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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이냐? (히 11:2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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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1: 신뢰함으로 시작하여

인도에서 근무하던 한 미군 장교가 지프차를 타고 가다가 전기선이 차 위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일순간에 차에는 수백볼트의 전기가 흐르게 되었고, 쇠붙이를 만지면 감전사를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선이 단선될 때 순간적으로 전기가 차단되어야 하지만 열악한 그곳 환경은 그런 시설까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섯 살짜리 아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아빠가 지금 너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어려움에 빠져있단다. 만약 네가 차의 어느 쇠붙이든지 만지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단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인데, 아빠가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들을 데려올 때까지 차 안에 있는 아무 것도 만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 가까스로 빠져 나온 아빠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달려가 두시간만에 구호반을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빠와 약속한대로 나는 아빠가 올 줄 알고 아무 것도 안 만지고 기다리고 있었어!"

무서울 수도 있었고, 불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빠를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서있는 이 아이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아빠를 이렇게 신뢰하던 아이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변합니다. 랜 앤더즈가 쓴 글 가운데 보면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4살 때, 아빠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5살 때, 아빠는 많은 걸 알고 계셨다. 6살 때, 아빠는 다른 애들의 아빠보다 똑똑하셨다. 8살 때, 아빠가 모든 걸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다. 10살 때, 아빠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14살 때, 아빠에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아빤 너무 구식이거든! 21살 때, 우리 아빠?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졌지. 25살 때, 아빠는 그것에 대해 약간 알기는 하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오랫동안 그 일에 경험을 쌓아오셨으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만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 달라집니다. "30살 때, 아마도 아버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좋을 듯하다. 아버진 경험이 많으시니까. 35살 때, 아버지에게 여쭙기 전에는 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 40살 때,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버진 그만큼 현명하고 세상 경험이 많으시다. 50살 때, 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계셔서 이 모든 걸 말씀드릴 수 있다면, 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가를 미처 알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다."

아빠를 하늘처럼 신뢰하던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빠에 대한 신뢰도가 변합니다. 이것은 아이만이 아니지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이나 신뢰감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오거나, 문제가 있거나, 답답한 일, 절망할 일이 덮쳐 오면 흔히 믿음을 내 팽개쳐 버리기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려지지 않으면 믿음을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Move2: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록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믿음의 산맥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그래서 믿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참 대단한 믿음의 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시대,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특징을 성경은 단 한단어로 표현해 줍니다. "믿음으로(by faith)..." 어떤 사람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힘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쟁 가운데 서 있기도 했고, 엄청난 박해 상황 가운데 서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본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자, 칼날, 전쟁, 죽은 자, 고문,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시험, 칼, 궁핍, 환난, 학대... 이것이 그들의 처한 환경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았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승리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입니까? 학문이 뛰어났기 때문입니까? 성경은 오직 한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환경이 좋아서, 모든 것이 잘 풀려서, 내가 원하는 대로 탄탄대로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상황은 어려웠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손을 들고 그렇게 외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들의 살았던 환경이 좋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누릴 수 있었던 풍족하고 윤택한 삶이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삶에는 위기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담대하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역사를 오늘 본문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33절 말씀부터 다시 읽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이룬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일구어가는 삶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기도 했으며,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했습니다. 악형에 처해지는 순간에도 구차히 면하려고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환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러한 위인들을 소개해 주시면서 그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능력 있게,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서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교회를 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을 믿음의 모델로 오고가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시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얼굴입니다. 자세히 보면 온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습니다. 온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만족스러우신 표정, 기뻐하시는 표정입니다. 그 얼굴에 서려있는 미소를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믿음의 영웅들일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미소! 만약 우리 일생에도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생은 실패한 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유명한 설교자였습니다. 20세기 중반 온 영국 교회가 시들어가고 있을 때 능력 있는 설교로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이루었던 사역자였습니다. 그의 설교 능력과 목회적 성취를 누군가 칭찬할 때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소 짓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모든 것은 허사입니다."

오늘 서있는 삶의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미소 지으실 수 있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무엇을 이루었느냐,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느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이 한가지로 평가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소!" 그들은 주님이 미소 지으실 만큼 그렇게 아름답게 섬겼습니다. 삶의 여건은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한 교회(데살로니가)를 향해 칭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

지금 어렵지만 주님을 사랑하기에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금 힘이 들고, 여건이 어렵지만 그들은 주저앉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언젠가 그 나라에서 이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기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이가 셋이면 마치 미개인 비슷하게 취급받고 셋째는 의료보험 혜택도 안주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저출산 국가가 되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후 최저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가임여성 1명당 출생아수는 1.19명으로 2.01명인 미국이나 1.88명인 프랑스 등 선진국보다 낮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했습니다. 육아 여건이 어렵고, 여성들이 직장에 진출하게 된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어느 교회에 "전도를 못하겠으면 아이라도 낳아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 아이 낳는 것이 쉬운 일이며, 아이를 키우는 일 쉽습니까? 수많은 대가와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일입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그런 대가와 희생을 치르고 싶지 않은 것 때문에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이겠지요. 현대 여성들에게 급속도로 번져 가는 질병의 하나가 '우울증'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렇지 많지 않지만 부유한 삶을 사는 선진국에서 많은 질병이지요. 우리나라에도 과거에는 그런 질병이 없었습니다. 제 어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못해도 8-10명을 낳아 키웠습니다. 밥상에 둘러앉혀 놓으면 반찬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밥상에도 못 앉고 남은 것 비빔밥으로, 부대찌게로 식사를 때워야 했습니다. 빨래는 얼마였으며, 뒤치다꺼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 종일 잠시 쉴 틈이 없습니다. 허리가 휘어집니다. 사랑의 수고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사랑의 수고로 허리가 휘는 곳에는 우울증이라는 질병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수고를 하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힘차게 믿음의 행진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간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관념이나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는 살아져야 하는 동사입니다(Faith is a verb).

Move3: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그분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야웨 말라크, YHWH Malak)는 말은 모든 성경에 나오는 선포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교회 생활의 가장 중심 되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설교자들의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다스리심에 대한 선포였지요.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통치"는 신학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것은 예배자의 고백의 핵심이며, 예배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유니온신학대학원의 구약학교수였던 제임스 메이(James May)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믿음의 공동체가 올렸던 찬양이요, 하나님께 올렸던 기도요, 선포했던 설교였던 시편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라고 말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모임과 선포의 가장 중심 되는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고백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성격을 가졌으며, 또한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선포의 특성을 가졌습니다. "야웨 말라크"는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인 이스라엘의 믿음의 원천이었으며, 모든 신앙의 표현과 형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믿고 그를 신뢰하면서 나아가는 삶입니다.

온 우주의 역사와 이 나라와 민족을 통치하시고, 오늘 나의 삶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앞에서 그렇게 고백하며 달려가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내 인생의 캄캄한 밤중에도, 내 인생이 꼬여가는 그곳에서도, 힘들고 답답한 순간에도 그들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Move4: 이제는 우리가 주자입니다

히 11장은 그렇게 살았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40절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결론은 12:1-2까지 연결됩니다. 그렇게 힘차게 달렸던 믿음의 영웅들은 그들의 믿음의 경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시대에 놀랍게 섬겼던 사람들,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위한 수고를 결코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경주를 마치고 이제 그들은 응원석에 앉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그 뒤를 이어 달렸던 수많은 무명의 선수들도 그들의 경주를 마치고 이제 응원석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그런 간증들을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참 힘들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끝까지 달릴 수 있었지요. 감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힘껏 달린 경주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쥐고 달렸던 바턴은 어느새 우리에게 쥐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게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경주로 감당했던 그들은 이제 바턴을 우리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앞서 달린 선수들은 너무 훌륭했습니다. 그들의 환경은 어렵고 열악했으나 그들은 너무나 놀랍게 달렸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한때 아름다웠던 교회가, 영광스럽게 달렸던 1세대가 은퇴하고 그다음 2세대가 바턴을 쥐면서 어려움과 혼동 가운데 있는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영광스러워야 할 교회가 사회의 지탄거리들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 복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중요합니다. 지금 바턴을 쥐고 달리고 있는 우리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2:1을 읽다보면 20년 훨씬 지난 군복무시절 연대 체육대회를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10월 국군의 날, 전방 예비사단이었던 저희 부대는 4개 대대가 대항하여 체육대회를 하고는 했습니다. 상금도 만만치 않습니다. 돼지 대여섯 마리가 하사품으로 주어지고 상금 또한 기백만 원이었습니다. 우승을 하면 사기도 충천하게 되지만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5월부터 준비에 돌입합니다. 대대 간부들이 한 종목씩 맡아서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그때 본부 중대장과 인사장교, 군수장교 보직을 겸하고 있던 저에게 주어졌던 종목은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했던 "계급별 릴레이" 종목이었습니다. 이등병부터 대대장 중령까지 각 계급의 선수들이 릴레이로 달리는 것이었는데, 가장 점수도 많고 그 해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종목 중의 하나였습니다.

좋은 선수를 선발해서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면서 강원도 산골짜기를 누비면서 훈련을 했습니다. 다른 대대의 정보도 수집하고, 선임하사를 서울로 보내 좋은 러닝화도 주문해 왔습니다. 파악된 정보에 의하면 특별한 변수만 없으면 그해 우승은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새로 부임한 2대대장이 육사 럭비 선수 출신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대가 가진 장점은 이등병과 일병 계급의 선수가 뛰어난 선수들이었고 사회에서 육상 선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시작하는 이병과 일병 계급 선수가 반 바퀴 차이만 만들어 주고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한다면 혹 대대장이 좀 못 달리더라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전략을 세웠습니다. 인사장교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반 바퀴이상만 유지해 주면 우승과 상관없이 10일 포상휴가는 내가 보장한다." 군수장교여서 맛있는 것도 많이 가져다가 먹였습니다. 그래봐야 건빵이었지만.

경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기대보다도 더 잘 달려 주었습니다. 처음 스타트부터 앞서기 시작해서 일병 계급이 끝났을 때는 전략대로 거의 반 바퀴 이상을 앞섰습니다. 모든 계급의 선수들이 죽기 살기로 달렸습니다. 저도 중위 대표로 출전해서 100m 정도를 달리고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소령 계급까지 그 정도가 유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자인 대대장에게 바턴이 넘어갔습니다. 염려했던 대로 2대대장은 잘 달렸습니다. 저희 대대장을 거의 따라 잡았습니다. 결승점을 불과 10여m 정도 남겨 둔 지점에 왔을 때, 잘 달리는 2대대장이 어디쯤 따라 붙었나 뒤를 돌아보며 달리다가 우리 대대장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얼굴도 심하게 다치고 무릎과 팔꿈치도 심하게 다쳤습니다.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속이 너무너무 상했습니다. 연병장 바닥에 고꾸라지면 얼굴을 땅에 갈아서 큰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도 가련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지막 주자의 한 번의 실수로 모든 사람의 수고가 일시에 허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두 열심히 달렸으나 그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달리는 모든 선수가 중요합니다. 모두 잘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턴을 받아 지금 달리고 있는 주자(走者)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응원석에서 달리고 있는 선수와 함께 뛰면서 응원을 보냅니다.

오늘 우리 모두도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는 경주, 그리고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주, 어려움과 환난이 덮쳐와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달려야 하는 경주에서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지금 바턴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수천 년 전 아브라함이 쥐고 달렸던 그 바턴, 야곱이 받아서 힘껏 쥐고 달렸던 그 바턴, 모세가 가지고 달렸던 그 바턴, 요셉이 받아 힘껏 쥐고 달렸던 그 바턴, 베드로가, 바울이, 엘리야가, 다니엘이 쥐고 달렸던 그 바턴을 지금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쥐고 달렸던 그 바턴을 지금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앞서간 많은 순교자들이 가지고 달렸던 그 바턴을, 이제 우리가 받아 쥐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혹한 신앙 박해의 시대를 살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자기 정체성(Identity)"이었습니다. 그 소중한 바턴을 우리가 물려받았다는 것, 이것은 감격이었습니다. 이것은 희열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백 번씩 다짐하고는 했습니다. "나도 잘 달려야지." 그러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은 박해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어제 남편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바턴을 쥐고 달리는 자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바턴이 넘어왔고, 이제 우리가 달릴 차례입니다. 다 달리고 나면 우리도 그것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Move5: Emergency!

축구 경기를 보다보면 갑자기 주전 선수가 넘어져서 심한 부상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경기장에는 긴장이 서립니다. 관중들은 안타까움의 신음을 토해 놓습니다. 어쩌면 이 경기에서 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상입니다. 그때 감독이 외칩니다. "야! 김운용이 네가 나가 뛰어! 네 포지션은 미드필더야. 잘 뛰어야 돼, 알았어!"

어느 학기 저희 학교 경건 교육처에도 그런 비상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오전 인도를 맡기로 하신 교수님 한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일 예배 인도를 못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몇 분의 교수님들을 섭외하다가 안 되어서 그럼 처장인 제가 인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날 오후 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부산에서 말씀을 전하러 오시기로 하신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셔서 내일 예배에 못 오신다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저녁까지 늦게까지 외부 강의 스케줄이 가득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야! 김운용이, 네가 나가!" 감독의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밤 10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서 거의 밤을 지새우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다음날 오전에도 모든 스케줄을 접고 그 일에 전념해야 했습니다.

세상이 어둡습니다. 세상이 악해집니다. 세상은 언제나 악했고,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의 비상은 계속됩니다. "야, 김운용이!" 그 소리를 크게 들어야 우리는 바로 달릴 수 있습니다. 나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저히 주전 선수 축에도 들 수 없는데 은혜로 세움 받은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상 호출을 듣고 우뚝 서서 힘차게 달렸던 믿음의 경주자가 있던 시대는 밝았습니다.

어느 날 성 프란시스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 강함과 지혜로움과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감격입니다. 쓰임 받음이, 일할 수 있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이, 감격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존재들입니다.

Move6: 너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이냐

지난 8월 저는 장신대 목회신학박사 과정에 있는 목사님들 30명을 인솔하여 미국에서 진행된 한 세미나를 위해 다녀왔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시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힘있게 사역하고,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과목이었습니다.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참석하고 한두 시간 가까이 그 교회의 목사님을 모시고 그 교회의 사역 전반에 대해 소개를 받고 질의응답을 하고 토론하는 형식의 수업이었습니다. 예배가 있는 금, 토, 주일, 그리고 수요일에는 주로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가 없는 날에는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주요 기독교 기관들을 방문했습니다. 그 중의 한곳이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어린이 구호 단체인 "Compassion International"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전쟁 때 한국 전쟁 고아를 돌보기 위해 시작되었던 단체인데, 전 세계 23개국의 수십만의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이지요. 투명한 경영으로도 유명하고, 그냥 돈만 보내서 하는 사역이 아니라 현지 교회와 연결하여 효과적으로 전인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한국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수백 교회를 통해 수만명의 한국의 고아들을 돌보았던 그 단체는 수혜국이었던 한국이 이제는 파트너 국가가 된 것도 너무 감사한데 30여명의 목사님들이 그 단체를 연구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 거기에서 저는 놀라운 한 이야기를 듣고 울었습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사역하던 에버렛 스완슨 목사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미군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방한했습니다. 종로 부근의 어느 숙소에서 잠을 자고 겨울날 아침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쓰레기 트럭에 쓰레기를 치우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청소부들이 던져 넣는 쓰레기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을 보고서 뛰어 나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방금 던진 쓰레기 가운데 어린 아이의 손을 보았다고 손짓 발짓하며 말을 전하는데 통하지 않아 직접 쓰레기 트럭에 올라가 아이의 시신을 찾으려고 하다가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트럭 안을 자세히 보니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동사(凍死)한 전쟁고아 어린이들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상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그가 미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사역이 "컴패션"(긍휼) 사역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수십만의 전쟁고아들이 살게 되었고, 삶을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1993년 철수하였지만 그들의 사역은 전 세계를 향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려고 노력하고, 말씀에 붙들려 살려고 노력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려고 노력하는 그곳에서 놀라운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서게 되니까 수많은 영혼들이 서게 되고, 한 나라가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음성은 오늘도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그 음성을 듣고 결단했던 사람이 있는 곳에서 가정이 살게 되고, 자녀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살게 되고 민족이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이제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김운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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