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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과 그리고 어두움 (요 1:4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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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받은 사도 요한은 로고스( )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빛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빛은 곧 로고스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연계시 가운데 경험하고 있는 빛이 예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능케 할 뿐입니다.
그러나 로고스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로고스는 어두움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다는 쉬운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영감 받은 사도 요한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고 헬라적 사유로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은 곧 이원론(dualism)적인 사고양식입니다.
이원론적 사고는 두 종류의 절대적 원리가 되는 근원을 가지고 해석하는 논리적 방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과 어두움입니다.

Ⅰ. 예수는 사람들의 빛입니다.

빛은 만물과의 관계에서는 생명체에 공급되는 무한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빛이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지고한 선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관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1)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빛입니다.
본문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바로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생이 곧 천국시민과 등식관계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에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2) 참 빛입니다.
본문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참 빛"(the true light)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 되신다는 말은 어두움의 세력 마귀와 싸우는 성도들의 진정한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 되신다는 말은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5절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3) 세상에 온 빛입니다.
본문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장 10절에는 "그가 세상에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영원 전부터 선재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병행해서 성육신 한 사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상에 왔다'는 말은 사탄의 권세가 창궐하는 타락한 이 땅에 약속대로 친히 오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4)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입니다.
본문 1장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각 사람에게"라는 말은 단체와 집단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적극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비취는 빛"이라는 말은 능동적으로 비췬다는 의미 외에 일방적이고도 강권적인 비췸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 개인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임하는 거부할 수 없는 구원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5)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온 것입니다.
본문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소유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창조하셨고 그가 완전케 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믿는 자들을 괴롭게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은 구약적인 의미에서는 선민 이스라엘입니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장 9절에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이사야 1장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백성은 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②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이사야 49장 16절에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④ 구원받은 총수입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합하여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를 가리킵니다. 로마서 11장 25-26절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⑥ 인 맞은 자 14만 4천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했습니다.
⑦ 흰 옷 입은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했습니다.
⑧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요한 계시록 7장 14절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라고 했습니다.
⑨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6) 사람 안에 비취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0절에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7) 이 빛을 받으면 빛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6절에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8) 이 빛은 이끌어 주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Ⅱ. 예수는 어두움에 비취는 빛입니다.

본문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어두움도 빛과 마찬가지로 만물과의 관계에서는 생명이 없는 죽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윤리적인 관계에서는 악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관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의 사망을 상징합니다. 그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입니다.
본문은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비취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빛이 타락한 세상에 비취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비추다'를 현재형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그 빛은 예수님 승천 이후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비취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에 비취는 참 빛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성령 안에서 성도들에게 거침없이 비취고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1)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죄악된 세상은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참 빛 되신 예수, 생명의 빛 되신 예수를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2) 사람들의 행위가 악해서 빛보다 어둠을 사랑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반대로 어두움은 영적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했다고 비교급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 '~보다', '도리어'(rather)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3) 빛으로 오기를 거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빛으로 오지 아니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는 완곡한 표현보다 악을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이 곧 악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기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고 한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 행위가 드러나서 수치를 당하거나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당하는데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에 대한 죄책감에서 오는 회개는 이런 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의 신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빛으로 나타냈습니다.
미가서 7장 8절에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3장 4절에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요 12:46).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비취는 빛을 받아서 세상에 반사하는 반사체입니다.
이사야 60잘 1절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빛은 무의미의 빛이 아닙니다. 그 빛은 어두움을 삼키는 빛입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빛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롬 13:12). 빛과 어두움은 사귈 수 없습니다(고후 6:14).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합니다(엡 5:8).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습니다(엡 5:9). 우리는 이 빛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6장 23절에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교회의 존재 의의이자 설립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빛의 아들들이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은의 삶으로 하나님의 일을 선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두움에 거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에 거하는 것은 예수를 빛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빛의 사람들은 어두움과 짝할 수 없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빛은 어두움을 삼키는 적극적인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은 것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빛의 사람들은 빛의 일을 합니다. 그것은 빛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고 빛을 거부합니다. 빛을 거부하는 그 자체가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는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양식에다 비유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2-35절에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빛의 일이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으로 집약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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