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500:50의 차이 (눅 7:36-50)

  • 잡초 잡초
  • 571
  • 0

첨부 1


500:50의 차이(눅7:36-50)

하루는 예수님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세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가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세인을 하면 무조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데 시몬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시에 시대적분위기로 보아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료 바인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인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런 바리새인도 있구나’ 하시면서 상당히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불청객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타났는데 이 여자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정작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바리새인 시몬인데 주인공은 엉뚱한 여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께 시기를 합니다. “당신이 만일 선지자라면 지금 발을 씻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을텐데 그냥 가만히 있는가?”하는 내용의 시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결국바리새인이 책망을 받고 죄 많은 여인이 칭찬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너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 너를 나를 대접한다고 했지만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때 한 친구가 ROTC 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혼자 시험보러 가기가 심심하니까 다른 친구를 꼬셔서 같이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앞장서 간 친구는 떨어지고 친구의 의리 때문에 할 수 없이 따라간 친구는 합격을 했습니다. 나중에 둘 다 군대를 갔는데 갔다가 휴가를 왔는데 한 친구는 장교가 돼서 오고 또 한 친구는 일등병계급장을 달고 왔습니다. 둘이 서로 계급장을 마주보고 웃는데 참 볼만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사는데 엉뚱한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경우입니다. 시몬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억울합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입니다. 손님을 초대했으니 신경도 많이 쓰였을 것이고 음식을 장만을 하느라 돈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오히려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중간에 끼어든 사람입니다. 공연히 밥먹는데 끼어들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칭찬을 받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도리어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이 벌여 논 잔치에 와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런 결론이 내려졌는지 그 과정을 살펴봅니다.

먼저 바리새인 시몬의 태도를 살펴봅니다.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은 비록 바리새인이긴 하지만 상당히 마음이 열린 사람이고 진리에 대한 욕구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청해서 말씀을 듣기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을 맞으면서 몇가지 결례를 범했습니다. 예수님께 실례를 했습니다. 당시의 랍비-선생님이라던가, 어떤 지혜있는 사람을 초청해서 말씀듣기를 원할 때 반드시 해야 할 3가지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발을 씻기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 샌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더욱이 파르텐 지역은 먼지가 많이 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잠시만 밖에 나갔다 와도 먼지가 묻어서 발이 더럽게 됩니다. 그래서 손님을 초대하면 반드시 발 씻을 물을 먼저 제공을 합니다. 지체가 높은 분이시면 주인이나 종들이 손님의 발을 직접 씻어 주고 주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면 발 씻을 물을 제공해서 직접 자기가 씻도록 합니다. 그리고 발을 다 씻은 다음에는 발의 피로가 풀리도록 시원한 물을 부어줍니다.

두 번째는 입마춤입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 풍속은 그랬습니다.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주인은 그 손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춥니다. 그 의미는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라고 하는 존경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좋은 향이 나는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부어 줍니다.
당시에는 옷 한 벌로 평생을 입었습니다. 더욱이 웬만한 사람은 낮에는 옷을 입고 다니고 밤에는 이불로 덮고 자니 빨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옷에서 냄새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머리에 좋은 냄새가 나는 향료를 부어서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일은 손님에게 당연히 행하여지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 모든 것을 생략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는커녕 발 씻을 물을 제공하지도 않았습니다. 존경의 표시로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가장 싼 감람류 한방울도 부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초대하기는 하였으나 손님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시몬은 예수님을 수많은 랍비, 유대인들 중에, 선생들 중에, 한사람정도로 생각을 했습니다. 시몬은 지금까지 많은 랍비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랍비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조금 색다른 말씀을 전하는 랍비에 불과 했습니다. 조금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시몬의 눈에 보기에 예수님은 자기 출세하는데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있어서 한번쯤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젊은 촌구석에 사는 갈릴리 청년 한사람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병든 사람을 고쳐주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낸다고도 하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한번 불러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긴 했지만 발 씻을 물도 주기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하였고 향료를 부어 주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시험하는 태도로 예수님을 맞이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이번에는 여인의 태도를 살펴봅니다.

먼지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를 살펴봅니다. 여기서 죄인인 한 여자, 죄인인 한 여자라고 했는데 당시에 남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면 세리를 말하는 것이고 여자를 가리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몸을 파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누군가라는 것에 논란이 많이 있지만 아마도 박달라 마리아였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박달라 마리아는 직업이 창녀이고 일곱 귀신이 달려 있던 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 동네에서는 박달라 마리아는 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불리면서 손가락질을 당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곁에 섰습니다. 본문 37절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어떻게 발 곁에서 있다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발 끝에 꿇어 앉아서..” 이러면 이해가 가지만 “발 곁에 서서”라는 말은 이상합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손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할때 똑 바로 앉아서먹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옆으로 누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로마제국에 관한 영화에서 한쪽손으로 머리는 고이고 한쪽손으로는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 곁에 서서”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어 계신 예수님의 머리쪽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발쪽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감히 주님을 마주 보지 못하고 뒤에서 다가서서 그분의 발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가지일을 행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첫째는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닦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머리를 풀어 해 칠때는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뿐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머리를 풀어 해 칠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 보면 옷을 벗고 다니는 것처럼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긴 머리는 여인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머리를 풀어서 주님의 발을 닦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자손심도, 자신의 영광도 다 내 버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발에 입을 맞춘 것입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발, 그 발에 입을 맞춘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더욱이 45절에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시몬에 집에 들어 올 때부터 발에 입 마추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한 사랑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낮아 질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는 발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본문37절에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라고 했는데 옥합이라고 하는 것은 옥으로 만들어서 그 속에 담은 작은 병입니다. 당시에 여자들은 이 옥합을 목에다 걸고 다녔는데 옥합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단 한번뿐입니다. 결혼을 할때 신랑에게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에 향유를 붓지 않고 왜? 발에 부었겠습니까?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에 왕이나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종들이 발을 씻겨 줍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비누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깨끗이 닦으려 해도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발에 향유를 부어 냄새를 제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왕이나 귀족들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최고로 높은 곳에 계신분으로 존경한다는 표시입니다.

우리 성도여러분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전혀 한 사건을 보고 다른 반응을 보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줬는데 도저히 갚은 길이 없음으로 둘 다 탕감해주었으니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 두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한사람은 500데나리온을 졌습니다. 한데리온은 건강한 장정이 하루 종일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500데나리온 하면 대충 여러분 2-3년치의 월급을 합한 액수와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50데나리온, 적게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인이 모두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빚이라는 것은 죄를 의미합니다.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고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은 작은 죄를 지은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 뒤를 보십시오. “갚은 것이 없음으로”라고 했습니다. “갚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죄를 지은 죄인이나, 작은 죄를 지은 죄인이나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법은 죄를 큰 죄와 작은 죄로 나눕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에 처하기도 하고 작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훈계를 하고 놓아 주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나, 작은 죄의 구분이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죄나 거짓말을 한 죄나 「50보 100보」입니다. 이 「50보 100보」라고 하는 말은 이런 기원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쪽 전세가 분리해지자 도망을 가는 병사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전세가 역전이 되어서 도망갔던 병사들이 돌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난중에 재판을 하는데 “누가 도망을 갔었느냐?” 라고 물으니까 어떤 사람은 50보를 도망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보를 도망갔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재판관이 “50보 100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재판관은 도망간 그 자체는 50보다 100보나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저나 여러분,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50보다 100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다 50보 100보입니다. 작은 죄인과 큰 죄인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죄인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영어로 편지를 쓰실 때 맨 마지막에 「Sincerely Yours!(씬시얼리 유어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다’는 말입니다. ‘이 편지는 사실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 이 “sincere(씬시어)”라고 하는 말은 땜질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대리석 조각품을 사다가 이 집안을 장식하는 것이 유명했는데 물건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그만 실수로 조각이 깨져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깨진부분을 땜질해서 감쪽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깨진부분이 탈색이 되고 떨어 나가게 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조각품을 배달할때는 '씬시어'라는 보증서를 넣었습니다. 「이 조각품은 절대로 땜질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조각된 작품이라도 자그마한 조각이 떨어 나간 순간 그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 죄를 지는 순간, 우리는 생명을 잃는 자가 됩니다. 영락없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그치면 모두 범한 것이 되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500데나리온을 빚진 자가 누구이며 50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누구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500데나리온을 빚진 자는 죄 많은 여인이고 50데나리온 빚진 자는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시몬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죄가 있다고 해도 그 여인에 비하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죄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50데나리온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구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눈여겨 볼 대상이었습니다. 조금 특별하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도 맞추지 않았고 향유도 부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죄 많은 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감히 주님앞에서 얼굴을 들고 설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500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저히 이 빚을 갚지 못한 것을 알고 이 빚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나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씻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 시몬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자기만큼 죄인이라고 생각한 여인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500데나리온과 50데나리온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지수입니다. 얼마나 큰 용서가 필요한가를 깨닫는 지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5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50데나리온만 탕감을 받을 것입니다. 그만큼 은혜를 적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나는 500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 “나는 남들보다 더 큰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을 한다면 여러분은 500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만큼 크신 사랑에 감격을 받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서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치에 서있습니까? 아니면 죄 많은 여인의 위치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은 500데나리온을 빚진 자이십니까? 아니면 50데나리온을 빚진 자이십니까? 이 시간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을 은혜의 크기를 보는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앞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구원의 감격으로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하고 성도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500데나리온, 50데나리온이라고 스스로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리켜 거룩한 백성,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니다. 이전에 거룩한 사랑, 성도들만이 가득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