, 교만이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서 툭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자신의 배속이 훤해지고 온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지겹도록 '누가 더 크냐'고 다퉜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을 깨닫고 덧입은 순간부터 비로소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세워주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을 힘차게 감당했습니다. 리더십도 나누어서 공동으로 발휘하였습니다. 선교의 주도권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실라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때에도 바울을 축복하였습니다.

둘째, 주님의 아가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게 함으로 교만을 이겨나가게 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의 본질적 특징은 무조건 남을 나보다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죄악된 인간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셨습니다. 인간을 섬겨야할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섬기는 종의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하여 바울은 아가페 사랑에 근거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3). 이것은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리는 습관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한 우리는 도저히 서로 남을 낫게 여길 수 없습니다. 비교하다보면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우열이 가려지는 부분들이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심지어는 제도적 교회마저 끊임없이 비교를 강요합니다. 서열을 매기고 그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그에 따라 신분과 대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런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아가페 사랑의 삶을 출발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에겐 굴종하게 되고 나보다 열등한 사람에게는 군림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은 모든 비교를 중단하라고 명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조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임을 인정하라고 단호히 명합니다. 나보다 훌륭한 근거와 이유를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또 비교하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자신과 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남을 자신보다 귀하여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에 익숙해지면 해질수록 자아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우리를 자아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가 남보다 훌륭하게 보여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아집착이라는 질병이 싹트게 됩니다. 비교에서 해방되는 만큼 자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이스는 겸손한 사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걸어 교만을 극복함으로 이런 사람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 바랍니다.
(박득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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