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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예배 자 (요 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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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예배 자(요4:19~26)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무사가 되기 위해서 활 쏘는 법을 배우려고 깊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소위 '도사'라는 사람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우게 되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도사가 활 쏘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저 만치 돌 위에 주먹정도 되는 감을 하나 올려놓고는 묻습니다. ‘저것이 지금 네 눈에는 얼마만 하게 보이느냐?’, ‘예! 티끌만 하게 보입니다.’, ‘그래 그러면 계속 보아라. 저것이 물동이만 하게 보일 때까지 보아라.’ 그래서 좌우간 6개월간을 쳐다보았답니다. ‘이제는 그 감이 물동이 만하게 보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래? 그러면 이제는 쏘아라.’고 말합니다.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정통으로 맞더랍니다.

과녁이 크게 보여야 화살이 정확하게 맞힐 수 있습니다. 목적이 크게 보여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목적 설정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결코 '방법의 문제'가 아닌 '목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 나왔지만 ‘무슨 목적으로 살았느냐?’ ‘무엇을 위하여 이것을 하느냐?’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24년 전에 '미스바교회를 세워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교회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목적이 살아 있는 교회가 곧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교단에서 시행하는 '평신도 주일'에 우리는 교회의??'프라이 오리티 넘버 원'은 성결교단의 창시자 정빈, 김상준씨와 같이 '전도'에 있고, '선교'에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이 문제보다 더 우선하는 것도, 더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 두 번째 목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 교회가 존재 하느냐고요?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날이요.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 정하신 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금도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3절 하반 절에 보면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악 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은 오직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본문말씀 가운데 보면, '예배'라는 말이 ' 놀랍게도 열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나의 삶에 있어서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선한 목자 비유에서 보여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이나 찾으시는 그런 분'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선한 목자이시기에 남아있는 양에게 소홀하신 분이 아닙니다. '잃은 양'과 더불어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있고, 미스바교회 뿐만 아니라 지상 모든 교회의 존재목적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 모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렸고, 교회 나오는 것이 하나의 이용하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야 아무개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큰 교회에 나가야 영업이 잘 된다고 나옵니다. 교회에 별 사람들을 다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추천서 써 달라.’고 교회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 강사자리 들어가려고 하는데 교회 추천서를 가져오라.'는 것이기에 이 일을 위해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이제 등록한지 몇 주나 되었다고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까? 내가 저를 안지 얼마나 되었다고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까? 더욱 맹랑한 것은 말입니다. 세례를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디다. 세례는 당신과 나와 둘이 앉아서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 기다리시오 했더니, 교회내의 아무개를 등에 업고 개인적인 부탁이 들어옵니다. '지금 당장에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지금 당장에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세례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온 목적이 엉뚱한 데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교회가 수단이 된다든지 예배가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예배를 드리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여기 들어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도 생각은 엉뚱한데 가서 방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도 생각은 벌써 다른데 가 있다.'고 하는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예배를 드리는 현대교인들의 형태를 몇 가지로 구분을 해 놓은 것을 보고 공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먼저는,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 파'(분명히 눈은 강단을 응시하는데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습니다),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 파'가 있습니다,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 파'가 있습니다, 수시로 시계만 들여다보는 '시간 절약 파'가 있고,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 파'가 있으며, 예배 후에 있을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 파'가 있고, 성경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어리석은 실속 파'가 있고,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예배 시간만 되면 몸을 움직이는 '근질 파'가 있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명상 파' 등등 여러 종류의 예배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부류의 모습은 모두는 유감스러운 예배 자들인 것입니다. 그 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그저 '시간 보내는 식'의 예배를 드려야 하니 참으로 복 받을 자리에서 거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의 중심이 주일이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의 꽃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는 인체에 비유하면 마치 심장과도 같습니다. 건강은 "심장만 튼튼하면 노 프로브럼입니다." 혈액순환만 잘 되면 문제는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님의 체온도 느낄 수가 있고, 여기서 예배드리면서 임마누엘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신앙은 문제는 없습니다. 즉 예배만 살아 있으면 신앙은 정말 문제없습니다.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자는 위로부터의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된 예배자란 어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의미합니까?


1. 예배의 대상을 올바로 알고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문제’였습니다.

장소가 '사마리아'이면 어떻고, '예루살렘'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예배의 대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도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느냐? 어떤 대상에게 예배하고 있느냐? 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를 알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예배의 중심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슨 얘긴가 보십시오. 21절에 보시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에도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시면서 세 번씩이나 때 문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이 예배할 때요, 바로 그 자리가 예배의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의 예배는 구약적인 개념과 의식으로 드린 것이요, 상징으로 드린 것이요, 그림자로 드린 것이요, 예표로 드린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을 만나 예배하는 이시간이야말로 참 예배요, 본질적인 예배요, 온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 함께 하시는 이 시간, 예수님이 영으로 함께 하시는 그 장소라면 '그리심산'이면 어떻고, '시온산'이면 어떻습니까?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닌 '대상이 문제'요, '중심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예배가 중요합니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종종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예배’라기보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 '프로그램이 중심'이 된 그런 예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들이 영광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소위 무슨 '박사학위 취득 축하예배'라든지, '부흥회장 당선 축하예배'라는 별 이상한 타이틀을 걸어 인간을 드러내는 예배를 보게 됩니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고 말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배가 타락을 한 것입니다. 예배가 세속화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1절에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은가? 다시 말하면 어떤 공간이 예배하는 것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미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하는 것이 중요한가? 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가?'를 바로 알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를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할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 유다 왕국이 예배하던 예루살렘도, 북 이스라엘 왕국이 모여 예배하던 산에서도 예배의 출발점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배의 출발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나오게 되었을 때 벌어졌던 어린양의 희생을 출발점으로 삼았듯이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이 예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히 예배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유명 교회에서 '성탄절 축하예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까번쩍한 옷차림에다 * 제목 : 복된 예배 자(요4:19~26)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무사가 되기 위해서 활 쏘는 법을 배우려고 깊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소위 도사라는 사람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우게 되었더랍니다. 그런데 그 도사가 활 쏘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저 만치 돌 위에 주먹정도 되는 감을 하나 올려놓고는 묻습니다. ‘저것이 지금 네 눈에는 얼마만 하게 보이느냐?’ ‘티끌만 하게 보입니다.’, ‘그래 그러면 계속 보아라. 저것이 물동이만 하게 보일 때까지 보아라.’ 좌우간 6개월간을 쳐다보았답니다. ‘이제는 그 감이 물동이 만하게 보입니다.’했더니, ‘그래? 그러면 이제는 쏘아라.’고 말합니다.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더니 정통으로 들 맞았습니다.

과녁이 크게 보여야 화살이 정확하게 맞힐 수 있습니다. 목적이 크게 보여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목적 설정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결코 '방법의 문제'가 아닌 '목적'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 나왔지만 ‘무슨 목적으로 살았느냐?’ ‘무엇을 위하여 이것을 하느냐?’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24년 전에 '미스바교회를 세워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교회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끌어 가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목적이 살아 있는 교회가 곧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교단에서 시행하는 '평신도 주일'에 우리는 교회의??'프라이 오리티 넘버 원'은 성결교단의 창시자 정빈, 김상준씨와 같이 '전도'에 있고, '선교'에 있음을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이 문제보다 더 우선하는 것도, 더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 두 번째 목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 교회가 존재 하느냐고요?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날이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 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금도 찾으시는 사람이 누구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3절 하반 절에 보면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악 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은 오직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짧은 본문말씀 가운데 보면, 그래서 '예배'라는 말이 '열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나의 삶에 있어서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이나 찾으시는 그런 분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남아있는 양에게 소홀하신 분이 아닙니다. '잃은 양'과 더불어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 있고, 미스바교회 뿐만 아니라 지상 모든 교회의 존재목적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 모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렸고, 교회 나오는 것이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야 아무개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교회에 별 사람들을 다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추천서 써 달라.’고 교회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대학 강사자리 들어가려고 하는데 교회 추천서를 가져오라.'는 것이기에 이 일을 위해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이제 등록한지 몇 주나 되었다고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까? 내가 저를 안지 얼마나 되었다고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까? 더욱 맹랑한 것은 말입니다. 세례를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디다. 세례는 당신과 나와 둘이 앉아서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 기다리시오 했더니, 교회내의 아무개를 등에 업고 개인적인 부탁이 들어옵니다. '지금 당장에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지금 당장에 직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세례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온 목적이 엉뚱한 데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교회가 수단이 된다든지 예배가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예배를 드리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여기 들어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도 생각은 엉뚱한데 가서 방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도 생각은 벌써 다른데 가 있다.'고 하는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예배를 드리는 현대교인들의 형태를 몇 가지로 구분을 해 놓은 것을 보고 공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먼저는,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 생각 파'(분명히 눈은 강단을 응시하는데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습니다),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 파'가 있습니다, 졸면서 예배드리는 '수면 파'가 있습니다, 수시로 시계만 들여다보는 '시간 절약 파'가 있고,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 파'가 있으며, 예배 후에 있을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 파'가 있고, 성경읽기로 시간을 보내는 '어리석은 실속 파'가 있고, 목욕을 하지 않았는지 예배 시간만 되면 몸을 움직이는 '근질 파'가 있고,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명상 파' 등등 여러 종류의 예배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부류의 모습은 모두는 유감스러운 예배 자들인 것입니다. 그 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그저 '시간 보내는 식'의 예배를 드려야 하니 참으로 복 받을 자리에서 거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주일의 중심이 주일이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일의 꽃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는 인체에 비유하면 마치 심장과도 같습니다. 건강은 "심장만 튼튼하면 노 프로브럼입니다." 혈액순환만 잘 되면 문제는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과 하나님의 체온도 느낄 수가 있고, 여기서 예배드리면서 임마누엘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신앙은 문제는 없습니다. 즉 예배만 살아 있으면 신앙은 정말 문제없습니다.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자는 위로부터의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찾으시는 복된 예배자란 어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의미합니까?


1. 예배의 대상을 알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장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문제’였습니다.

장소가 사마리아면 어떻고, 예루살렘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예배의 대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도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느냐? 어떤 대상에게 예배하고 있느냐? 는 심각한 질문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를 알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예배의 중심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무슨 얘긴가 보십시오. 21절에 보시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에도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하시면서 세 번씩이나 때 문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이 예배할 때요, 바로 그 자리가 예배의 장소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의 예배는 구약적인 개념과 의식으로 드린 것이요, 상징으로 드린 것이요, 그림자로 드린 것이요, 예표로 드린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을 만나 예배하는 이시간이야말로 참 예배요, 본질적인 예배요, 온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 함께 하시는 이 시간, 예수님이 영으로 함께 하시는 그 장소라면 '그리심산'이면 어떻고, '시온산'이면 어떻습니까? 예배의 장소가 문제가 아닌 '대상이 문제'요, '중심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예배가 중요합니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종종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예배’라기보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 '프로그램이 중심'이 된 그런 예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순전히 인간들이 영광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 소위 무슨 '박사학위 취득 축하예배'라든지, '부흥회장 당선 축하예배'라는 별 이상한 타이틀을 걸어 인간을 드러내는 예배를 보게 됩니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고 말았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배가 타락을 한 것입니다. 예배가 세속화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4:21)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를 어떤 장소에서 예배하는 것이 좋은가? 다시 말하면 어떤 공간이 예배하는 것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미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어디에서 하는 것이 중요한가? 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가? 를 바로 알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를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할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음의 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 유다 왕국이 예배하던 예루살렘도, 북 이스라엘 왕국이 모여 예배하던 산에서도 예배의 출발점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배의 출발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어 나오게 되었을 때 벌어졌던 어린양의 희생을 출발점으로 삼았듯이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이 예배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철저히 예배는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을 구원했다는 것을 확실히 해 두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배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유명 교회에서 '성탄절 축하예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까번쩍한 옷차림에다 반짝이 구두들을 신고 요란한 소리, 요란한 자태로 교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흑인'이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문간에서 안내를 보는 집사님에 의해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예배당 밖에서 울고 있는데, 앞에 한 낮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당신 누구요?” “나요? 나는 예수요.” “예? 아니 예수님께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하고 물었더니 하시는 말씀이??“나도 쫓겨났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보세요. 예수님을 내쫓고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때를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자신의 때'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중심이 된 예배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드리는 예배 자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찾으시고 계시는데 미스바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이 이 귀한 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신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목적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는 목적이 예배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 자체는 구원받은 바에 대한 감사요, 감격이요, 축제입니다. 축제로서, 기쁨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인데 언제까지 '의무감에 따라 수동적인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까?' 언제나 예배의 봄이 오려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언제나 생동감 넘치는 감사의 축제로서의 예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자세'나 '의미의 문제'입니다. '정성의 문제'입니다. 기왕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찾으시기에 합당한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찾으시기에 24절에도 보면,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신령”이라고 하는 말은 ‘엔 픈유마티’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In Spirit” 입니다.

"신령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위의 21절에 벌써 말한 "아버지께 예배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어떤 지방, 어떤 민족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신(神)이 아니십니다.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성령으로 거듭 난 자이면 그를 아버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거듭 난 자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 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벧전 1:23).

사람의 거듭 난 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하며, 읽기 좋아하며, 순종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렇게 그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자녀로서 영적인 아버지에게 예배하게 되는데, 그것이 신령한 예배입니다.

“신령한 예배는 어떠한 예배”입니까? 헬라어로 '푸뉴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으로,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 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그 아버지를 섬기고 영화롭게 할 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모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에 의해 인도되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 물질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결코 사람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이 아닌,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을 가지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비록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다듬어 지지 않은 목소리입니다마는 그 음성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최상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마는 저는 하나님 앞에 올라와서 기도할 때마다 이런 주제 넘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오늘도 사랑하는 성도들이 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종의 음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듣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고맙게도 이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을 주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도 용기를 얻게 만들고, 책임감을 한층 갖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여러분, 영은 살과 뼈가 없기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하십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형식적인 것에 너무 치우치지도 말 것입니다. 형식보다도 중요한 것은 알맹이입니다. 그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그렇다고 습관적으로 굳어진 예배를 드리지도 말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축제입니다. 구원받은 바에 대한 감사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저는 어느 날 이사야 1장을 읽다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저리를 치시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예배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그것을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사 많이 드린다고 아무리 왔다 갔다 해 봐야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마당만 밟을 뿐입니다. 그것이 제사일 수 없고, 예배일 수는 없습니다. 중심이 빠지고 정성이 빠진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종교적인 의식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받으시는 예배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것이 말입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저러 옴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는 백화점의 세일만도 못한 예배가 될 때가 많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무슨 얘긴지 아세요? 정성이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30분전에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성도가 별로 없습니다.

백화점세일 때만 되었다 하면 개장시간 한 시간 전부터 와서 입구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싸고 좋은 물건 먼저 사겠다고 말입니다. 세일기념품 먼저 받겠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마켓에 한우 소꼬리 사겠다고 새벽기도 시간에 벌써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물었더니 표를 먼저 받겠다는 것입니다. 표 순서대로만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놀랬습니다. 저들은 소 뼈다귀 하나 사겠다고 저런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좋은 물건 먼저 사겠다고 한시간전부터 벌써 와서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하면서도 어째 시간 하나 제대로 지키지를 못할까? 그 오랜 시간도 아닌 한 시간, 그것을 온전히 드리지 못할까? 그래??하나님의 존재가 백화점의 세일물건만도 못하단 말인가? 너무나 죄송스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삼상 2:30절은 말씀합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 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배에 대해서 정성문제에 있어서는 "불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보고 배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목사인 제가 놀랍니다. 토요일이면 목욕으로 준비합니다. 주일날 되면 시간 정확합니다. 보통 30분전이면 여지없이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습니다. 그것도 뒷 자석에 구경꾼 모양 앉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만년 지각파들 자리'입니다. 맨 앞좌석에 나와서 일찌감치 자리하고 앉습니다.

헌금하는 것을 보아도 감동을 받습니다. 벌써 금요일이면 은행에 가서 헌 돈을 빳빳한 새 돈으로 바꾸어서 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심지어 기도를 하든, 인사를 할 때에도 보면 합장을 합니다. 심지어 목사님을 부를 때에도 거저 부르지 아니합니다. “주지 목사님”입니다. 저는 그 분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을 이 강단에 세우는 것이 차라리 났겠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주제는 “우리도 이렇게 예배를 준비하며, 이런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말이 되지 않습니까?

저들과 우리의 예배드리는 자세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저들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정도입니다. 저들의 정성을 따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남달리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일주일을 사는 것입니다. 준비한 것만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상 2:3절에도 보면,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왕 드리는 예배요, 마음먹고 여기까지 나오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을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신령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자를 찾고 계십니다.


3.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배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진정"이란 것은, 예수님이 22절에 말씀하신 내용의 성취 형태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는 것"(22절 하반), 곧, 구약 적 계시가 신약 시대에 성취된 형태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에게서 난 구원 사건(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에 근거한 예배가 "진정"으로(진리로)예배함입니다. 그것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시리라는 약속의 성취를 내포한 구원사적(救援史的) 진리에 순종하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를 우리말로 하면 "진정이다, 진리다, 진심으로 드린다." 라는 뜻도 있고 이 말의 또 깊은 뜻은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진정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참된 예배는, 결코 사람들의 추측이나 깨달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 )를 의미하는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메시야 약속)이 성취된 사실, 곧,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습니다(고후 1:20).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신앙적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적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히 11:6에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진정”이란 말은 ‘엔 알렉세이아’이며, 영어로는 “In Truth”입니다. 즉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격 대 인격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진리의 반대는 거짓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섞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소위 ‘하얀 거짓말’이라는 포장으로 적당하게 살아 왔을지 모르나 여기서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나의 적나라한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릴 수 있어야 하고, 보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의사 앞에서 진찰을 받는 환자의 모습같이 말입니다. 숨김이 없어야 합니다. 더더구나 여기서는 위신도, 체면도, 체통도, 그 잘난 명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오나 여기 들어오실 때에는 저 교회 입구에서부터 세상적인 모든 신분과 계급장들 다 떼어 놓고 들어와야 합니다. 오직 여기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뿐입니다.??교회 안에서만은 아무개 예배자란 말만 필요할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배 자’라는 말은 전혀 들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들어 보지도 못했기에 사용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기껏 부른다고 하는 것이 ‘아무개 성도,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정도였습니다. ‘아무개 예배 자님’이라는 말은 듣지도 쓰지도 못했습니다. Worshiper는 본문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월쉽퍼'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이러한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자들을 찾으십니다.

히 11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중에 믿음의 선조 제 1호가 누구입니까? 아벨입니다. 아벨이 믿음의 선조 제1호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할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히11:4절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그랬습니다. 가인보다는 더 나은 제사, 가인보다 더 나은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예배를 드렸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계속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어떻게 나는 어제보다는 오늘 하나님 앞에 더 나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시간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은 예배자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너희 남자들은 매년 누구든지 다 내게로 나와서 가까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쉽게 절기를 지키지 말고 '내가 거하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성'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가정'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내게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이 멀리 가 있어서 옛날 같으면 마치 저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한 달 정도 랜 시간이 걸려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오려면, 남자들이 다 올라오면 성이 다 텅 비게 됩니다.

주변에는 부족들이 많이 있고 유목민들이 많이 있는데 남자들이 없으면 당장 습격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모든 걱정하지 말고 내게 나아와 예배를 드리므로 내가 성을 지켜서 보호하는 것을 너희는 돌아와서 아,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경험하면서 저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절기 속에서 나가서 은혜 받고 또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사무엘상 19장 1절에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말하였더니" 사울왕의 핍박을 피하여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가 있는 곳으로 삼상 19: 18절에 '라마<Ramah, 사무엘의 고향이며 그 무덤이 있는 곳이다(삼상7:17,25:1)> 나욧<Nain,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간곳이며 라마에 있던 사무엘 주소(삼상19:18).)'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순간 사울의 심복들이 세 번이나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었듯이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천군 천사를 통하여 여러분들의 주변과 두고 온 가정과 모든 기업을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 우리의 삶의 큰 은혜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이 하늘 문을 통해 열어주시는 영적인 이 은혜가 우리 인간의 삶을 항상 건강하게 하고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일어서서 찬송가 56장을 부르시면 상당한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 주의 전에 모여서 크신 축복 빕니다. 가장 복된 이날은 하늘 안식 표로다. 가장 복된 이날은 하늘 안식 표로다.
주의 공로 힘입어 은혜 주심 빌 때에 화목하게 하시고 죄를 벗겨 주소서. 세상 걱정 면하고 오늘 쉬게 하소서. 세상 걱정 면하고 오늘 쉬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러 왔으니 모임 중에 계시고 영광 나타내소서. 기쁜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서. 기쁜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서.
주의 기쁜 복음을 죄인 듣게 하시고 모든 믿는 사람을 위로하여 주소서. 주님 오실 때까지 이날 지키리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날 지키리로다. ♬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 있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축복의 초청인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잔치를 베풀어 놓고 임금이 만찬을 베풀어 놓고 우리를 부르시는 초청이 바로 이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제일 영광이 되는 일이며 우리 인간에게도 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이 예배에 나오는 것이 우리에게도 제일 영광스러운 일이요 제일 큰 목적을, 인간에 가장 우선하는 목적을,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화목해지고,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예배시간을 통해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의 백성과 그의 자녀 된 의무를 다 함으로 주어지는 큰 기쁨이 있고,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좋은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성품과 생활이 그를 닮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앞에 우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임무 가운데도 가장 큰 의무입니다. 이 귀한 예배의 승리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에 인정받고 복된 예배자로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자신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희들을 불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반열에 세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바라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임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성령의 역사와 진리가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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