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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사랑이 제일인가? (고전 12:29 -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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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사랑이 제일인가? 

(고전 12: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성령의 은사를 앞세우면서 불화와 분열을 일삼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초대 고린도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교회에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편지를 보냈는데 그게 고린도서입니다. 편지 말미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과연 ‘더욱 큰 은사’란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길’이란 무슨 길입니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드러납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사랑의 송가’, 소위 ‘사랑장’인 고전13장입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그러니까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런 유익도 없고 가치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랑 없이 은사만 가지고 일하다가 분열하고 파당을 일삼는 교회가 된 겁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예언의 능력’, ‘산을 옮길만한 믿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구제’, 이 얼마나 눈부시고 황홀한 은사들입니까? 이런 은사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고전13장, 사랑의 송가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결론을 내립니까?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이 3가지는 항상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다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입을 열 때마다 그토록 믿음을 강조하던 사도바울이 왜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보며 우리도 그 동안 사랑을 소홀히 있는데 사랑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사랑이 제일입니까?   

1.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듯이 사랑 또한 영원할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제일이지요.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지나갑니다. 육체에 속한 것들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버립니다(벧전 1:24).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이었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사랑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입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더욱 큰 은사’요, ‘가장 좋은 길’임을 아시고 실천하기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2.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영원한 것에 비하여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과 같은 은사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고전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믿음과 소망은 폐하여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사랑만은 계속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아니하며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또한 이 땅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또 불완전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전한 것이 이루어질 때는 다 없어집니다. 

(고전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그런 때라도 사랑만은 언제까지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옛날의 동판거울은 사람의 얼굴을 희미하게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되는 날이 오게 될 겁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때에도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되니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소망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소망도 폐하게 됩니다. 역시 사랑만이 남게 될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 때 무엇보다도 사랑을 중히 여겨야합니다. 천국에는 오직 사랑밖에 남게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천국에 가져 갈 것이 없습니다.

  어느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이유는 누구나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빈손으로 저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이유는 한 평생 취한 그 많은 것들 중 천국으로 가지고 갈만한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오직 영원히 남을 사랑을 위하여 힘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3. 사랑이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생명으로 들어간 자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것을 보아 성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안다는 겁니다. 형제사랑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아니지만, 천국 백성이 된 확실한 증거라는 겁니다.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아직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랑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당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아십시오. 당신은 형제사랑에 대하여 무관심합니까? 아직도 사망에 머물러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형제를 미워하십니까? 당신 안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아십시오.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하기 위해서도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이런 말씀을 들으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건데 왠 사랑을...’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만큼 확실한 믿음의 증거가 없습니다. 야고보서가 바로 사랑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랑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사랑 없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사랑을 행해야합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의 사랑’은 실천이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말과 혀로 만의 외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행함과 진실함’이 없는 ‘말과 혀’의 거짓된 사랑을 행하는 집단이 있는데 이단 사이비 집단입니다. 거의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진실한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아무리 믿음과 종말을 강조하여도 우리는 천국에서 그들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사랑으로 믿음을 보이십시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한 차원 더 나아가야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 주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 후에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후에는 죽기까지 주님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다같이) ‘주님, 사랑합니다.’ 

4.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사랑’이라고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는 헬라 사람들은 4가지 단어로 달리 표현합니다. 남녀간에 사랑, 소위 애정이라고 하는 사랑을 ‘에로스’라고 합니다. 에로물, 에로영화 등, 많이 들었지요. 
  그런가하면 ‘스톨게’라고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혈연적인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하는 자녀를 사랑하지요. 그게 ‘스톨게’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소위, 우정이라는 친구간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필로스’라고 말합니다. 남남이라도 ‘필로스’, 친구간에 사랑이 특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랑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고전13장의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C.S 루이스 교수는 우리의 신앙적 성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에 의해서 태어나고 스톨게에 의해서 양육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성간에 사랑(에로스)에 의하여 태어나고 혈연적인 사랑(스톨게)으로 양육되고 우정의 사랑(필로스)으로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실천하므로 완성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사랑의 수준에 있습니까? 아직도 에로스적인 사랑, 이성적 사랑에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오로지 끈질기게 혈통적인 스톨게 사랑만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정의 사랑, 필로스 정도에 매여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아가페의 사랑에 매여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야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손양원 목사님을 보십시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이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겁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사랑의 송가’를 부릅니다. 

1.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 울리는 징과 같네

(후렴)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2.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무례와 사심 품지 않으며
  모든 것 믿고 바라는 사랑 모든 것 덮어 주네

3.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신만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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